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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 이색이 65세가 되던 해 이성계의 주도 하에 역성(易姓)혁명[왕조교체: 고려->조선]이 일어나게 됨. 이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다 유배되었음. 65세 때 유배가 해제되었지만 그 해에 자신의 아들이 32세의 나이에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사주로 피살되게 됨<br/> | ○ 목은 이색이 65세가 되던 해 이성계의 주도 하에 역성(易姓)혁명[왕조교체: 고려->조선]이 일어나게 됨. 이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다 유배되었음. 65세 때 유배가 해제되었지만 그 해에 자신의 아들이 32세의 나이에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사주로 피살되게 됨<br/> | ||
○ 유배가 해제된 후 사면되고서 한주로 돌아왔음. 68세 때에는 가을에 관동으로 유람을 하고 오대산에 머물기도 했음. 목은이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은 까닭에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높았는데도 죽임을 당했고, 귀양에서 돌아온 목은이 여주에 있는 농막에 은거하고 지냈는데 어느날 그의 문인이 찾아오자 그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일토록 울다가 내려온 일도 있었다고 함<br/> | ○ 유배가 해제된 후 사면되고서 한주로 돌아왔음. 68세 때에는 가을에 관동으로 유람을 하고 오대산에 머물기도 했음. 목은이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은 까닭에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높았는데도 죽임을 당했고, 귀양에서 돌아온 목은이 여주에 있는 농막에 은거하고 지냈는데 어느날 그의 문인이 찾아오자 그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일토록 울다가 내려온 일도 있었다고 함<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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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이색은 왜 인생 만년에 관동 지역으로 유람을 했을까?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관동지역으로의 유람은 어떤 의미였을까?'''</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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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의 나이 69세 때 여주 여강으로 피서가기를 청하여 5월 3일 개경 벽란도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에 오른 뒤 갑자기 병이 나서 막내 아들 종선을 오게 했으나 병이 위중해졌음. 승려가 와서 불경을 외우려 했으나 이를 말리면서 "나는 죽고 사는 이치를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서는 이 말을 마치자마자 운명했음. 배 안에서 갑자기 운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은 아닌지 그의 죽음을 의심하기도 했음<br/> | ○ 목은의 나이 69세 때 여주 여강으로 피서가기를 청하여 5월 3일 개경 벽란도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에 오른 뒤 갑자기 병이 나서 막내 아들 종선을 오게 했으나 병이 위중해졌음. 승려가 와서 불경을 외우려 했으나 이를 말리면서 "나는 죽고 사는 이치를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서는 이 말을 마치자마자 운명했음. 배 안에서 갑자기 운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은 아닌지 그의 죽음을 의심하기도 했음<br/> | ||
○ 신흠(1566~1628)이 지은 <<연담>>에서는 "고려가 망할 때 사람들이 오직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만 굳게 절개를 지킬 줄 알고 목은의 사람됨은 알지 못했는데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음<br/> | ○ 신흠(1566~1628)이 지은 <<연담>>에서는 "고려가 망할 때 사람들이 오직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만 굳게 절개를 지킬 줄 알고 목은의 사람됨은 알지 못했는데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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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궁핍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말을 빠르게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사람이나 노복들에게 혹시 허물이 있어도 차근히 이치를 깨우치게 해줄 뿐 노여워하지 않았다." | "생활이 궁핍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말을 빠르게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사람이나 노복들에게 혹시 허물이 있어도 차근히 이치를 깨우치게 해줄 뿐 노여워하지 않았다." | ||
"선생님에게는 옥에 갇히는 것이 욕되는 것이 아니었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이 또한 영화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절조가 확고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선생님에게는 옥에 갇히는 것이 욕되는 것이 아니었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이 또한 영화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절조가 확고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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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은의 일생을 더 살펴보고 싶다면'''</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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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0A_0030_010_0010 <<목은집>>에 실린 목은의 <행장>]</br> | ||
+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020A_0040_010_0010 <<목은집>>에 실린 목은의 <신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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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이 평생 추구했을 '군자'에 관한 시'''(만년의 시) | * '''목은이 평생 추구했을 '군자'에 관한 시'''(만년의 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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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만 이 한 몸은 좁쌀 같지만''' | '''쪼그만 이 한 몸은 좁쌀 같지만''' | ||
'''하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 | '''하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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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시를 남기게 될까?'''</span> | ||
☞ 참고: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해제 | ☞ 참고: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해제 |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0A&solrQ=query%E2%80%A0%EB%AA%A9%EC%9D%80%EC%A7%91$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SJ$solr_toalCount%E2%80%A01$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SJ_ITKC_BT_0020A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번역문]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0A&solrQ=query%E2%80%A0%EB%AA%A9%EC%9D%80%EC%A7%91$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SJ$solr_toalCount%E2%80%A01$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SJ_ITKC_BT_0020A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번역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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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9041d400a41aab57ffe0bdc3ef48d419&keyword=%EB%AA%A9%EC%9D%80%20%EC%9D%B4%EC%83%89%EC%9D%98%20%EC%B2%9C%EC%9D%B8%EB%AC%B4%EA%B0%84%EC%82%AC%EC%83%81%EC%9D%84%20%EB%B0%94%ED%83%95%EC%9C%BC%EB%A1%9C%20%ED%95%9C%20%EC%83%81%EC%83%9D%EC%9D%98%20%EA%B5%AC%EC%A1%B0 이기동,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구조>, <<한국사상과 문화>> 5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9041d400a41aab57ffe0bdc3ef48d419&keyword=%EB%AA%A9%EC%9D%80%20%EC%9D%B4%EC%83%89%EC%9D%98%20%EC%B2%9C%EC%9D%B8%EB%AC%B4%EA%B0%84%EC%82%AC%EC%83%81%EC%9D%84%20%EB%B0%94%ED%83%95%EC%9C%BC%EB%A1%9C%20%ED%95%9C%20%EC%83%81%EC%83%9D%EC%9D%98%20%EA%B5%AC%EC%A1%B0 이기동,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구조>, <<한국사상과 문화>> 5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
378~381쪽 | 378~38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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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시대 관동지역 유람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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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후기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기행문 <동유기(東遊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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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463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음<br/> | ||
+ | ○ 1349년 가을에 금강산 및 동해안 지방을 유람하고 지은 글임<br/> | ||
+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14A_0060_010_0040&solrQ=query%E2%80%A0%EB%8F%99%EC%9C%A0%EA%B8%B0$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87$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GS_ITKC_BT_0014A_0060_010_0040 한국고전종합DB <동유기>]에 보이는 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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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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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포대도'''<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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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경포대도.jp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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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림 출처: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49854 <<강원도민일보>> 2020.12.1일자 "강원도에 처음 펼쳐진 500년 전 경포대 풍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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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시대 임춘(林椿, ?~1170)의 <동행기(東行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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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0680_010_0060&solrQ=query%E2%80%A0%EB%8F%99%ED%96%89%EA%B8%B0$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GS_ITKC_BT_1365A_0680_010_0060 한국고전종합DB <<동문선>>에 실린 임춘의 <동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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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서 산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강동(江東) 지방을 가장 좋은 곳이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믿지 아니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하늘이 물(物)을 창조할 때에 어디는 좋게 어디는 나쁘게 하려는 마음이 본시부터 없었을 터이니, 어찌하여 한 쪽 지역에만 후하게 했겠는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남쪽 지방으로 다니면서 경치가 빼어난 곳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실컷 보았다. 그리고 천하의 좋은 경치라는 것이 아마 이 이상 더 나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곳을 떠나서 동쪽으로 갔는데 명주(溟州: 강릉)ㆍ원주(原州)의 경계부터는 풍토가 특별히 달라지는데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았다. | ||
+ | ... | ||
+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에 순수하고 웅장한 기운이 홀로 어리어서 이곳이 된 줄을 알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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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관동유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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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상균, <조선시대 관동유람의 유행 배경>, <<인문과학연구>> 제3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167~19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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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시대 임춘이 관동을 유람할 때도,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유람할 때에도 유람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이에 대한 문장을 남겨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임<br/> | ||
+ | ○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는 유람이 문화가 크게 성행하게 됨. 단순히 구경하고 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산수에 깃들어 있는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정신수양을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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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한국철학사]] | [[분류: 한국철학사]] |
2022년 3월 23일 (수) 23:53 기준 최신판
목은 이색 소개[편집 | 원본 편집]
-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시기의 철학자 이색(1328~1396)
- 이기동, <<이색: 한국 성리학의 원천>>,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 이미지 출처: 위키 백과: 이색
○ 이색(李穡)의 호는 목은(牧隱)임. 목은이라는 호는 '소나 양을 치는 목자(牧者)로 숨어 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함. 출세보다는 은거하는 삶을 지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함
○ 외가인 영덕 괴시리에서 태어났음
☞ 사진 출처: <<경북매일>> 2020.9.8일자 "목은 이색의 고향 괴시리와 가정 이곡"
○ 2세가 되던 해에 부모의 고향인 한산(韓山)으로 돌아갔음
○ 숭정산에 있는 절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등을 읽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말인 당시 불교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임
○ 14살에 성균시에 합격했음
○ 목은 이색은 고려 말기 당시 원(元)나라였던 중국에서 공부하고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여(27세) 중국에서 관직생활을 했음
○ 하지만 29살이 되던 해인 1356년 봄에 고려로 귀국하게 됨
○ 그는 당시의 세계의 심장부였던 중국에서 다양한 세계의 인종과 문물을 접하면서 드넓은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있는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갖게 됨. 그는 문명의 아침이 동방의 하늘 아래에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음
○ 목은 이색이 65세가 되던 해 이성계의 주도 하에 역성(易姓)혁명[왕조교체: 고려->조선]이 일어나게 됨. 이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다 유배되었음. 65세 때 유배가 해제되었지만 그 해에 자신의 아들이 32세의 나이에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사주로 피살되게 됨
○ 유배가 해제된 후 사면되고서 한주로 돌아왔음. 68세 때에는 가을에 관동으로 유람을 하고 오대산에 머물기도 했음. 목은이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은 까닭에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높았는데도 죽임을 당했고, 귀양에서 돌아온 목은이 여주에 있는 농막에 은거하고 지냈는데 어느날 그의 문인이 찾아오자 그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일토록 울다가 내려온 일도 있었다고 함
☞질문: 이색은 왜 인생 만년에 관동 지역으로 유람을 했을까?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관동지역으로의 유람은 어떤 의미였을까?
○ 목은의 나이 69세 때 여주 여강으로 피서가기를 청하여 5월 3일 개경 벽란도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에 오른 뒤 갑자기 병이 나서 막내 아들 종선을 오게 했으나 병이 위중해졌음. 승려가 와서 불경을 외우려 했으나 이를 말리면서 "나는 죽고 사는 이치를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서는 이 말을 마치자마자 운명했음. 배 안에서 갑자기 운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은 아닌지 그의 죽음을 의심하기도 했음
○ 신흠(1566~1628)이 지은 <<연담>>에서는 "고려가 망할 때 사람들이 오직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만 굳게 절개를 지킬 줄 알고 목은의 사람됨은 알지 못했는데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음
○ 권근(1352~1409)이 <<목은선생행장>>에서 그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음
"목은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학문이 정미하고 깊어서 일을 처리함이 치밀하고도 밝았다. 마음가짐이 너그러워서 남을 용서하기를 좋아했으며 옳고 그른 것을 의논하는 데는 명백하고도 절실하나 반드시 충후(忠厚: 충직하고 온순하며 인정이 있는 모습)함에 힘썼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 데는 겸손하면서도 경위가 분명하며 온화한 모습이 넘쳐흐르면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모습이 있었다." "생활이 궁핍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말을 빠르게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사람이나 노복들에게 혹시 허물이 있어도 차근히 이치를 깨우치게 해줄 뿐 노여워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는 옥에 갇히는 것이 욕되는 것이 아니었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이 또한 영화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절조가 확고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목은의 일생을 더 살펴보고 싶다면
☞ <<목은집>>에 실린 목은의 <행장>
☞ <<목은집>>에 실린 목은의 <신도비>
- 목은이 평생 추구했을 '군자'에 관한 시(만년의 시)
군자
군자에게 참다운 낙이 있으니 오묘한 곳 참으로 말하기 어렵네 솔개가 날고 물고기 뛰어도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의 근원 쪼그만 이 한 몸은 좁쌀 같지만 하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
☞질문: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시를 남기게 될까?
☞ 참고: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해제
- 이색의 "천인무간: 하늘과 사람이 하나다" 사상
○ 이색은 애당초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고 하는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을 제시했음
○ 주자의 문집에서도 '천인무간'은 등장하지만 주자학에서는 어디까지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전개됨
○ 이색의 천인무간 사상은 하늘과 내가 하나로 붙어있는 만큼 남들도 하늘과 하나로 붙어있고 나와 남은 하나로 붙어있는 존재라는 논리로 전개됨. 이것이 목은의 만물일체사상임
이치로 보면 남과 나의 구별 없는 것 살아가며 남과 나를 구별을 하네, 밝은 태양이 바야흐로 빛나거니 누가 그 뜻을 이길 수 있으랴 원래부터 도에 들게 되는 것은 단적으로 성의(誠意: 뜻을 정성스럽고 진실되게 함)에 달린 것이니 노력하여 이 관문을 통과한다면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네
-이색 <목은문고>에 실린 시
☞ 이기동,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구조>, <<한국사상과 문화>> 5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378~381쪽
고려시대 관동지역 유람기[편집 | 원본 편집]
- 고려 후기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기행문 <동유기(東遊記)>
○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과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음
○ 1349년 가을에 금강산 및 동해안 지방을 유람하고 지은 글임
☞ 한국고전종합DB <동유기>에 보이는 강릉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 경포대도
☞ 그림 출처: <<강원도민일보>> 2020.12.1일자 "강원도에 처음 펼쳐진 500년 전 경포대 풍류
- 고려시대 임춘(林椿, ?~1170)의 <동행기(東行記)>
☞ 한국고전종합DB <<동문선>>에 실린 임춘의 <동행기>
세상에서 산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강동(江東) 지방을 가장 좋은 곳이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믿지 아니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하늘이 물(物)을 창조할 때에 어디는 좋게 어디는 나쁘게 하려는 마음이 본시부터 없었을 터이니, 어찌하여 한 쪽 지역에만 후하게 했겠는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남쪽 지방으로 다니면서 경치가 빼어난 곳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실컷 보았다. 그리고 천하의 좋은 경치라는 것이 아마 이 이상 더 나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곳을 떠나서 동쪽으로 갔는데 명주(溟州: 강릉)ㆍ원주(原州)의 경계부터는 풍토가 특별히 달라지는데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았다.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에 순수하고 웅장한 기운이 홀로 어리어서 이곳이 된 줄을 알게 되었다.
-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관동유람
- 이상균, <조선시대 관동유람의 유행 배경>, <<인문과학연구>> 제3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167~196쪽
○ 고려시대 임춘이 관동을 유람할 때도,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유람할 때에도 유람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이에 대한 문장을 남겨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임
○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는 유람이 문화가 크게 성행하게 됨. 단순히 구경하고 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산수에 깃들어 있는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정신수양을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