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장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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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를 살펴보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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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도교 사원은 깊고 깊은 산 속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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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b.cyberseodang.or.kr/front/search/contentsLink.do?mId=A&srchIdx=1&srchCondition=0&srchKeyword=%EC%9E%A5%EC%9E%90&srchCbId=&srchBnCode=&srchCodeType=&facetBnName=&facetCbName=&bnCode=jti_3n0301&titleId=C5 동양고전종합DB <장자> 번역문]
 
☞ [http://db.cyberseodang.or.kr/front/search/contentsLink.do?mId=A&srchIdx=1&srchCondition=0&srchKeyword=%EC%9E%A5%EC%9E%90&srchCbId=&srchBnCode=&srchCodeType=&facetBnName=&facetCbName=&bnCode=jti_3n0301&titleId=C5 동양고전종합DB <장자>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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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라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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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보이는 장자에 대한 언급(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주, 『사기』, 까치글방, 200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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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국(宋國)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임. 몽 지방 칠원(漆園)의 관리로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음(⟹ 맹자와 같은 전국시대 중기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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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기(B.C.403~B.C.221) 지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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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송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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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163.com/dy/article/GVUII8160552K60G.html 이미지 출처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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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의 학설을 근본으로 하여 10여 만 자나 되는 저서를 지었으며 대체로 우화를 많이 썼음. 공자의 무리들을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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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비유를 잘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으니 비록 당대의 대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음. 그의 언사는 거센 물결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자기 마음대로였으므로, 왕공대인(王公大人)들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지 못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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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나라 위왕(威王)이 장주(莊周)가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 않겠다”며 거절했음</br>
  
 
[[분류: 중국철학사]]
 
[[분류: 중국철학사]]

2022년 3월 24일 (목) 00:18 판

장자를 살펴보기 전에

  • 왜 도교 사원은 깊고 깊은 산 속에 있을까?

☞ 도교의 성지 우당산 금전


  •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의 무릉도원

Mu.png

출처 <매일경제> 2021.5.7일자

도연명의 <도화원기>

☞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우리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변치 않는 고전, <<장자>>

동양고전종합DB <장자> 번역문


장자라는 인물

-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보이는 장자에 대한 언급(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주, 『사기』, 까치글방, 2001)

○ 송국(宋國)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임. 몽 지방 칠원(漆園)의 관리로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음(⟹ 맹자와 같은 전국시대 중기임)

<전국시기(B.C.403~B.C.221) 지도>
송국.jpg

-이미지 출처 클릭

○ 노자의 학설을 근본으로 하여 10여 만 자나 되는 저서를 지었으며 대체로 우화를 많이 썼음. 공자의 무리들을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했음
○ 장자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비유를 잘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으니 비록 당대의 대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음. 그의 언사는 거센 물결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자기 마음대로였으므로, 왕공대인(王公大人)들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지 못했음
○ 초나라 위왕(威王)이 장주(莊周)가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 않겠다”며 거절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