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소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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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웠음에도 칭찬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때문"이라고 늘 제자들에게 얘기했음</br> | ○ 퇴계는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웠음에도 칭찬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때문"이라고 늘 제자들에게 얘기했음</br> | ||
− | ○ | + | ○ 14세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여 시를 익히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18세에는 우주를 관조하게 되고 19세에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터득했음</br> |
+ | ○ 20세 때 자고 먹는 것을 잊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주역공부에 몰입했음</br> | ||
+ | ○ 20세가 넘어서는 혼인하여 아들을 얻었음 | ||
+ | <20대 당시 퇴계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시> | ||
+ |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 ||
+ |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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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세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523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br> | ||
+ | ○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이 때 고을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888 이순(李純)] 목사를 만나 하룻밤 지내면서 황극 내편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97%AD%EC%B0%B8%EB%8F%99%EA%B3%84 참동계(중국의 갈홍의 신선전)]의 수련법을 배웠음. 훗날 퇴계가 유학자로서 수련법을 활용하고 정좌를 한 것도 이 때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음</br> | ||
[[분류: 한국철학사]] | [[분류: 한국철학사]] |
2022년 4월 4일 (월) 21:27 판
☞질문: 어디에서 본 분인가요?
☞ 천원 지폐에 실린 문화유산 이야기: <기업은행 블로그>
☞질문: 퇴계 이황은 어떻게 우리나라 지폐에 실린 만큼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일까?
퇴계 이황(음력 1501.11.25~1570)의 일생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학사, 2004
- 출생과 유년시절
○ 이름은 이황(李滉), 나중에 붙여진 호가 퇴계임
○ 음력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 이씨(眞寶 李氏) 가문에서 태어남
○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음
○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춘천 박씨] 밑에서 언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
○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홀어머니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말을 들을까 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했음
○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음
○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 퇴계태실(退溪胎室)
- 사진출처: 공공누리
☞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46-5
- 어머니 박씨가 퇴계를 잉태할 때 꿈에 공자가 대문에 와 있었다고 해서 태실(胎室: 태어난 방)이 있는 곳의 대문을 성임문(聖臨門: 성인이 임한 문)이라고 했음
○ 퇴계는 여섯 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할 수 있었다고 함.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했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했음
- 퇴계의 어린시절 공부
○ 여섯 살 때인 1506년 이웃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음. 퇴계가 훈장댁 문전에 이르면 먼저 배운 것을 다시 외워서 완전히 익힌 뒤에 들어가 다시 배웠음
○ 열두 살이 되던 해 숙부인 송재 이우(松齋 李堣, 1469∼1517)가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와서 몸조리를 했음. 이 때 사촌동생 "송수령"[송재의 아들, 퇴계보다 한 살 아래]과 퇴계 이황의 형 "이해"와 함께 논어를 배우게 되었음. 송재공에게서 배우고서 학문의 지혜가 열리게 됨
-사진 출처: 매일경제 2019.9.16일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매화에 물 주라"하고 앉은채로 운명한 퇴계]
○ 퇴계는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웠음에도 칭찬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때문"이라고 늘 제자들에게 얘기했음
○ 14세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여 시를 익히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18세에는 우주를 관조하게 되고 19세에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터득했음
○ 20세 때 자고 먹는 것을 잊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주역공부에 몰입했음
○ 20세가 넘어서는 혼인하여 아들을 얻었음
<20대 당시 퇴계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시>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 20세에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
○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이 때 고을의 이순(李純) 목사를 만나 하룻밤 지내면서 황극 내편과 참동계(중국의 갈홍의 신선전)의 수련법을 배웠음. 훗날 퇴계가 유학자로서 수련법을 활용하고 정좌를 한 것도 이 때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