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율곡과의 만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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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8일 (월) 22:32 판
퇴계 <<자성록>>에 실린 율곡과의 편지글(일부)
☞ 이황 지음, 최중석 옮김, <<이퇴계의 자성록>>, 국학자료원, 2003, 157~165쪽
이숙헌(이이)에게 답함
전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대가 불교의 서적을 읽고 자못 중독이 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에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날 내게 와서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보내주신 편지가 또한 이와 같음을 보니, 그대가 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 퇴계와 율곡과의 첫 만남
☞ 최영성,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번의 만남>, <<퇴계학논집>> 23호, 영남퇴계학연구원, 2018, 41~72쪽
- 율곡 이이(1536~1584)는 22세 때인 1557년 결혼했으며, 당시 장인은 성주목사로 있던 노경린(1516~1568)이었음. 1557년 4월, 성주에서 혼인한 뒤 약 9개월 정도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했음
- 율곡이 퇴계를 찾아뵌 것은 1558년 2월임. 율곡은 당시 신혼인사 차 강릉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도중에 안동에 들러 퇴계 이황을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음. 당시 율곡은 23세였고 퇴계는 58세였음
- 당시 율곡의 장인 노경린은 선비들에게 이름이 나 있는 사람이었고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천곡서원을 창건할 때 퇴계에서 서원에 관한 일을 묻기도 했음. 노경린이 퇴계를 잘 알고 퇴계를 존경했기 때문에 퇴계 또한 노경린의 사위인 율곡의 존재를 알았을 것임
- 율곡이 퇴계를 만난 목적을 최영성은 '구도(求道)'에 있었다고 보았음. 아마 장인 노경린의 권고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했음
- 당시의 장면을 담은 퇴계의 시
이수재(이이)가 계상(溪上)으로 찾아와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다
젊어서 이름 날린 그대는 서울에 있고 늙어서 병 많은 나는 시골에 있네. 오늘 찾아 올 줄 어찌 알았으리 이전의 쌓인 회포 다 털어보세나.
천재 청년을 2월 봄에 기쁘게 만나 사흘을 붙들으니 정신적으로 통한 듯 비는 소나기 져 시내에 가득 차고 눈은 구슬 꽃 만들어 나무 감싼다.
- 눈 내리는 도산서원(사진출처: 나무의 걷기여행 앨범)
☞ 계상(溪上): 도산서원 뒷산 너머의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시냇가 주변을 계상(溪上)이라고 불렀음. 퇴계의 호 '퇴계(退溪)'의 의미는 '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로, "물러나 계상에 머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
-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 계상에서 조용히 지낸다>>. 천원 지폐 뒷면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