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록 남시보에게 답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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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문집인 <<퇴계전서>>에는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가 9통 실려 있음</br> | ○ 퇴계의 문집인 <<퇴계전서>>에는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가 9통 실려 있음</br> | ||
○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도 교류했으며, 한국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음</br> | ○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도 교류했으며, 한국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음</br> | ||
− | ○ | + | ○ 퇴계는 30살 정도 차이나는 남시보와도 자유롭게 토론할 정도로 나이차를 가리지 않고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했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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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으니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나에게도 역시 이러한 한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지만 나의 경우는 나의 헛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퇴계집>> 권11 '이중구에게 답함' |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으니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나에게도 역시 이러한 한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지만 나의 경우는 나의 헛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퇴계집>> 권11 '이중구에게 답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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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왜 공부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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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뭘 공부하고 있나요? 왜 공부하나요? 평생 공부한다면 그 공부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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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0대의 퇴계는 여전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공부했다. 대체 뭘 공부한 걸까? 평생 해야 할 공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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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선영, 정성식, 황광욱,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 동녘, 1999</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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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의 앎의 대상: 인간'''</br> | ||
+ | - 인간은 어떤 원리로 태어나는가?</br> | ||
+ | - 인간과 만물은 무엇때문에 구별되는가?</br> | ||
+ | - 어떤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br> | ||
+ | - 인간다울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br> | ||
+ | => 이황이 이 같은 의문을 해석하고 해결하는 기반은 성리학이었음. 학문만이 아니라 나라의 건국 이념 자체가 성리학이었던 조선시대 당시 이황에게 성리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성리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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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제대로 배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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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1501~1570)의 최고의 스승, 주희(朱熹, 1130~12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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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히 스스로를 확신하지 말고 선생을 믿으라고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주자(주희)는 내가 스승으로 삼는 분이며 또한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으뜸 스승으로 사는 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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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리학은 고도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분야의 넓이가 끝이 없으며 역사의 길이도 만만치 않음</br> | ||
+ | ○ 또한 성리학에 관련된 인물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그 이론의 갈래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이나 주장을 할 수도 있음</br> | ||
+ | ○ 퇴계는 여러 성리학자들의 이론 가운데서도 주희를 스승으로 삼아 주희의 이론에 충실하려고 했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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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희 성리학을 통해 발견한 퇴계의 인간에 대한 이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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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리학은 '심성의리지학(心性義理之學)'의 줄임말임</br> | ||
+ | - 심(心): 마음</br> | ||
+ | - 성(性): 본성</br> | ||
+ | - 의(義): 옳음</br> | ||
+ | - 리(理): 이치</br> | ||
+ | => 인간의 마음,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 우주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음.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 만물의 일부이고 자연,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음</br> | ||
+ | => 사람의 마음과 본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느냐[심성론]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리]의 문제로 연결된다고 보았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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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연만물을 설명하는 틀: 이(理)와 기(氣)</br> | ||
+ | - 이(理): 원리, 도리, 형이상</br> | ||
+ | - 기(氣): 현실 세계의 물질적 재료, 도구, 형이하</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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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간을 설명하는 틀: 역시 이(理)와 기(氣)</br> | ||
+ | - 리(理): 하늘이 부여한 본성, 공정하고 바름. 공정하고 바른 마음이 이 리(理)에서 나오며 이를 진리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도심(道心)으로 불렀음 | ||
+ | - 기(氣): 자신의 육체에 기인한 본성, 사사로운 욕망이 끼기 때문에 악으로 흐를 수 있어서 인심(人心)이라고 불렀음</br> | ||
+ | ☞ 퇴계가 평생 하고자 했던 공부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잘 닦아갈까 하는 마음 공부라고 할 수 있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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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근데 왜 욕망이 문제일까?'''</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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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간이 지니는 욕망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그 욕망이 한 개인이나 작은 집단을 위한 것일 때는 대다수의 다른 사람을 짓밟고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 특히 퇴계가 살던 시대는 사회정치적으로 이러한 소수 집단의 욕망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던 시대였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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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의 현실 인식이 담긴 이기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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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교빈, <<한국철학에세이>>, 동녘, 2009</br> | ||
+ | ○ 퇴계가 살던 조선 중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음.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가 모두 이 무렵에 일어났음</br> | ||
+ | ○ 사화는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의 대립이었음. 사림파는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으며 훈구파는 임금 주변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기성 관료들이었음</br> | ||
+ | ○ 사림파의 맥은 정몽주(고려말, 조선초), 길재(고려말, 조선초),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의 인물이었음. 예컨대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1454~1504)은 무오사화 때 귀양 갔다가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으며, 김굉필의 제자였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606 조광조(1482~1520)] 역시 기묘사화 때 유배되어 죽임을 당했음</br> | ||
+ | ○ 을사사화 때(1545) 퇴계 자신도 정치적 모략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형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다가 매 맞은 후유증으로 도중에 죽고 말았음. 퇴계의 철학 속에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사림파들의 실천적 삶을 설명하는 논리가 담겨 있는 것임</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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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근데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원래 욕망에 가득찬 존재이지 않을까?'''</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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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가 지키고자 했던 도덕 원리로서의 이(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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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만일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신념, 원칙, 철학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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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의 철학에서 이(理)는 모든 존재의 존재 원리인 동시에 도덕 원리임. 그리고 이 도덕 원리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임</br> | ||
+ | ○ 이(理)가 도덕원리인 까닭은 절대 불변의 존재로서 선의 원리이기 때문임. 그러나 기(氣)는 이와 달리 변화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br> | ||
+ | => 퇴계는 이(理)를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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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그런데 이치라는 거 보이지도 않고 알기도 어렵고 그런 거 아닌가?'''</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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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퇴계는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며 우리 마음만 맑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해갈 수 있다면 이 도덕원리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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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왜 퇴계는 이렇게까지 이(理)를 중시한 것일까?'''</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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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는 어떻게 하면 한 인간이, 한 사회가, 한 임금이 개인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로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음.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이 삶의 추동력이 되는 사람과 도덕적 인간이 되려는 것이 삶의 근원적 힘인 사람을 가치적으로 엄격히 구분하려고 했음. 마치 썩은 정치 세력이 순수한 사림들과 섞일 수 없다는 보는 것처럼, 그 순수함이 물들지 않도록 잘 지켜가려는 것처럼</br> | ||
+ | => 그리고 이 이(理)는 그저 관념적이고 이론적인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야 하는 것임. 그리고 퇴계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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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연평, "이 도리는 일상생활에서 익혀야 한다."</br> | ||
+ | - 중국 송나라의 이동(李侗, 1093~1163)</br> | ||
+ | - 학문의 도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고요하게 한 가운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동되어 이에 휘둘리기 전에 감지되는 순수한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 그대로를 체득하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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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무리 어렵고, 고원한 이야기를 하는 철학자로 보이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자신이 말한 대로, 자신의 이론대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실천적인 철학은 없지 않을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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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한국철학사]] |
2022년 4월 14일 (목) 00:32 기준 최신판
-이황 지음, 최중석 옮김, <<이퇴계의 자성록>>, 국학자료원, 2003, 51쪽
- 퇴계 이황(1501~1570)과 남시보(1528~1594)와의 서신
○ 남시보는 그의 자(字)이고 이름은 남언경(南彦經)임
○ 퇴계의 문집인 <<퇴계전서>>에는 남언경에게 보낸 편지가 9통 실려 있음
○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도 교류했으며, 한국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음
○ 퇴계는 30살 정도 차이나는 남시보와도 자유롭게 토론할 정도로 나이차를 가리지 않고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했음
☞질문: 어떻게 이렇게 열린 토론, 열린 공부가 가능했을까?
- 퇴계 이황의 진정한 공부, 나를 수양하기 위한 공부인 위기지학(爲己之學)
○ 유학의 두 가지 공부
-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 위인지학(爲人之學)
- 나를 위한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
○ 퇴계의 위기지학
"위기지학이란 도리를 우리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삼고, 덕행을 우리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삼아서 가까운 곳에서 공부에 착수해서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행하는 것이다. 위인지학이란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행하는 것은 힘쓰지 않고 헛된 것을 꾸미고 외물에 따라가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퇴계선생언행록>> 권1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으니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나에게도 역시 이러한 한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지만 나의 경우는 나의 헛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퇴계집>> 권11 '이중구에게 답함'
-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왜 공부하는가?
☞ 질문: 뭘 공부하고 있나요? 왜 공부하나요? 평생 공부한다면 그 공부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 50대의 퇴계는 여전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공부했다. 대체 뭘 공부한 걸까? 평생 해야 할 공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 임선영, 정성식, 황광욱,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 동녘, 1999
○ 퇴계의 앎의 대상: 인간
- 인간은 어떤 원리로 태어나는가?
- 인간과 만물은 무엇때문에 구별되는가?
- 어떤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
- 인간다울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 이황이 이 같은 의문을 해석하고 해결하는 기반은 성리학이었음. 학문만이 아니라 나라의 건국 이념 자체가 성리학이었던 조선시대 당시 이황에게 성리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성리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음
☞ 질문: 제대로 배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 퇴계(1501~1570)의 최고의 스승, 주희(朱熹, 1130~1200)
"감히 스스로를 확신하지 말고 선생을 믿으라고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주자(주희)는 내가 스승으로 삼는 분이며 또한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으뜸 스승으로 사는 분이다."
○ 성리학은 고도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분야의 넓이가 끝이 없으며 역사의 길이도 만만치 않음
○ 또한 성리학에 관련된 인물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그 이론의 갈래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이나 주장을 할 수도 있음
○ 퇴계는 여러 성리학자들의 이론 가운데서도 주희를 스승으로 삼아 주희의 이론에 충실하려고 했음
- 주희 성리학을 통해 발견한 퇴계의 인간에 대한 이해
○ 성리학은 '심성의리지학(心性義理之學)'의 줄임말임
- 심(心): 마음
- 성(性): 본성
- 의(義): 옳음
- 리(理): 이치
=> 인간의 마음,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 우주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음.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 만물의 일부이고 자연,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음
=> 사람의 마음과 본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느냐[심성론]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리]의 문제로 연결된다고 보았음
○ 자연만물을 설명하는 틀: 이(理)와 기(氣)
- 이(理): 원리, 도리, 형이상
- 기(氣): 현실 세계의 물질적 재료, 도구, 형이하
○ 인간을 설명하는 틀: 역시 이(理)와 기(氣)
- 리(理): 하늘이 부여한 본성, 공정하고 바름. 공정하고 바른 마음이 이 리(理)에서 나오며 이를 진리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도심(道心)으로 불렀음
- 기(氣): 자신의 육체에 기인한 본성, 사사로운 욕망이 끼기 때문에 악으로 흐를 수 있어서 인심(人心)이라고 불렀음
☞ 퇴계가 평생 하고자 했던 공부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잘 닦아갈까 하는 마음 공부라고 할 수 있음
☞ 질문: 근데 왜 욕망이 문제일까?
☞ 인간이 지니는 욕망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그 욕망이 한 개인이나 작은 집단을 위한 것일 때는 대다수의 다른 사람을 짓밟고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 특히 퇴계가 살던 시대는 사회정치적으로 이러한 소수 집단의 욕망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던 시대였음
- 퇴계의 현실 인식이 담긴 이기론
☞ 김교빈, <<한국철학에세이>>, 동녘, 2009
○ 퇴계가 살던 조선 중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음.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가 모두 이 무렵에 일어났음
○ 사화는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의 대립이었음. 사림파는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으며 훈구파는 임금 주변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기성 관료들이었음
○ 사림파의 맥은 정몽주(고려말, 조선초), 길재(고려말, 조선초),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의 인물이었음. 예컨대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1454~1504)은 무오사화 때 귀양 갔다가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으며,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1482~1520) 역시 기묘사화 때 유배되어 죽임을 당했음
○ 을사사화 때(1545) 퇴계 자신도 정치적 모략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형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다가 매 맞은 후유증으로 도중에 죽고 말았음. 퇴계의 철학 속에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사림파들의 실천적 삶을 설명하는 논리가 담겨 있는 것임
☞ 질문: 근데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원래 욕망에 가득찬 존재이지 않을까?
- 퇴계가 지키고자 했던 도덕 원리로서의 이(理)
☞ 질문: 만일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신념, 원칙, 철학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 퇴계의 철학에서 이(理)는 모든 존재의 존재 원리인 동시에 도덕 원리임. 그리고 이 도덕 원리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임
○ 이(理)가 도덕원리인 까닭은 절대 불변의 존재로서 선의 원리이기 때문임. 그러나 기(氣)는 이와 달리 변화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
=> 퇴계는 이(理)를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음
☞ 질문: 그런데 이치라는 거 보이지도 않고 알기도 어렵고 그런 거 아닌가?
=>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퇴계는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며 우리 마음만 맑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해갈 수 있다면 이 도덕원리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음
☞ 질문: 왜 퇴계는 이렇게까지 이(理)를 중시한 것일까?
=> 퇴계는 어떻게 하면 한 인간이, 한 사회가, 한 임금이 개인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로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음.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이 삶의 추동력이 되는 사람과 도덕적 인간이 되려는 것이 삶의 근원적 힘인 사람을 가치적으로 엄격히 구분하려고 했음. 마치 썩은 정치 세력이 순수한 사림들과 섞일 수 없다는 보는 것처럼, 그 순수함이 물들지 않도록 잘 지켜가려는 것처럼
=> 그리고 이 이(理)는 그저 관념적이고 이론적인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야 하는 것임. 그리고 퇴계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음
○ 이연평, "이 도리는 일상생활에서 익혀야 한다."
- 중국 송나라의 이동(李侗, 1093~1163)
- 학문의 도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고요하게 한 가운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동되어 이에 휘둘리기 전에 감지되는 순수한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 그대로를 체득하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음
☞ 아무리 어렵고, 고원한 이야기를 하는 철학자로 보이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자신이 말한 대로, 자신의 이론대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실천적인 철학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