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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 '''<<율곡집>> 금강산에서 노승과의 대화''' == * '''율곡이 출가하여 산에 들어간 까닭''' ☞ 최승순, <율곡의 불교관에 대한 연구>,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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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재, <율곡의 불교관>, <<율곡학연구>> 11권, (사)율곡연구원, 2005, 155~176쪽</br>  
 
☞ 이희재, <율곡의 불교관>, <<율곡학연구>> 11권, (사)율곡연구원, 2005, 155~176쪽</br>  
  
○ 김태완은 이 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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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완은 이 대화를 통해 불교의 핵심 교의가 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니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추구할 까닭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라고 보았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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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재는 이 대화를 통해 율곡이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보았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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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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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가 본성이 선함을 말했는데 말을 하면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우리 유가는 실리(實理)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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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ff0000;">'''마음이 곧 부처, 맹자의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이 갖는 의미는?'''</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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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평등하게' 부처가 될 수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 신분제가 엄연히 존재했던 당시 높은 계급이건 낮은 계급이건 누구나 부처와 성인군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급을 넘어서 '평등한 인간 존재'를 바라보았던 시각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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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의 본질인 성선(性善)은 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같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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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불교와 구별되는 유교의 특징을 율곡은 실리(實理)로 규정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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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는 진실한 이치로, 천지의 이치이며 천지의 조화가 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 그리고 이러한 천지의 조화와 서로 감통하는 인간의 마음은 실심(實心)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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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마음의 진실성을 강조한 율곡 철학의 특징이기도 함. 학문이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실리(實理)의 추구로 나타나야 하며 한각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변혁시키고 유익한 것을 창출해 내야 한다고 보았음.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을 속임 없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음 (곽신환, <율곡의 주자학적 진리의 담지(擔持)와 실심(實心)의 철학>, <<율곡학연구>> 17권, (사)율곡연구원, 2008, 5~25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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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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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또한 앞에 펼쳐진 경계[인식 대상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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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가 빙긋 웃었다. 이에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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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고 했는데 이는 색입니까, 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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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바로 진여의 본체입니다. 어찌 이런 시로 견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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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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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말로 표현하면 곧 경계인데 어찌 본체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유가의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고 불교의 진리는 문자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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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色): 형체를 가진 만물, 현상, 물질, 인연을 따라 생성 소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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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空): 모든 존재는 인연의 우연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뜻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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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시경>>의 한 구절. 천지 사이에 조화와 생육이 충만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 <<중용>>에서는 도가 널리 작용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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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ff0000;">'''솔개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왜 불교의 색과 공을 말하면서 언급되는가?'''</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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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현상[색(色)]들 속에 그 이면에 있는 원리와 본질[공(空)]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불교의 색과 공을 연관지어 언급한 것으로 보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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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색이고 무엇이 공이냐에 대한 논란에서 노승이 색도 공도 아닌 것이 진리의 모습이라고 한 데 대해 율곡은 그것도 진리의 모습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미 언설로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진리가 불립문자이듯 유교의 진리도 언설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음. 진리의 입장에서는 같은 것이지만 언설로 표현될 때는 대립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한 것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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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ff0000;">'''성철 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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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과 물에 관한 인식 3단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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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송나라 청원유신(靑源有信) 스님이 말하길, 30년 전 아직 참선 공부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나중에 여러 선지식을 뵙고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을 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깨우친 후에는 산은 단지 산이고 물은 단지 물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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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단계.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단계(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인식하는 단계).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색(色)의 단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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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이상 물이 아닌 단계. 기존의 가치체계에 따라 더이상 아름답고 추한 것, 기쁘고 슬픈 것, 낮과 밤, 하늘과 땅을 인식하지 않는 단계. 산과 물의 구별이 사라진 단계. 기존 가치 체계가 전도되는 단계. 산과 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결국 공성(空性)으로 되돌아갈 임시적, 가변적 존재로서의 산과 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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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있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여실히 바라봄과 동시에 그 기저에 놓인 진상과 허무의 빈 껍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색과 공의 이분법적인 인식을 넘어선 불이법(不二法)</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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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은 솔개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는 것이 공인지 색인지 묻는 노승의 질문에 대해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차원임을 언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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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공성(空性)'''</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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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섭, <<불교란 무엇인가>>, 정우서적, 1992, 124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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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그 궁극적 이상을 '자유(해탈)'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유'(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에 대한 정확한 통찰[공성(空性)]이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자기 삶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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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오늘의 성취가 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더불어 사는 삶의 요청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해야만 하지요. 내가 없어야[공(空), 무아관(無我觀)]만 남과 더불어[만(滿: 가득참), 보살행]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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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부정의 함의이자 실체의 부정인 '공'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4803 진여(眞如)]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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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여는 우리의 이지(理智: 이성과 지성)로는 파악할 수 없고, 공한 이치를 체득할 때만 번득 나타나는 것이지요. 공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존재론적인 지평을 넘어서는 인식론적 지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고 텅 비었다'는 '허무'의 의미가 아닙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이항을 넘어섰으므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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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중도(中道)'''</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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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섭, <<불교란 무엇인가>>, 정우서적, 1992, 120~122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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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르게 사는 삶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삶의 국면 국면마다 이러한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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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자기의 길만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최소한의 소유와 집착을 지닌 채 살아갈까. 삶은 우리 모두에게 구체이자 추상입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손을 떠나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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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中)은 '가장 올바른' 혹은 '치우침이 없는 것'을 형용합니다. '도'는 '길'이자 '진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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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는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 항상하는 것과 단절되는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는 이항 대립을 떠나 지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 불교의 중도는 정립과 반정립의 두 극단을 종합하여 두 극단을 다 살려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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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의 마지막 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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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선 물고기 뛰고 위에선 솔개가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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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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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히 한 번 웃고 내 몸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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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낀 해 숲속에 나 홀로 서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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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지음, 김태완 옮김, <<율곡집: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다>>, 한국고전번역원, 201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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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말은 궁극의 세계는 색을 초월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초월하려는 의식조차도 벗어난 세계라는 말임.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는 세계는 천리(天理)가 삼라만상에 흘러서 운행하는 유가의 절대 세계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색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색의 경지를 벗어남. 또한 불교에서는 마음의 공을 깨달으려고 추구하지만 공을 깨달으려는 노력 또한 집착이 됨. 그러므로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경지는 색이니 공이니 경계를 지으려는 차별적 의식 그 자체를 초탈하는 것을 말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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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이 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대자연의 본래 그러한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세계와 다름이 없으며 나아가 유교는 일상을 떠나지 않으므로 더 참된 이치라는 점을 보여주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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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한국철학사]]

2022년 4월 21일 (목) 10:19 기준 최신판

<<율곡집>> 금강산에서 노승과의 대화[편집 | 원본 편집]

  • 율곡이 출가하여 산에 들어간 까닭

☞ 최승순, <율곡의 불교관에 대한 연구>, <<율곡학보>> 1권, (사)율곡연구원, 1995, 29~56쪽

○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상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불경을 읽은 것이 원인이 되어 금강산에 입산하게 됨
○ 단순히 상심으로 인한 입산이라기보다는 금강산에서 마음을 닦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임


  • 금강산에서 율곡과 노승과의 대화를 통해 본 율곡의 불교관

☞ 이이 지음, 김태완 옮김, <<율곡집: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다>>, 한국고전번역원, 2013 ☞ 이희재, <율곡의 불교관>, <<율곡학연구>> 11권, (사)율곡연구원, 2005, 155~176쪽

○ 김태완은 이 대화를 통해 불교의 핵심 교의가 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니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추구할 까닭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라고 보았음
○ 이희재는 이 대화를 통해 율곡이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보았음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습니까?"
 "맹자가 본성이 선함을 말했는데 말을 하면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우리 유가는 실리(實理)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 맹자의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이 갖는 의미는?

=> '누구나' '평등하게' 부처가 될 수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 신분제가 엄연히 존재했던 당시 높은 계급이건 낮은 계급이건 누구나 부처와 성인군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급을 넘어서 '평등한 인간 존재'를 바라보았던 시각임


○ 유교의 본질인 성선(性善)은 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같음
- 다만 불교와 구별되는 유교의 특징을 율곡은 실리(實理)로 규정함
- 실리는 진실한 이치로, 천지의 이치이며 천지의 조화가 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 그리고 이러한 천지의 조화와 서로 감통하는 인간의 마음은 실심(實心)임
- 이는 마음의 진실성을 강조한 율곡 철학의 특징이기도 함. 학문이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실리(實理)의 추구로 나타나야 하며 한각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변혁시키고 유익한 것을 창출해 내야 한다고 보았음.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을 속임 없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음 (곽신환, <율곡의 주자학적 진리의 담지(擔持)와 실심(實心)의 철학>, <<율곡학연구>> 17권, (사)율곡연구원, 2008, 5~25쪽)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이 또한 앞에 펼쳐진 경계[인식 대상의 세계]입니다."
 승려가 빙긋 웃었다. 이에 내가 말했다.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고 했는데 이는 색입니까, 공입니까?"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바로 진여의 본체입니다. 어찌 이런 시로 견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말로 표현하면 곧 경계인데 어찌 본체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유가의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고 불교의 진리는 문자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 색(色): 형체를 가진 만물, 현상, 물질, 인연을 따라 생성 소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킴
○ 공(空): 모든 존재는 인연의 우연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뜻임
○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시경>>의 한 구절. 천지 사이에 조화와 생육이 충만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 <<중용>>에서는 도가 널리 작용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솔개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왜 불교의 색과 공을 말하면서 언급되는가?

=>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현상[색(色)]들 속에 그 이면에 있는 원리와 본질[공(空)]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불교의 색과 공을 연관지어 언급한 것으로 보임

○ 무엇이 색이고 무엇이 공이냐에 대한 논란에서 노승이 색도 공도 아닌 것이 진리의 모습이라고 한 데 대해 율곡은 그것도 진리의 모습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미 언설로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진리가 불립문자이듯 유교의 진리도 언설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음. 진리의 입장에서는 같은 것이지만 언설로 표현될 때는 대립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한 것임

성철 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

○ 산과 물에 관한 인식 3단계

☞ 중국 송나라 청원유신(靑源有信) 스님이 말하길, 30년 전 아직 참선 공부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나중에 여러 선지식을 뵙고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을 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깨우친 후에는 산은 단지 산이고 물은 단지 물이었다.

-1단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단계.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단계(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인식하는 단계).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색(色)의 단계
-2단계: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이상 물이 아닌 단계. 기존의 가치체계에 따라 더이상 아름답고 추한 것, 기쁘고 슬픈 것, 낮과 밤, 하늘과 땅을 인식하지 않는 단계. 산과 물의 구별이 사라진 단계. 기존 가치 체계가 전도되는 단계. 산과 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결국 공성(空性)으로 되돌아갈 임시적, 가변적 존재로서의 산과 물
-3단계: 있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여실히 바라봄과 동시에 그 기저에 놓인 진상과 허무의 빈 껍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색과 공의 이분법적인 인식을 넘어선 불이법(不二法)

=> 율곡은 솔개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는 것이 공인지 색인지 묻는 노승의 질문에 대해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차원임을 언급함


참고: 공성(空性)

- 고영섭, <<불교란 무엇인가>>, 정우서적, 1992, 124쪽

 불교는 그 궁극적 이상을 '자유(해탈)'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유'(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에 대한 정확한 통찰[공성(空性)]이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자기 삶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요.
 즉 오늘의 성취가 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더불어 사는 삶의 요청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해야만 하지요. 내가 없어야[공(空), 무아관(無我觀)]만 남과 더불어[만(滿: 가득참), 보살행] 살 수 있습니다.
 자기 부정의 함의이자 실체의 부정인 '공'은 진여(眞如)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진여는 우리의 이지(理智: 이성과 지성)로는 파악할 수 없고, 공한 이치를 체득할 때만 번득 나타나는 것이지요. 공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존재론적인 지평을 넘어서는 인식론적 지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고 텅 비었다'는 '허무'의 의미가 아닙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이항을 넘어섰으므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참고: 중도(中道)

- 고영섭, <<불교란 무엇인가>>, 정우서적, 1992, 120~122쪽

 우리는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르게 사는 삶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삶의 국면 국면마다 이러한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자기의 길만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최소한의 소유와 집착을 지닌 채 살아갈까. 삶은 우리 모두에게 구체이자 추상입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손을 떠나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중(中)은 '가장 올바른' 혹은 '치우침이 없는 것'을 형용합니다. '도'는 '길'이자 '진리'입니다. ...
 중도는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 항상하는 것과 단절되는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는 이항 대립을 떠나 지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 불교의 중도는 정립과 반정립의 두 극단을 종합하여 두 극단을 다 살려내지요.


○ 율곡의 마지막 시

 아래에선 물고기 뛰고 위에선 솔개가 나니
 이는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로다
 무심히 한 번 웃고 내 몸을 보니
 비낀 해 숲속에 나 홀로 서 있구나

☞ 이이 지음, 김태완 옮김, <<율곡집: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다>>, 한국고전번역원, 2013

=>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라는 말은 궁극의 세계는 색을 초월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초월하려는 의식조차도 벗어난 세계라는 말임.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는 세계는 천리(天理)가 삼라만상에 흘러서 운행하는 유가의 절대 세계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색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색의 경지를 벗어남. 또한 불교에서는 마음의 공을 깨달으려고 추구하지만 공을 깨달으려는 노력 또한 집착이 됨. 그러므로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경지는 색이니 공이니 경계를 지으려는 차별적 의식 그 자체를 초탈하는 것을 말함
=> 이이가 이 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대자연의 본래 그러한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세계와 다름이 없으며 나아가 유교는 일상을 떠나지 않으므로 더 참된 이치라는 점을 보여주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