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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뒷날 이 사건을 회고하여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 정약용은 뒷날 이 사건을 회고하여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 ||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br> |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br> | ||
− |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74918 <<오마이뉴스>> 곡산부사, 억울한 백성 살리고 '마과회통' 지어 | + |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74918 <<오마이뉴스>> 곡산부사, 억울한 백성 살리고 '마과회통' 지어] |
☞ <span style="color:#ff0000;">'''다산이 이렇게 공적으로 실무를 집행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철학 덕분이 아니었을까?'''</span> | ☞ <span style="color:#ff0000;">'''다산이 이렇게 공적으로 실무를 집행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철학 덕분이 아니었을까?'''</span> |
2022년 5월 24일 (화) 13:04 판
인간의 죄의 문제
-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는 잣대로 쓰이기도 하는 죄에 관한 감정
☞ 안승우, <<<주역>>의 죄와 벌(1): 개인적 죄와 벌에 관한 윤리적 접근>, <<범한철학>> 제89집, 범한철학회, 2018
○ 죄의식의 감정의 경우, 문화적 진화의 관점에서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했음
○ 프로이트가 말한 죄의식: 인간의 내면화된 도덕적 양심으로부터 일어나는 고도로 발달된 도덕 감정
○ 이는 종종 수치심과 비교되기도 했음
○ 수치심: 부도덕한 행위 혹은 죄를 지은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내면적으로 깨우쳐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외부의 판단에 의해. 혹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생겨나는 감정
○ 죄의식: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행위자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후회하고 이를 반성해서 일어나는 감정
=> 수치심과 죄의식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가르는 요소가 되기도 했음
=> 서구문명: 어린 아이의 사회화 과정에서 죄의식에 민감하게 하는 것이 주된 과제로 여겨짐
=>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 수치의 감정을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음
=> 서양과 동양을 ‘죄책감 사회’ 대 ‘수치심 사회’로 대비시킴(Wolfram Eberhard, Guilt and Sin in Traditional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p.2)
☞ 이렇게만 볼 수 있을까? 동양에도 죄의식이 있지 않을까? 동양의 죄의 특징은 뭘까?
- 동양의 죄
☞ 줄리아 칭 지음, 임찬순·최효선 옮김, <<유교와 기독교>>, 서광사, 1993, 104-107쪽
○ 한자의 ‘죄(罪)’는 죄(sin)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범죄(crime)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
○ 죄라고 하면 범죄의 의미와 함께,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측면에서의 잘못이라는 의미의 죄의 의미도 지니고 있음
○ 이러한 동양 사회에서의 ‘죄’라는 언어 자체가 지닌 다의성 때문에 이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짓기가 애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는 죄에 관한 인식의 문제에 있어 범죄를 비롯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기도 함
○ 줄리아 칭은 동양 사회에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생기는 외면적・피상적 수치심으로 느끼는 도덕성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도덕적 악에 대한 의식이 내면화되어 죄의식을 갖게 되는 도덕성은 없다고 보는 일부 견해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음
○ 그러면서 칭은 동서양의 죄에 대한 의식의 차이를 지적했음. 특히 서양의 기독교에서의 죄의 특징으로 반역을 들면서 이는 인간 자신의 양심의 타락이면서 신의 명령에 대한 반역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았음
○ 반면 유학에서는 <<논어>> <요왈(堯曰)>의 “(탕왕(湯王)이 말하길) 제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백성의 탓은 아닙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임금인 제 탓입니다.”라고 한 것을 들어 죄에 관한 개념이 존재했음을 밝히면서도, 이를 신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거나 현실 밖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했음
○ 오히려 유학에서의 죄의 문제는 신이라는 외부적·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본 것임
- 동양의 죄와 서양의 죄의 비교
☞ 배요한, <유교적 인간 이해에 대한 신학적 고찰>, <<선교와 신학>> 제25집,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10, 219-224쪽
○ 배요한은 기독교에서의 죄는 신의 영역으로 해소 불가능하지만 유학에서의 죄는 인간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해소 가능하다는 점을 밝혔음
○ 인간이 실존적 한계성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유학에서는 인욕으로 보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죄로, 여기에서 죄란 윤리적인 내용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근본적인 면이 더 강조된 것이라고 지적했음
○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한계 극복의 측면에서 기독교에서는 한시적으로는 죄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죄가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반면, 유학을 비롯한 동양 종교에서는 주체적 결단에 의해 근원적이고 내면적으로 죄가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음
☞ 형벌의 목적도 죄에 대한 반성, 교화였을까?
☞ 동양 고대에도 형벌이 있었을까??
- 중국 고대의 형벌의 탄생과 형태
○ 곽말약은 형벌의 용도를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보았는데, 첫째는 제사에 쓸 희생(人牲)이고, 둘째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음
○ 특히 전쟁이 매우 빈번해지면서 필연적인 결과로 생산이 피폐해지고 포로가 증가했으며, 증가한 포로들은 최초에는 대체로 희생으로 쓰였으나 인간의 생산적 가치의 발견과 함께 피폐해진 생산에 쓰이면서 노예제도가 나타났다고 보았음
(郭沫若著作編輯出版委員會 편, <<郭沫若全集: 歷史編 第一卷>>, 人民出版社, 1982, 54쪽)
○ 고대 형벌의 기능에 대해 이성원은 형벌의 1차적 기능이 응징과 보복에 있다고 보았고, 특히 육형, 추방형 등의 형벌은 외형적·공간적으로 이형화(異形化)를 강제하거나 이를 지향하는 비인화(非人化)를 통해 공동체로부터 배제하고 소외한 것이라고 보았음
(이성원, <古代中國의 刑罰觀念과 肉刑>, <<동양사학연구>>, 제67집(동양사학회, 1999), 8-19쪽)
=> 고대의 육형(肉刑): 코를 베어내는 의형(劓刑),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墨刑), 발 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등 신체를 손상하는 형벌임
☞ 고대 형벌은 잔인하기만 했을까?
- 교화의 기능으로서의 형벌
○ 경범죄에 대한 형벌
(경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돌(嘉石)에 선하게 되도록 놓아두었으니, 무릇 만민 가운데 죄와 과실이 있는데 아직 법에 걸릴 정도가 아니지만 마을에 해를 입히는 자는 질곡(桎梏: 손과 발에 차는 수갑)을 씌어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돌에 앉게 하고 사공(司空: 관직 이름) 밑에서 부역하게 한다. 중죄(重罪)의 경우 열흘 하고도 3일간 앉아 있게 하고 1년간 부역 살게 한다. 그 다음은 9일간 앉아 있게 하고 9개월간 부역 살게 한다. 그 다음은 7일간 앉아 있게 하고 7개월간 부역 살게 한다. 그 다음은 5일간 앉아 있게 하고 5개월간 부역 살게 한다. 죄가 가벼운 죄의 경우 3일간 앉아 있게 하고 3개월간 부역 살게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보증을 서게 하고서야 용서하고 석방해 주었다. -<<주례(周禮)>> <대사구>
☞ 아름다운 돌 위에 앉아있게 한 이유?
=> 가공언의 주석: “(죄 지은) 백성을 놓아두어서 그 무늬와 결을 생각하게 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 스스로 가다듬게 하려고 했다.”
○ 한나라 때를 기록한 <<한서>>: “죄를 후회하고 선(善)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며 이로 인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
○ 한나라 때 <<대대례기>>: “백성에게 작은 죄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그 善한 점으로 그 과실을 용서해주고 만일 죽을 죄라도 살게 해준다면 선해질 것이다.”
=> 사면은 죄에 대한 자기 반성을 의도하는 것이면서 용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다 선한 길로 이끌고자 한 것이었음
☞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이 살던 시대의 형벌은?
-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 당시 법집행의 양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
○ 다산이 1803년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포를 내지 않는다고 호통치며 소를 빼앗아간 일로 남성이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린 일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
○ 조선시대에는 병역의무자인 양인 남성이 현역 복무에 나가지 않는 대신 세금을 부과했음. 원칙적으로 베[포(布)]로 냈기 때문에 군포라고 불렸음. 면포 대신 그에 합당한 쌀, 조, 콩 등의 곡식을 내기도 했음
○ 다산이 살던 시기에는 죽은 이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아이를 낳아도 바로 세금을 내야 해서 백성들의 생활이 극심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
<애절양/ 정약용>
갈밭 마을 젊은 여인 오래도록 우는 소리 서러워라. 현문(관아의 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길 싸움터 나간 남편이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예로부터 스스로 남근을 잘랐던 일 들어 보지 못했구나
시아버지 죽어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다 실렸으니 가서 억울함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이정(里正: 지방행정조직의 최말단 책임자)은 호통하며 마구간 소 끌고 갔네
칼을 갈아 방에 드니 자리에는 피가 가득 스스로 탄식하길 자식을 낳은 것이 화로구나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蠶室淫刑: 거세 당하는 형벌) 당했던고
...
재력과 세력 있는 사람들은 일년 내내 풍악 울리며 즐기면서 쌀 한 톨 한 치 베도 바치는 일 없네 다같은 백성이데 이다지 공평하지 못한가 객 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시경의 편명. 공평무사한 군자를 읊은 시)을 외워보네
☞ 번역 참조: 우리역사넷, 윤경수, <다산시 애절양에 대하여>, <<외대논총>> 제7집, 1989
☞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의 모습은?
○ 다산이 주목했던 당시 형벌 집행의 현실
- 조선시대 수령은 관료기구의 말단이 지방군현에 배치되어 관할 지역의 다양한 행정, 군정, 사법, 치안 등의 사무를 관장했음. 수령은 외관직이지만 중앙에서 지방 군현에 파견된 거의 유일한 관리로서의 책임이 막중했음
- 특히 수령은 재판권, 형벌권 등을 가지고 있었음
- 하지만 수령들은 당시 법전을 읽지 않아서 형벌의 이름에도 어두웠고 사안별로 적용해야 할 법조문을 정확히 찾기 힘들었다고 보았음. 그러다보니 재판 판결이 서리와 기생의 손에 놀아난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음
- 예컨대 재물 소송에서 시비를 명확히 가리지 못하여 양측이 절반씩 잃고 물러가라는 식으로 적당히 판결하는 수령들도 있었음
○ 다산의 법과 관련된 실무 경험
- 다산의 아버지가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가까이에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음
- 다산 자신도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재직하면서 직접 사건을 조사한 경험이 있고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비리를 밝히고 행정 실태를 조사한 일도 있었음
<다산이 곡산 부사로 있었을 때의 일화>
다산 정약용이 36세였던 1707년 6월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임명되었다. 한 달 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반대파의 칼날을 피해 지방관으로 보낸 것이다. 잠시 외직으로 보내어서 공격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다. 짧은 기간의 암행어사와 금정찰방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지방관,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 된 것이다. '목민관'은 임금이나 고을의 원이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뒷날 치민(治民)에 관한 도리를 논하고, 벼슬아치들의 통폐를 제거하고, 관리의 바른 길을 알리고자 그릇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쓰게 되는 계기였다. ...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곳에서는 민요에 버금가는 소요사건이 있었다.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일부에서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과연, 그가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주동자가 백성의 고통을 12조목으로 적어 호소한다며 가마 앞에 엎드렸다. 자수한 것이다. 수종하던 서리들이 포박하러들자 이를 말리면서 관청으로 데려갔다. 사연인 즉 전임 곡산부사 때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계삼이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몰려가 항의한 일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시정책을 찾기보다 주동자의 체포에 나섰고, 이계심은 도망쳤다. 그리고 정약용이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호소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정약용은 그를 방면했다.
"한 고을에는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으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이암(倷菴)선생 연보」)
파격적이었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죄가 있건 없건 필요에 따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매질을 하여 '자복'을 받아내기 일쑤였다. 특히 백성들의 집단행동은 반역죄로 치부하여 가중처벌하였다.
정약용은 뒷날 이 사건을 회고하여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곡산부사, 억울한 백성 살리고 '마과회통' 지어
☞ 다산이 이렇게 공적으로 실무를 집행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철학 덕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