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서 안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49번째 줄: | 149번째 줄: | ||
=> 안빈낙도[安貧樂道: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궁극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일을 즐기는 삶]의 즐거움도 단번에 얻어진 것이 아님. 세상일이 그렇듯 괴로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시간을 누구나 겪기 마련임. 이 한계를 넘어서야 얻어지는 것들이 있음</br> | => 안빈낙도[安貧樂道: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궁극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일을 즐기는 삶]의 즐거움도 단번에 얻어진 것이 아님. 세상일이 그렇듯 괴로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시간을 누구나 겪기 마련임. 이 한계를 넘어서야 얻어지는 것들이 있음</br> | ||
− | => 이 괴로움을 피하려고 쉬운길, 이상한 길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음</br> | + | => 이 괴로움을 피하려고 쉬운길, 이상한 길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음.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이 삶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음</br> |
[[분류: 중국철학사]] | [[분류: 중국철학사]] |
2022년 5월 16일 (월) 11:15 판
안연의 즐거움에 대한 탐구
☞ 여러분은 왜 공부하나요? 왜 사나요? 여러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주돈이를 비롯한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이 탐구했던 궁극적인 삶을 위한 과제: 안연의 즐거움
- 주돈이의 질문
☞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2011, 81쪽
“부귀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연은 부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가난한데도 즐거워했으니, 도대체 어떤 마음을 지녔기 때문인가? … 중대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소한 것을 잊었을 따름이다. 그 중대한 것을 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하면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주돈이, <<통서>>
안연이라는 인물
○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 제자
○ 이름은 안회(顔回)이고 자(字)가 안연(顔淵)임. 공자 제자 가운데 가장 자질과 학덕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공자보다 먼저 죽었음. 빈곤한 형편 속에서도 상황에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부도덕한 일을 한 적이 없어 공자 다음 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음
○ <<논어>>에 보이는 안연
공자가 자신이 뜻한 바를 묻자 안연이 “자신의 잘하는 것을 자랑함이 없으며, 공로를 과시함이 없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논어』 「공야장」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다.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나와 너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 -『논어』 「공야장」
공자가 말했다. “안연은 도에 가까웠고 자주 끼니를 굶었다.”-『논어』 「선진」
공자가 말했다. “어질구나, 안연이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연은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으니, 어질구나 안연이여!” -『논어』 「옹야」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했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논어』 「선진」
안연이 죽자, 공자가 곡하기를 지나치게 애통하게 했다. 이에 그와 함께 하고 있던 사람이 지나치게 애통해 한다고 말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안연]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고서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는가?” -『논어』 「선진」
☞ 이러한 안연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나요?
<<통서>> <안자>
- 안연의 즐거움에 대한 탐구: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의 추구
○ 여기에서 '안연(顔淵)'을 '안자(顔子)'라고 한 것은 공자, 장자, 노자처럼 안연을 높여서 안자라고 한 것임
○ 안연이 자신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항상 즐거울 수[행복할 수] 있었던 까닭(주돈이의 생각)
하늘과 땅 사이에는 지극히 귀하고 지극히 부유하며 사랑할 만하고 바랄 만한 것이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 큰 것을 보아서 그 작은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은 무엇일까? 내 삶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은 무엇인가?
- 참고: 맹자가 말한 우리 몸의 2가지 종류
맹자의 제자 공도자가 맹자에게 물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큰 몸[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작은 몸[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 큰 몸: 마음
=> 작은 몸: 귀, 눈의 감각기관
=> 맹자는 우리의 작은 몸인 감각기관은 생각하지 않아서 외부 사물에 의해 이끌리고 가려질 수 있다고 보았음. 하지만 우리의 큰 몸인 마음이 확립되면 감각기관, 외부사물에 의해 빼앗기지 않는다고 했음
- 주돈이가 말한 큰 것과 작은 것
○ 작은 것: 입으로 맛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등 몸과 감각, 외부 사물에 이끌리는 사사로운 욕망
○ 큰 것: 사사로운 욕망이 제거된 뒤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가 유행(流行)하는 마음
☞ 이런 하늘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 참 맑다,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만일 우리 마음도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끼지 않은 하늘과 같은 맑고 깨끗한 상태라면 어떤 마음가짐일까요?
=> 주돈이는 우리가 세속적으로 부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부귀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와 하나로 통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부귀라고 보았음
=>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에 대한 관점의 전환
○ 천리(天理): 하늘 천(天)+이치 리(理)
☞ 하늘[천(天)]이라고 했을 때와 하늘의 이치[천리(天理)]라고 했을 때의 차이는?
=> 하늘이라고 하면 인간과는 별개로 존재해 있는 대상세계로서의 하늘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치로서의 하늘을 이야기할 때는 자연 규율, 원리, 법칙에 따른 하늘을 떠올리게 됨. 이런 자연의 원리, 법칙은 인간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것임. 즉 이 보편적인 이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자연만물]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서 이해될 수도 있음
○ 주돈이의 직속제자 정자(程子, 정이천, 정명도 형제)의 추가 해석, 이에 대한 주희의 풀이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서로 막히는 곳이 없으면 매우 쾌활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안자가 즐거워한 경지이다. ... 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고 막고 방해하는 것이 없어서 가슴속이 편안할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 유가철학이 꿈꾸는 천인합일의 경지
대인(大人)이라는 사람은 천지와 그 덕을 함께하고 해, 달과 그 밝음을 함께 하며 사계절과 그 차례를 함께 하며 귀신과 그 길흉을 함께한다. 하늘보다 먼저해도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해도 하늘의 때의 받드니 하늘도 그 사람을 어기지 않으니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이겠는가, 귀신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주역>> 건괘 <문언전>
주돈이가 탐구했던 안연의 즐거움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주희의 해석과 함께)
☞ 공부하는 게 즐겁나요?
○ 공자가 제시한 배움을 좋아함, 호학(好學)
(이치억, <공자사상에서 호학(好學)의 의미와 중요성>, <<유학연구>> 제46집, 충남대 유학연구소, 2019, 279~298쪽)
공자의 열다섯: "열다섯에 나는 배움에 뜻을 두었다[지우학(志于學)]." -<<논어>> <위정>
☞ 공자가 뜻을 두었던 공부[학(學)]는?
-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해석한 '지우학(배움에 뜻을 두었다)'의 의미
공자는 15세 때 성인(聖人: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됨에 뜻을 두었다. 지금 배우는 이들도 누가 배우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마는 실제로 들여다보면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말할 수 없다. 배움에 뜻을 둔다면 스스로 안주할 수가 없다. ... 이는 마치 배고프고 목마를 때 먹고 마시는 것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느긋하다면 이는 뜻이 확고히 서지 않은 것이다. - 주희 <<논어집주대전>> <위정>
=> 공자에게 배움이란 자기 완성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길임. 마치 불교에서 모든 인간이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유교도 인간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함. 그리고 여기에서의 공부는 독서, 학습, 경험, 실천을 포함하면서 변화, 성장, 도약의 가능성과 믿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임
- 공자와 동일하게 배움을 좋아한다고 평가되었던 공자의 유일한 제자, 안연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 중에서 누가 배움을 가장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자라는 제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없으니 아직 배움을 좋아한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논어>> <옹야>
=> 공자에게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은 타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 중 하나였음
☞ 배움, 공부를 좋아하는 건 극소수의 사람만 가능한 거 아닌가?
☞ 근데 호학(好學)하는 사람들도 배움에 대해서 마냥 즐거워만 했을까?
공자가 말했다."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생이지지(生而知之)]이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학이지지(學而知之)]이 그 다음이고, 고생고생한 다음에 배우는 사람[곤이학지(困而學之)]가 그 다음이니, 인간 가운데에서 최하가 되는 것이다.
-<<논어>> <계씨>
☞ 나는 '곤이학지'에 속하는데 좀 기분 나쁜데?
때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때로는 배워서 알고, 때로는 고생고생해서 알지만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똑같다. 때로는 편안하게 실천하고, 때로는 이롭게 여겨서 실천하고, 때론 억지로 애써서 실천하지만 그 성공하는 데 있어서는 똑같다.
-<<중용>>
☞ 그렇다면 공자는?
공자가 말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안 사람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해서 재빨리 이를 탐구한 사람에 불과하다.
-<<논어>> <술이>
☞ 공부, 배움을 애초부터 좋아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고, 이를 향한 배움을 지속해 나간다는 건 쉽지 않다.
안회가 즐거워한 경지를 찾고자 한다면 스스로 찾아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것을 찾아가는 도중에 매우 괴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아주 좋은 조짐이다. 즐거운 경지를 찾다 보면 그 생각이 좋지 않은 곳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즐거운 생각이 다가오는 조짐이다. 그러니 이 때에 더욱 열심히 공부한다면 저절로 즐겁게 되는 이치가 있게 된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것도 일상, 평상 속에서 이해해야지 특이한 것을 찾아다니며 공부해서는 안된다.
=> 안빈낙도[安貧樂道: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궁극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일을 즐기는 삶]의 즐거움도 단번에 얻어진 것이 아님. 세상일이 그렇듯 괴로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시간을 누구나 겪기 마련임. 이 한계를 넘어서야 얻어지는 것들이 있음
=> 이 괴로움을 피하려고 쉬운길, 이상한 길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음.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이 삶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