한국철학연습: 함석헌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주목한 함석헌(1901~1989)의 씨알사상[편집 | 원본 편집]
☞ 김상봉, <씨알철학과 세계철학>, <<철학>> 제102집, 한국철학회, 2010
-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음. 2천명이 넘는 외국의 철학자들이 참여한 이 대회는 한국철학계의 성장을 증명해주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의 심각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 대회이기도 했음. 그것은 과연 한국에도 남들에게 보여줄 철학이 있는가 하는 물음임
- 여러날 동안 계속된 대회에서 명실상부하게 현대 한국철학을 다룬 논문들이 발표되고 토론된 세션은 단 둘이었다고 김상봉은 말함. 하나는 씨알철학 세션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철학'임. 이 두 세션은 전체 대회 가운데 가장 큰 대중적 호응을 얻은 세션임
- 한국민주주의와 철학 세션 및 씨알철학세션은 세계철학자대회 조직위원회의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세션임. 처음 이 세션을 공식적으로 제안한 사람은 당시 한국철학회의 발전위원장이었던 서유석교수(호원대)로 본인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한국의 철학이라고 소개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다고 함
- 씨알철학 세션을 취재한 기자가 세계철학자대회의 조직위원장이었던 이명현 교수에게 "함석헌의 사상을 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었을 때, 그는 "(함석헌이) 상식적인 얘기를 한 것이지 학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대답했다는 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함석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했음
- 즉 김재권과 같은 철학자라면 모를까 함석헌이나 유영모(1890~1981)를 세계 철학자대회에서 소개하겠다는 것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했음
- 하지만 김상봉은 김재권 교수 등은 한국 출신 철학자들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현실을 고민하는 철학자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한국철학자라고 하기 어렵다고 보았음
-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의 현실을 두고 철학했던 사람들임. 직업적으로 철학교수도 아니었고 그 서술의 방식에서도 학술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쓴 적도 없지만 이 땅의 많은 중견 철학연구자들이 참된 의미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로서 인정했음
- 당시 씨알철학서션에서 발표된 논문은 모두 21편임. 발표자들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와 영문학자, 역사학자, 교육학자를 포함했음.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함석헌과 유영모 철학의 생명력을 증명함
- 씨알철학은 한마디로 말해 현대 한국인의 자기인식의 표현임. 자기인식은 철학의 영원한 과제임. 철학은 이를 통해 자기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데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와 주체성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음. 하지만 한국에서의 철학은 너무도 오랫동안 자기인식이기보다는 타자의 학습으로 이해되어 왔음. 안호상이나 박종홍처럼 민족이나 주체의 개념을 제법 진지하게 입에 올린 철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생각한 주체나 민족의 내용이란 주체적인 것도 민중의 역사에 뿌리박은 것도 아니고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주체나 민족 개념을 그저 한국의 현실에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
- 유영모나 함석헌은 전통적인 동양학문의 방법론을 계승한 철학자들이면서 동아시아적 교양에 바탕하여 서양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였고, 서양철학 및 종교와 동양의 철학 및 종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대립을 자기 속에서 치열하게 따라체험한 뒤에 끝내 양자의 대립을 넘어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개방했음
- 유영모와 함석헌 씨알사상의 중요한 점은 민중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임
허다한 식민지 엘리트들이 지배적 주류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민중적 삶을 등진 것과 달리 그들은 도리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전체와 하나 되려 했다. 그들에게 철학은 지배를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곧 관조가 아니었다. 함석헌에게 도리어 참된 "앎은 앓음'이다. 노예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난에 참여하고, 그 보편적인 수난의 뜻을 붇는 것이야말로 씨알철학의 길이었다. 플라톤의 비유를 거꾸로 돌려 말하자면 빛을 찾아 동굴을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정신의 낮아짐이야말로 씨알철학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영모는 빛이 아니라 어둠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김상봉, <씨알철학과 세계철학>, <<철학>> 제102집, 한국철학회, 2010, 157쪽
함석헌이 말한 씨알[편집 | 원본 편집]
민(民)의 우리말, 씨알
'씨알'이란 말은 '씨'라는 말과 '알'이라는 말을 한데 붙인 것입니다. 보통으로 하면 종자라는 뜻입니다. 종자는 물론 한문자의 종자(種子)에서 온 것입니다. 순전한 우리말로 하면 '씨앗' 혹은 '씨갓'입니다. 아마 원래는 '씨알'인 것을 'ㄹ'이 'ㅅ'으로 변해서, '씨앗'이 되고 또 '아' 줄과 '가' 줄이 서로 통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씨갓'으로 됐는지 모릅니다. 어쨌건 종자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빌려서 민(民)의 뜻으로 쓴 것입니다. 보통은 없는 것을 새로 지어낸 말입니다. 지금은 민의 시대여서 우리는 늘 민이란 말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민, 인종, 민족, 평민, 민권, 민생... 입니다. 그런데 거기 맞는 우리말이 없습니다. 국(國)은 나라라 하면 되고 인(人)은 사람이라 하면 되지만 민은 뭐라 할까? 백성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百姓'의 음뿐이지 순전한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민이란 말을 우리말로 씨알이라 하면 어떠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내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유영모 선생님이 먼저 하신 것입니다. 언젠가 <<대학>> 강의를 하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묾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오래 되어 말이 좀 틀린 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민을 씨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 대로 써와서 이제 10년이 넘습니다.
-함석헌, <씨알>, <<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한길사, 2009, 263~264쪽
민은 지위도 없는 맨사람입니다
그럼 민은 무엇인가. 한문자의 어원을 설명하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민(民)자는 모(母: 어미)에다 한 획을 더해서 만든 것이라 합니다. 즉 어머니에게서 난 것이란 뜻입니다. 그럼 누구는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는 것이 있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것은 보통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민이라는 글자에 벌써 역사, 사회가 나타나 있습니다. 벌써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있습니다. 민은 곧 사민(四民)입니다. 사, 농, 공, 상입니다. 벼슬할 수 있는 자격 있는 것이 사(士) 곧 선비[덕능거위왈사(德能居位曰士)], 땅을 갈아서 먹을 것을 길러내는 것이 여름질꾼[벽토식곡왈농(辟土殖穀曰農)], 마음을 쓰고 손을 써서 잡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치[교심노수이성기물왈공(巧心勞手以成器物曰工)], 물건 돈을 돌리는 것이 장사치[통재화왈상(通財貨曰商)]. 그럼 이 글자 속에 이미 봉건제도가 있습니다. 민은 단순한 사람 곧 인(人)이 아닙니다. 정치인이요 사회인입니다. 서양말로 하면 'people'인데 'people'도 역시 'man'만이 아닙니다. 일정한 목적 밑에 뭉친 한 덩어리의 사람입니다. ... 실지로 사람은 어느 특정한 사회, 제도 밑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단순한 이론보다 구체적인 현실이 매양 지배적입니다.
-함석헌, <씨알>, <<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한길사, 2009, 264~266쪽
나의 서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왜, 민(民)대로 두는 것보다 아직 좀 어색한 듯하지만, '씨알'이라 하자느냐? 쉽게 가장 중요한 점을 따져 말해서, 주체성 때문입니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것 아닙니다. 민(民), 'people' 하고만 있는 동안은 '민'의 참뜻 'people'의 참뜻은 모르고 지나갈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옮겨보려 할 때, 즉 요새 토착화한 말이 많습니다마는 토착화를 시켜보려 할 때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 토착화라지만 토착이 무엇입니까? 뿌리를 박는단 말입니다. 허공에 뜬 나무도 없고 허공에 뜬 문화도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땅이 피어난 것이듯이 모든 문화도 정신적인 흙이 피어난 것입니다. ... 민(民)이냐 씨알이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죽은 말을 캐어 살려보려 애써야, 그러는 동안에 생명이 살아납니다. ... 우리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나'를 찾기 위해 잃었던 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민족주의는 아닙니다. 세계주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라도 인격 없는 역사, 문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은 특정적이지 일반적이 아닙니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나는 나여야 할 것입니다. 세계적이 되면 변할 것입니다. 민족성도 달라지고 문화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질 때는 달라져도 그때까지는 나의 서는 자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온고지신입니다. 씨알보다 더 좋은 말이 있거든 고칠 셈치고 우선은 써봅니다, 민(民)대로도 좋지만 민(民)보다는 좀더 나가기 위해서. 민(民)은 봉건시대를 표시하지만 씨알은 민주주의 시대를 표시합니다.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가 거기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씨알입니다!
-함석헌, <씨알>, <<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한길사, 2009, 266~268쪽
함석헌이 말한 생명[편집 | 원본 편집]
생명은 반발이다 저항이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서도,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 유기체라 부르지만 그 기(幾)라는 것이 무엇인가? 벌써 그것이 자성적(自性的)인 것 아닌가? 생명이 어째서 무생(無生) 속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고, 그저 생명 자체가 자기 설명을 할 뿐이다. 생명은 곧 자기주장이다. 진화론에서는 무생대(無生代), 시생대(始生代)를 갈라 말해서 지구 위에 생명 없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다가 어느 때에 가서 비로소 생명의 탄생을 보게 됐다고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물론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런 어떤 순간을 생각하여보라,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 생물의 복잡한 생활기능을 해가는 가지가지의 기관을 보면 거기 싸움의 기록, 저항의 역사가 역력히 박혀 있다. 그 이빨, 그 톱, 그 주둥이, 그 사지, 그 피부, 그 내장을 하나씩 살펴보라. 그것은 다 맞서기 위한 것, 버티기 위한 것, 견기도 결러내기 위한 것들이다. 그것들을 가지고 그들은 비, 바람, 눈과 열과 가뭄과 다른 동류들과 겨루고 싸워온 것이다. ... 물질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정신이 거기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과 싸우는 것 아니다. 스스로 하는 뜻에서 물질이 나왔고 악이 나왔다. ... 생명 혹은 뜻은 로켓 같은 것이다. 폭발하는 원인이 내 속에 있고 그 때문에 저항하고 그 때문에 나아간다. 사람이 동력을 구할 때 처음에는 밖의 남의 힘을 가져다 썼고, 그다음은 물이나 공기같이 나의 나가는 길에 저항을 일으키는 힘을 역이용하여 썼고, 그런 것도 없는 진공에 간즉 저항을 자기 속에서 일으켜서 쓰게 됐다. 그것이 로켓이다. 정신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연력에 결러대다가, 인간과 인간끼리 인격 대 인격 간에 결러대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활동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정말은 자아에 대한 반발이다. 때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 살이 죽은 것이요, 악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죽은 선, 곧 할 것을 다하고 난 나 자신이다. 나는 거기 저항하는 자다.
-함석헌, <저항의 철학>, <<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한길사, 2009, 110~113쪽
함석헌이 말한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역사를 안다 함은 지나간 날의 일기장을 외운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역사라면 지나간 일의 기록으로만 알고, 역사를 안다면 옛날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역사는 그렇게 쉽게 이야깃거리로 재미로 알고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참으로 깊이 알려면 비지땀이 흐르는 된 마음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마치 먹을 것을 먹어 살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의 산 관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뜻이 문제다. 또 그 다음은 기록이라는 말이다. 지나간 일의 기록이라 함은 틀림없는 말이지만, 몇 개의 사실을 골라 그 시작과 끝머리를 낱낱이 적는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그 사실을 기록하되 서로서로 사이에 산 관계를 주어가지고 체계가 있게, 통일이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인과관계의 고리가 맺어져가지고 전체가 한 개 통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하낟. 하나밖에 없는 것이 역사다. 한국 역사면 5천년 동안 이 민족 안에 났던 모든 사람과 일은 마디마디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따로 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 생명이다. 산 것이다.그러나 한국 역사는 또 한국 역사로 그것이 완전한, 따로 서 있는 것이냐 하면 아니다. 한국 역사는 세계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기록은 개개의 사실을 자료로 삼아가지고 공근 하나인 산 것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드러낸다는 것은 현상적인 드러냄이 아니라 뜻의 드러냄이므로 그 기록은 단순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풀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 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알은 그것보다도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써낸 후에야 그의 책임은 다해지는 것이다. 역사가의 자격은 그 기억에 있지 않고 판단에 있다. ... 여럿인 가운데서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 그 뜻을 찾아얻을 때 죽었던 돌과 나무가 미(美)로 살아나고, 떨어졌던 과거와 현재가 진(眞)으로 살아나고, 서로 원수 되었던 너와 나의 행동이 선(善)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역사를 앎이요, 역사를 봄이다.
오늘의 토론 주제(2022.11.30)[편집 | 원본 편집]
☞ 함석헌의 씨알사상에 기초하여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2.11.30)[편집 | 원본 편집]
- 씨알사상의 주체성+능동성 => 능동적인 시선으로 세상 바라보기
- 고통을 내것으로: 직접적인 경험을 넓힐 필요 있음
-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 => 개인의 개성을 찾아가는 길
- 나다움에 기초한 의미부여의 중요성
- 삶 속에서 의미 찾기: 철학하는 사람의 역할
- 의미 부여한 것을 돌아보고 내 삶을 고찰하기: 토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