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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는데,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는데,
 
   1. 태극도(太極圖), 2. 서명도(西銘圖), 3. 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였다. 임금은 그것이 학문하는 데 매우 긴절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여 이를 보면서 반성하였다. 그때 이황은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이 도(圖)를 만들어 올리며 ‘제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 도뿐입니다.’ 하였다.
 
   1. 태극도(太極圖), 2. 서명도(西銘圖), 3. 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였다. 임금은 그것이 학문하는 데 매우 긴절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여 이를 보면서 반성하였다. 그때 이황은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이 도(圖)를 만들어 올리며 ‘제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 도뿐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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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음력 1501.11.25~1570)의 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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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춘천 박씨] 밑에서 언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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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홀어머니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말을 들을까 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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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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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523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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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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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50대, 1553년 봄에는 대사성(국가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기관장)을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그 뒤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려는데 옷과 말이 없어 출발하지를 못하기도 했음.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논의가 이어지기도 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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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經術: 유교의 경전에 근거하여 얻은 정치적 기술, 능력)과 문장이 이황의 오른쪽에 설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불러서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난하고 궁하여 서울에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호조에 명하여 충분히 급료를 내리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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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의 일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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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평등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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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09900&code=kc_age_30 퇴계는 당시 젊은 정치가들의 개혁 의지가 비참하게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 퇴계는 관직생활 가운데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등의 나름의 고군분투를 했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정치 현실 속에서 출사와 진퇴를 반복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매진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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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양반이나 중인이나 상인이나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예로 대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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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손님이든 모두 뜰아래에서 맞았으며 자신의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이 전혀 없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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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과 교제할 때 처음은 담담하지만 오래 지낼수록 점점 믿게 되어서 지성으로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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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술과 밥상을 차려서 정성껏 대접했음. 생계가 모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가르치지 위해서였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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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교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누구나 균등하게 예우한 것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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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을 좋아했던 퇴계는 학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했음. 비록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대를 높여 자(字)를 부르며 높였음. 제자를 벗으로 대했고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가리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도 읍하여 맞이하고 보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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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숙한 하루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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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는 엄숙한 아침 생활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음.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연구를 시작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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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아침 생활은 서울에서나 고향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도 잘 지켰다고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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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는 독서를 위주로 하고 사색은 주로 밤에 했음</br>

2022년 10월 16일 (일) 21:07 판

<<성학십도(聖學十圖)>> 소개

○ 1568년, 68세의 퇴계가 17세의 선조에게 바친 책
○ 1567년 선조는 16세로 즉위하자 퇴계에게 관직을 내렸으나 퇴계가 벼슬을 사양해서 응하지 않다가 다음해 7월 판중추부사[군사, 왕명 출납의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 관청의 가장 높은 관직]로 임명됨. 하지만 경연에서 여러 차례 시강도 했으나 늙고 병약한 자신의 한계도 느끼고 어린 선조의 학문적 이해 능력에도 한계를 느껴 12월에 <<성학십도>>를 만들어 올림. <<성학십도>>는 퇴계의 평생의 학문적 여정이 담겨 있는 책임. 이후 퇴계는 귀향하여 2년 뒤 음력 1570년 12월(양력 1571년 1월) 70세로 세상을 떠남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년 무진(1568) 12월 1일
이황이 《성학십도》를 올리다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는데, 1. 태극도(太極圖), 2. 서명도(西銘圖), 3. 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였다. 임금은 그것이 학문하는 데 매우 긴절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여 이를 보면서 반성하였다. 그때 이황은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이 도(圖)를 만들어 올리며 ‘제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 도뿐입니다.’ 하였다.


퇴계 이황(음력 1501.11.25~1570)의 일생

○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춘천 박씨] 밑에서 언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
○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홀어머니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말을 들을까 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했음
○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음
○ 20세에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
○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 퇴계의 50대, 1553년 봄에는 대사성(국가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기관장)을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그 뒤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려는데 옷과 말이 없어 출발하지를 못하기도 했음.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논의가 이어지기도 했음

 "경술(經術: 유교의 경전에 근거하여 얻은 정치적 기술, 능력)과 문장이 이황의 오른쪽에 설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불러서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난하고 궁하여 서울에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호조에 명하여 충분히 급료를 내리도록 하십시오."


퇴계 이황의 일상

  • 퇴계의 평등사상

퇴계는 당시 젊은 정치가들의 개혁 의지가 비참하게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 퇴계는 관직생활 가운데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등의 나름의 고군분투를 했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정치 현실 속에서 출사와 진퇴를 반복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매진했음
○ 퇴계는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양반이나 중인이나 상인이나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예로 대했음
○ 어떤 손님이든 모두 뜰아래에서 맞았으며 자신의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이 전혀 없었음
○ 사람들과 교제할 때 처음은 담담하지만 오래 지낼수록 점점 믿게 되어서 지성으로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함
○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술과 밥상을 차려서 정성껏 대접했음. 생계가 모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가르치지 위해서였음
○ 사람을 교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누구나 균등하게 예우한 것임
○ 학문을 좋아했던 퇴계는 학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했음. 비록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대를 높여 자(字)를 부르며 높였음. 제자를 벗으로 대했고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가리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도 읍하여 맞이하고 보냈음


  • 엄숙한 하루 일과

○ 퇴계는 엄숙한 아침 생활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음.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연구를 시작했음
○ 이러한 아침 생활은 서울에서나 고향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도 잘 지켰다고 함
○ 낮에는 독서를 위주로 하고 사색은 주로 밤에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