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연습: 실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An_SW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다른 사용자 한 명의 중간 판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21번째 줄: 21번째 줄:
  
 
☞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한국사상사연구회, <<실학의 철학>>, 예문서원, 1997</br>
 
☞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한국사상사연구회, <<실학의 철학>>, 예문서원, 1997</br>
 +
☞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2</br>
  
 
* 수기(修己: 자신을 수양함)와 안인(安人: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은 원래 도덕과 정치 의식이 투철했음. 도덕과 정치 등의 측면으로 유용, 유익한 생활관을 제공하는 실제적 사상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유학자들은 유학을 실학(實學)이라고 불렀음
 
* 수기(修己: 자신을 수양함)와 안인(安人: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은 원래 도덕과 정치 의식이 투철했음. 도덕과 정치 등의 측면으로 유용, 유익한 생활관을 제공하는 실제적 사상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유학자들은 유학을 실학(實學)이라고 불렀음
27번째 줄: 28번째 줄:
 
==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에 대응한 실학으로서의 유학''' ==
 
==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에 대응한 실학으로서의 유학''' ==
  
* 성리학자들 가운데
+
* 성리학자들 가운데 고려 말 성리학 수용기부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877 이제현(李齊賢, 1278~1367)]이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
 +
* 이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생존하면서 조선에 성리학을 관학화하는 데 기여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권근(1352~1409) 등이 성리학에 실학이라는 명칭을 적용, 강조했음
 +
* 이들은 불교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비되는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음
 +
 
 +
  우리(유학)는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고 말하고 저들(불교)은 "일체에 따른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동일한 듯하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는 것은 사물이 이를 때에 이 마음으로 응하여 각각 그 당연한 법칙에 따라서 제어, 처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예컨대 자식이 여기에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효를 행하고 불효를 행하지 않게 하며, 신하가 여기에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충을 행하게 하고 난을 행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
  ...
 +
  부처가 말한 "일체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된 사람이 효자는 효도하고, 불효자는 불효하며, 신화된 자 중 충성스러운 자는 충성하고, 불충한 자는 불충하는 것이다.
 +
  ...
 +
  성실함을 알면 가상히 여기고, 잘하지 못함을 보면 용서해 주며, 쉬운 것을 요구하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아서 사해 밖 백성들까지 은택을 입게 한다. ... 이것이 바로 '''실학의 공효'''가 바깥에 미치는 큰 단서이다. 이것을 추진해 나아간다면 천하와 국가도 안정되게 하고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우리 동방에만 도움이 되겠는가?
 +
  -권근, <<양촌집>>
 +
 
 +
*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들은 불교보다 성리학이 우월하다는 근거로 오륜, 충효, 인의충신의 학습과 실천으로 인한 결실을 들었음
 +
 
 +
 
 +
== '''성리학 만개기의 실학: 율곡의 철학''' ==
 +
 
 +
* 성리학이 통치 원리로 채택된 후 2백년 정도 지난 조선 중기(16세기)에 이르면 불교와 도교를 적극적으로 배척한 여건 위에서 성리학이 사상계를 완전히 장악함
 +
* 성명(性命), 의리, 천리(天理), 인성(人性) 연구가 심오하게 이루어지며 한국 성리학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확립되는 시기임
 +
* 이 시기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곧 퇴게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임
 +
* 이황은 실학이라는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특히 이(理)를 위주로 하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향을 보임
 +
* 한편 율곡은 리와 기 어디에도 편중하지 않으면서 리 못지 않게 기도 중시함. 특히 실효성 있는 성과를 가져 오도록 힘쓰는 '무실(務實: 실제에 힘씀)'을 중시한 것이 그의 학문 정신이기도 함
 +
* 무실에서의 '실(實: 실제)'이란 공언(空言: 현실성 없는 빈말), 문구(文具: 실속없이 겉만 그럴듯함)에 대비되는 말로 실공(實功: 실질적 공효), 실효(實效), 실행(實行)의 의미를 지님
 +
* 율곡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국방 등 각 방면에 걸친 경장책[잘못된 것을 과감히 고쳐 나가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성리학 이론가가 아닌 조선조의 대표적인 경세가의 모습을 확립함
 +
* 그의 경세의 목표는 경제적인 풍요, 튼튼한 국방력과 함께 모든 사람을 의리와 가치를 아는 인격체로 교화시켜 나가는 데 있었음. 그의 무실 사상은 도덕과 실리의 병행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
 +
 
 +
  '''신이 생각하건대 정치는 때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일은 '실(實)'에 힘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치를 하는 데 시의적절함을 알지 못하고 일을 맡아 실공(實功)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나더라도 통치의 효과를 서우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
 +
  '''때가 변하면 법은 달라지는 것입니다.'''</br>
 +
  -<<율곡집>> 권5, <만언봉사(萬言封事)>
 +
 
 +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어 삶을 즐기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고루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그릇된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시일만 보내거나, 한 가지 폐단도 혁신하지 못하고 한 가지 정책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할 뿐이다'는 공허한 말만 부르짓는다면 이는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br>
 +
  -<<율곡집>> 권25, <성학집요(聖學輯要)>
 +
 
 +
 
 +
* 한편, 율곡의 실학은 도덕적 실천을 근간으로 하는 것임
 +
 
 +
  배우는 이의 덕을 진작시키고 일을 닦아나가는 '진덕수업(進德修業)'은 오직 경(敬)을 독실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경을 독실하게 하지 않다다면 다만 헛된 말일 뿐이다. 반드시 겉과 속이 하나로 한결같고 한 순간도 그 상태가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는 법도가 있고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터득함게 있어야 하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을 잘 간직하고 순간이라도 본성을 잘 수양하며 노력을 오래 했더라도 효과를 보려고만 하지 말며 부지런히 힘써서 죽은 뒤에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 실학이다.'''</br>
 +
  -<<율곡집>> 권15, <학교모범>
 +
 
 +
 
 +
== '''탈성리학의 실학''' ==
 +
 
 +
* 17~18세이게 이황, 이이의 사상, 특히 이이의 무실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적용, 시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됨
 +
* 성호 이익(1681~1763) 등이 그런 학자임. 이들은 성리학자들이 경시하면 박학(博學: 널리 배움)의 방법을 무실 정신으로 중시함
 +
* 박학은 원시 유학부터 중요시한 공부방법 중에 하나인데 17~18세기에는 일상적 실용, 실제성을 위주로한 학문을 중시했음
 +
* 특히 기존 성리학에서 강조했던 예의 질서는 삼강오륜의 기본 질서와 그것을 근간으로 한 파생적 질서, 즉 지주 vs 소작인, 남성 vs 여성, 처 vs 첩, 주인 vs 노비 등의 명분 질서로 구성되었음. 그리고 그것이 상하 위계적이라는 점에서 주로 후자들은 그들의 사회로부터 여러 차별을 강요받았음. 도덕은 점차 실질적 삶의 개선이라는 측면보다는 체제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화되고, 일방적 피해자였던 하층민과 소외 계층은 저항세력 또는 사회불만세력이 되어갔음
 +
* 이에 더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무기력으로 일관한 지배층의 행태와 통치 질서의 와해는 유교 이념을 허구적인 것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음
 +
* 이 과정에서 율곡이 말한 경장(更張), 무실은 도덕성의 회복과 함께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짐
 +
 
 +
  이이가 곤경에 처한 것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조세와 관련한 행정을 바꾸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기고, 여러 읍에 정원 외의 군사를 더 배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고,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서얼을 정치계에 나갈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고, 성과 보루를 보수하여 다시 쌓는 일은 맞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왜병이 쳐들어온 후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안으로 찾아낸 것은 결국 이이가 제시했던 이 다섯 가지를 넘어서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이이의 선견지명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밝게 빛났으니 이 몇 가지를 시행하는 일은 평상시에는 등한시 여길 수도 있지만 환란을 걱정하고 예방하려면 경장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br>
 +
  -허균, <<성소부부고>> 권11, <정론(政論)>
 +
 
 +
 
 +
* '탈'성리학을 도모했던 새로운 실학의 움직임은 농사와 상업의 중시, 이를 위한 기반시설인 수리 사업의 개발, 농사법의 개량, 상품 시장의 확장, 운송과 관련되니 기기 제작 등에 직접 참여하는 철학, 노비제 개혁, 동서 문물의 교역등을 중시하는 철학의 제시 등으로 나타남
 +
 
 +
 
 +
== '''오늘의 토론 주제(2022.11.9)''' ==
 +
 
 +
  ☞ <span style="color:#ff0000;">'''율곡 이이의 무실 정신에 기반해 보았을 때 철학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실학은 무엇일까요? 그 실학은 무엇에 대응하는 것인가요?'''</span>
 +
 
 +
 
 +
[[분류: 한국철학연습]]

2022년 11월 9일 (수) 15:46 기준 최신판

1930년대 조선학 운동[편집 | 원본 편집]

☞ 최재목,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다산과 현대>>,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69~101쪽
☞ 백승철,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민족인식, 근대관>, <<역사와 실학>> 36, 역사실학회, 2008, 113~148쪽

  • 1930년대에 조선학 운동, 국학 운동이 일어나게 됨. 조선학은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 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함
  • 특히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1934)~100주년(1935) 행사를 계기로 실학과 정약용이 재발견, 호출되기 시작함
  • 조선학은 특히 민족주의 진영에 속하는 인사들 사이에서 널리 수용되어 갔음
  •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사상문화와 민족정신의 영역에까지 확장되고 있었던 때임. 당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 위기에 따라 일본도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이를 타개하고자 만주 침략 전쟁을 도발하고 식민지 조선의 수탈을 강화함. 그리고 그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황국신민화 체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남
  • 그 한 예로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 연구를 강화하는데 식민 통치 이전의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치부하고 일제 치하의 조서는 발전=개화=문명화=계몽된 사회로 논증하여 부각시키는 전략을 구사함. 이 과정에서 민족의 정통성, 민족혼은 폄하되거나 부정됨
  • 이에 대응하여 조선학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은(정인보, 안재홍, 현상윤 등을 들 수 있음) 조선 후기의 실학에 주목했음. 그리고 그 실학의 학풍이 반계 유형원(1622~1673) 이후 성호 이익(1681~1763)을 거쳐 다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고 보았음
  • 또한 이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단군에 주목하기도 했음. 단군조선에 관한 이념은 민족주의 진영의 역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모두 내포한 개념이었음
  • 실학 연구를 통해 드러난 민족주의 계열의 근대관의 예시로 현상윤을 들 수 있음. 그는 "실학운동이 계속되고 성공되었다면 필연적으로 구미의 물질문명이 훨씬 용이하게 또는 일찍이 조선에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하여 조선사회의 내적인 근대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음
실학에 관한 논의 자체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하지만 실학이라는 용어를 조선 유학자들이 쓴 것은 사실이다.


시대별 실학의 의미의 변이[편집 | 원본 편집]

☞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한국사상사연구회, <<실학의 철학>>, 예문서원, 1997
☞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2

  • 수기(修己: 자신을 수양함)와 안인(安人: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은 원래 도덕과 정치 의식이 투철했음. 도덕과 정치 등의 측면으로 유용, 유익한 생활관을 제공하는 실제적 사상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유학자들은 유학을 실학(實學)이라고 불렀음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에 대응한 실학으로서의 유학[편집 | 원본 편집]

  • 성리학자들 가운데 고려 말 성리학 수용기부터 이제현(李齊賢, 1278~1367)이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음
  • 이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생존하면서 조선에 성리학을 관학화하는 데 기여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권근(1352~1409) 등이 성리학에 실학이라는 명칭을 적용, 강조했음
  • 이들은 불교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비되는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음
 우리(유학)는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고 말하고 저들(불교)은 "일체에 따른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동일한 듯하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는 것은 사물이 이를 때에 이 마음으로 응하여 각각 그 당연한 법칙에 따라서 제어, 처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식이 여기에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효를 행하고 불효를 행하지 않게 하며, 신하가 여기에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충을 행하게 하고 난을 행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
 부처가 말한 "일체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된 사람이 효자는 효도하고, 불효자는 불효하며, 신화된 자 중 충성스러운 자는 충성하고, 불충한 자는 불충하는 것이다.
 ...
 성실함을 알면 가상히 여기고, 잘하지 못함을 보면 용서해 주며, 쉬운 것을 요구하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아서 사해 밖 백성들까지 은택을 입게 한다. ... 이것이 바로 실학의 공효가 바깥에 미치는 큰 단서이다. 이것을 추진해 나아간다면 천하와 국가도 안정되게 하고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우리 동방에만 도움이 되겠는가? 
 -권근, <<양촌집>>
  •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들은 불교보다 성리학이 우월하다는 근거로 오륜, 충효, 인의충신의 학습과 실천으로 인한 결실을 들었음


성리학 만개기의 실학: 율곡의 철학[편집 | 원본 편집]

  • 성리학이 통치 원리로 채택된 후 2백년 정도 지난 조선 중기(16세기)에 이르면 불교와 도교를 적극적으로 배척한 여건 위에서 성리학이 사상계를 완전히 장악함
  • 성명(性命), 의리, 천리(天理), 인성(人性) 연구가 심오하게 이루어지며 한국 성리학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확립되는 시기임
  • 이 시기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곧 퇴게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임
  • 이황은 실학이라는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특히 이(理)를 위주로 하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향을 보임
  • 한편 율곡은 리와 기 어디에도 편중하지 않으면서 리 못지 않게 기도 중시함. 특히 실효성 있는 성과를 가져 오도록 힘쓰는 '무실(務實: 실제에 힘씀)'을 중시한 것이 그의 학문 정신이기도 함
  • 무실에서의 '실(實: 실제)'이란 공언(空言: 현실성 없는 빈말), 문구(文具: 실속없이 겉만 그럴듯함)에 대비되는 말로 실공(實功: 실질적 공효), 실효(實效), 실행(實行)의 의미를 지님
  • 율곡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국방 등 각 방면에 걸친 경장책[잘못된 것을 과감히 고쳐 나가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성리학 이론가가 아닌 조선조의 대표적인 경세가의 모습을 확립함
  • 그의 경세의 목표는 경제적인 풍요, 튼튼한 국방력과 함께 모든 사람을 의리와 가치를 아는 인격체로 교화시켜 나가는 데 있었음. 그의 무실 사상은 도덕과 실리의 병행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
 신이 생각하건대 정치는 때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일은 '실(實)'에 힘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정치를 하는 데 시의적절함을 알지 못하고 일을 맡아 실공(實功)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나더라도 통치의 효과를 서우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때가 변하면 법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율곡집>> 권5, <만언봉사(萬言封事)>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어 삶을 즐기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고루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그릇된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시일만 보내거나, 한 가지 폐단도 혁신하지 못하고 한 가지 정책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할 뿐이다'는 공허한 말만 부르짓는다면 이는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곡집>> 권25, <성학집요(聖學輯要)>


  • 한편, 율곡의 실학은 도덕적 실천을 근간으로 하는 것임
 배우는 이의 덕을 진작시키고 일을 닦아나가는 '진덕수업(進德修業)'은 오직 경(敬)을 독실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경을 독실하게 하지 않다다면 다만 헛된 말일 뿐이다. 반드시 겉과 속이 하나로 한결같고 한 순간도 그 상태가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는 법도가 있고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터득함게 있어야 하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을 잘 간직하고 순간이라도 본성을 잘 수양하며 노력을 오래 했더라도 효과를 보려고만 하지 말며 부지런히 힘써서 죽은 뒤에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 실학이다.
-<<율곡집>> 권15, <학교모범>


탈성리학의 실학[편집 | 원본 편집]

  • 17~18세이게 이황, 이이의 사상, 특히 이이의 무실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적용, 시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됨
  • 성호 이익(1681~1763) 등이 그런 학자임. 이들은 성리학자들이 경시하면 박학(博學: 널리 배움)의 방법을 무실 정신으로 중시함
  • 박학은 원시 유학부터 중요시한 공부방법 중에 하나인데 17~18세기에는 일상적 실용, 실제성을 위주로한 학문을 중시했음
  • 특히 기존 성리학에서 강조했던 예의 질서는 삼강오륜의 기본 질서와 그것을 근간으로 한 파생적 질서, 즉 지주 vs 소작인, 남성 vs 여성, 처 vs 첩, 주인 vs 노비 등의 명분 질서로 구성되었음. 그리고 그것이 상하 위계적이라는 점에서 주로 후자들은 그들의 사회로부터 여러 차별을 강요받았음. 도덕은 점차 실질적 삶의 개선이라는 측면보다는 체제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화되고, 일방적 피해자였던 하층민과 소외 계층은 저항세력 또는 사회불만세력이 되어갔음
  • 이에 더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무기력으로 일관한 지배층의 행태와 통치 질서의 와해는 유교 이념을 허구적인 것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음
  • 이 과정에서 율곡이 말한 경장(更張), 무실은 도덕성의 회복과 함께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짐
 이이가 곤경에 처한 것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조세와 관련한 행정을 바꾸는 것이 불편하다고 여기고, 여러 읍에 정원 외의 군사를 더 배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고,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서얼을 정치계에 나갈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고, 성과 보루를 보수하여 다시 쌓는 일은 맞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병이 쳐들어온 후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안으로 찾아낸 것은 결국 이이가 제시했던 이 다섯 가지를 넘어서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이이의 선견지명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밝게 빛났으니 이 몇 가지를 시행하는 일은 평상시에는 등한시 여길 수도 있지만 환란을 걱정하고 예방하려면 경장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용감하게 말한 것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권11, <정론(政論)>


  • '탈'성리학을 도모했던 새로운 실학의 움직임은 농사와 상업의 중시, 이를 위한 기반시설인 수리 사업의 개발, 농사법의 개량, 상품 시장의 확장, 운송과 관련되니 기기 제작 등에 직접 참여하는 철학, 노비제 개혁, 동서 문물의 교역등을 중시하는 철학의 제시 등으로 나타남


오늘의 토론 주제(2022.11.9)[편집 | 원본 편집]

율곡 이이의 무실 정신에 기반해 보았을 때 철학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실학은 무엇일까요? 그 실학은 무엇에 대응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