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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5일 (월) 21:26 판
※) 퇴고 한 번 못한 글임을 양해바랍니다.
가제: 나의 16000자 짜리 사춘기
나의 사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15살 무렵의 어느 날 밤 10시, 가내의 공기는 엄중했다. 막 학원을 갔다 돌아온 참이다. 현관 앞에서부터 맥을 짚어가던 나는 조심히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얘야, 와보거라. 그 말을 듣고 긴장한 채로 부모님을 찾아걸었다. 우리 세 가족은 거실에 모여앉았다. 아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희야, 넌 입양아란다.”
갑작스러운 말에 난 고개를 쳐들어 부모님을 응시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갓난장이 때의 일화였다. 과거 한 다세대 주택에서 큰 화재가 났다고 한다. 그가 막 퇴근을 한 무렵에는 화마는 이미 온 집을 집어삼킨 채였다고 한다. 처음엔 자신의 아들을 구하려고 했단다. 하지만 초입에서 아기가 울음소리를 듣고는 계획을 바꾸었다고, 그렇게 살아남은게 나라고. 그들의 자식도, 나의 혈육들도 타다남은 뼛조각만 조금 남았다.
“네?” 그건 일종의 단말마였다. 부모님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눈을 피했다. 이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뭐 이런 농담을 하냐는 말에 둘은 묵묵부답이었다.
“애초에 왜 알려주신 거에요?” “이제 알아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난 코웃음을 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축축해진 소매는 아직도 내 마음에 사무쳐있다. 내 세계는 싸구려유리조각이 깨지 듯 산산조각났다. 그 무엇보다도 잘고 잘게. 마음까지 찢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난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우리 가족이 닮은 점이 없다는 건 알았다. 흑발에 약간이나마 곱슬기가 있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자연갈색에 뻗뻗한 머리를 가져 그런 건 아니었다. 우린 정말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친척들이 우리들의 앞에서 유난히 말을 아끼던 이유, 난 그런데도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모르고 사는게 좋았을 텐데. 내 사춘기는 가족에 대한 의문에 집어삼켜진 시기였다. 정말 아빠는 엄마와 사랑해서 결혼할걸까? 날 사랑하긴 하는 걸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빚졌다는 사실은 유쾌하진 않은 것이었다. 솔향을 실은 바다내음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돌이켜보건데 온 강릉에선 이런 냄새가 풍겼다. 화가 나 예민해졌는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냄새가 미웠다. 날 속여왔던 두 사람에게도, 멍청하게 속아넘어간 나에게도 이 냄새가 날 것같았다.
담배를 배웠다. 강릉의 냄새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처음엔 거의 토할 뻔 했는데, 5일 정도 매일 피니 익숙해졌다, 부모님은 왠지 용돈을 올려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화 대신 인 것 같다. 내가 용기도 없고 방법도 몰랐듯이 부모님도 그러셨을 테다.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런 분위기가 날 불편하게 했지만 먼저 나설 용기는 없었다. 많아진 용돈을 가지고 처음으로 달려간 곳은 미용실이었다. 머리카락을 금색으로 물들이고 끝단에 살짝 웨이브를 넣었다. 미용실에서 컷트말고 다른 걸 해보긴 처음이엇다. 이렇게 기분전환이 될 줄 알았것만, 생각만큼 들뜨진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허진아를 처음으로 보았다. 똑단발을 한 채로 맨 앞에 앉은 여자애. 세련된 스타일로 바꾸면 더 예쁠텐데, 손목에 염주도 빼고. 그녀에 대한 내 첫인상은 그랬다. 살집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트러블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코의 길이와 오똑함이 딱 예뻤다. 둥글고 큰 눈매 덕에 귀여워보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친해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 봐도 너무 다른 둘이고, 친한 친구들도 너무 달랐다. 담임은 우릴 억지로 묶었다. 그때의 나에겐 불쾌한 상황이었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불러냈다. 교무실 한 켠에 마련된 상담실에는 두 여자가 앉아있었다. 진아를 이렇게 가까이서 맞딱드리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왔구나 수희야. 앉아라.” 나는 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엔 진아, 바로 옆엔 상석에 앉은 선생님이 있었다. 난 이 애랑 뭐 한 게 없는데? 어리둥절해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선생님은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내일 수행평가를 내줄거야. 두 명이서 하는 걸로. 조를 자유롭게 짜게 해줄 건데 너희 둘은 같이 하라고.” “네? 왜요?” “선생님은 너가 좀 성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아가 꼼꼼하고 참하니까 옆에서 잘 배우렴.” “얘는 좋다고 했어요?” “그럼, 우리 진아는 모범생이거든.” 담임은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든 말든 그녀는 표정변화도 없이 얌전했다. 선생님은 연이어 제대로만 하면 성적을 좀 쳐주겠다고까지 말했다. 짜증이 좀 나긴 했다. 그래도 거기서 따지고 성질을 부릴 순 없었다. 알겠어요……, 체념하며 대답하고 진아와 함께 교무실에서 나왔다.
“잘 부탁해.” 그 아이가 날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난 대답도 없이 한숨을 푹 쉬곤 먼저 교실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싸가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정말로 그 날 수행평가를 냈다. 누구랑 조를 할까 눈치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 이미 조가 정해진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 내가 면전에 대고 한숨을 셨던 아이가 찾아왔다.
“과제 언제부터 할까?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곤 시간 괜찮아?” 자존심도 없는지 미소를 띄며 내 앞에 섰다. 짜증날 법도 한데 그런 티 하나도 없이 말이다. 성적 때문에 이러는 거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전에 미안하기도 했다. 저쪽도 충분히 짜증나는 상황일텐데, 내가 참여하지 않아 과제를 망친다면 내 성적만 고꾸라지는 것도 아니고. 난 그러자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말했던 대로 확실히 진아는 꼼꼼했다. 나한테도 무엇을 할지 친절하게 살펴주고 알려주었다. 나만 잘 따라가면 잘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버지.”
과제를 하던 6시 무렵 진아는 전화를 받았다. 가족한테 온 전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네, 네하는 대꾸말곤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 먼저 가볼게.” “무슨 일 있어?” “아버지가 부르셔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을 부른 이유를 며칠 후에야 알았다.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난 학원을 땡땡이치고 친구들을 보러 옆동네를 헤매던 중이었다. 맞은 편에서 모자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보였다. 방금 막 급하게 집에 나온 듯 회색후드에 돌핀팬츠차림이었다. 한 쪽에 든 검은 봉투엔 소주가 몇 병 들어있었다. 우린 서로를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다 무언가를 직감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상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역시 진아였다.
“이 근처살아?” “응.”
나는 무심코 소주병들과 진아를 번갈아쳐다보았다. 그녀도 그걸 알았는지 아버지 심부름이야하고 말해주었다.
“그때도 이런 심부름때문에 집에 갔단거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약간의 미소를 띈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도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을 떼고 진아에게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 보자. 마음 속이 복잡해졌다. 그게 너무 심해서 무슨 말을 할지도 고르지 못했다. 내 일도 아닌데 마음이 복잡해졌다. 친구랑 노는 와중에도 신나지지 않았다. 괜히 내가 심란해하는 것같다고 17살의 나는 생각했다. 둘이서 한 수행평가는 나름 잘 끝났다. 선생님은 우릴 따로 불러 흡족함을 표했다. 진아는 항상 같은 표정에 같은 말투다.
오랜 만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누구 하나도 화를 내거나 성질을 내지도 않았는데 유리다리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연기를 내며 소고기 익기 시작했다. 역시 냄새는 좋았지만 허기가 지긴 커녕 속이 불편해졌다. 나이가 들고 언젠가부터 가족들과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은 대개는 걸렸지만, 먹을 때도 차려준 걸 혼자 먹었다. 점심과 저녁은 학교나 학원에 있다가 밖에서 밥을 먹었다. 집에서 먹을 때도 아버지는 바빠 집에선 식사를 잘 하지 않으셨다.
‘속에 다 얹히겠네……,’ 속으로 생각하며 음식을 깨작거렸다. 소고기 몇 조각 먹었다. 솜처럼 부드러웠는데도 먹기가 힘들어 밥을 시켜달라고 했다. 밥을 먹는 것도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두부랑 샐러드를 반찬삼았다. 고기 좀 더 먹으렴. 속이 별로 안 좋아서요. 내 숟가락 위로 고기를 얹어주신 엄마에게 난 그렇게 대꾸했다.
"그래도 소고기가 몸에 좋단다. 비싸서 먹기도 힘드니까 많이 먹어두렴.” 아빠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걸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왠지 가식처럼 보였다. 아빠는 단지 나에게 미안하고 어려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날 생각하는 마음은 전하고 싶었겠지. 그도 용기를 낸 거라는 걸 사춘기의 나는 몰랐다. 나는 젖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다 먹었으니까. 갈게요.” 나는 곧장 식당에서 나갔다. 부모님이 나에게 뭐라고 했던 것 같다. 벌써 다 먹었니? 아니면 혹시 어디 아프니?같은 거였겠지. 난 아직도 그 날을 후회한다. 사과도 했고 용서도 받았지만 그렇다.
“수희야 프린트 가져왔지?” 프린트? 내가 의아해하자 허수아는 고객응대직원처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양 손으로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안은 채로 말이다. 방학 동안 학교에서 진행하는 보충수업이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경우엔 성적이 낮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참여, 형식적으로 부모님의 동의만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아 맞다. 탄성 섞어 대답했다.
“그거 오늘까지 내야하니까. 너가 여기다가 싸인 좀 해줄래?” “정말, 21세기에 이런 학교의 횡포가 사라져야하는데. 학생인권뭐시기도 생겼잖아?” 나는 보호자서명란에 싸인을 하며 투덜거렸다.
“근데 왜 이걸 너가 걷고 다녀? 반장이 안 걷고?” “나도 방학 때 보충수업 듣거든. 선생님이 하는 사람이 걷는게 좋을 것같다고 하셨어.” “안 귀찮아? 너가 할 일도 아니잖아.” “누가하든 뭐 어때.”
대수롭지 않긴 커녕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말투였다.대화를 하는 동안 허수아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다른 애들이었으면 귀찮다는 티 싫다는 티 한 번이라도 냈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초연함이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던 것 같다. 방학 동안 발 들이기도 싫은 학교에 반나절은 지내서 그런 것 같다. 하복도 갑갑하고 땀이 찼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에어컨은 잘 틀어주었다. 수업 시간 중 대부분은 졸거나 핸드폰을 하며 흘려보냈다. 선생 중의 대부분은 열의가 없어보였고 이런 일에 대응하지도 않았다. 땡땡이도 종종 쳤다. 친구 없는 학교는 끔찍한 장소였다.
그런 나랑 달리 허진아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칠판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방학에 교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한여름엔 하복이라도 더울텐데. 그녀는 열심히 노트에 무언가를 옮겨적었고, 가끔 선생님의 강의에 맞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기도 했다. 나중엔 핸드폰을 하는 것도 지루해 그 아이를 뒤에서 관찰하기도 했다. 이러고도 심심해, 결국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기로 했다. 첫 날은 실패했다. 교실에 들어온 찰나 누군가가 이 문제 어떻게 푸는지 아냐며 옆자리를 차지했다. 책걸상 사이를 지나며 둘을 흘긋 보았다. 사람을 상대할 땐 항상 한결같다. 그렇게 뒤에서 아쉬움으로 남은 수업을 흘려보냈다. 둘 째날은 지각을 해버려서 실패, 셋째날은 땡땡이……, 네번째 날도, 다섯째날도…….,
이번엔 성공하리라. 여섯 째 날에도 지각을 해버려 뒷문으로 들어와 아무데나 가까운 곳에 앉았다. 그녀는 항상 점심시간에 말을 걸고자 하면 사라지곤 했다. 보고 있자면 같이 앉던 아이와 먹는 것 같진 않았다. 난 편의점김밥을 하나 사들고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편의점엔 역시 안 왔고 맥도날드에도 없고, 분식점에도 없었다. 난 학교 주위를 싹싹 뒤졌다. 엄청 멀리가서 먹거나 학교 안에 있다는 건데……, 난 혼자 중얼거렸다. 시간을 보니 다음 수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에서 허수아를 찾아보기로 했다. 교실에는 당연히 없었다. 교내 식당도 잠겨있었고. 난 평소라면 항시 잠겨있던 옥상층에도 가보았다. 어라?라는 반응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옥상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자물쇠와 쇠사슬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있었던 것이다.
녹이라도 슨 듯한 붉은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문고리가 빡빡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걱정과는 달리 문고리는 잘 돌아갔다. 텅빈 쇠문이 생각보다 무거웠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문을 열자 턱 위에 앉아있는 허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 팩두유를 든 채로 앉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은 향기를 실어왔다. 꽃냄새인가? 난 손바닥만한 크기의 크래커 봉지가 날아 내 발치에 떨어졌다.
“고마워. 내가 먹은 거거든.” 그 말에 쓰레기를 주워들고 수아에게 다가갔다.
“매일 여기서 먹던 거야?” “응.” “자물쇠는 어떻게 푼거야?” 그녀는 글쎄?하고는 빨대를 빨았다. 두유를 거의 다 마셨는지 큼지막한 공기소리가 났다. 내가 다가오자 손바닥을 핀 채로 뻗어왔다. 오른손에 들고있던 크래커봉투를 올려주었다. 동시에 수업이 재개된다고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 왼손에 들린 김밥을 힐긋 보았다. 내가 멋쩍게 웃으며 돌아가자고 했다.
“아냐, 먹고 가. 기다려줄게.” “진짜? 너 수업들어야하잖아.” “괜찮아.” “어? 진짜? 진짜 너무 고마워!” 환호에 가까운 감사인사를 하고 진아의 옆에 앉았다. 방금 전의 그 향기. 아무래도 그녀의 냄새였던 것 같다. 향수를 쓰는 건가? 아니면 샴푸나 섬유유연제? 닮고 싶은 냄새였다. 난 곧 김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먹으라며 가방에서 두유를 하나 뜯어주었다. 씹는 속도를 줄이며 주변을 슬쩍 살폈다. 두유 하나랑 크래커 하나만 먹는건가? 내가 아는 한 저 크래커는 한 봉지엔 다여섯조각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난 왜 방학에도 교복을 입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뭐 입을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이 정도면 단정하잖아?” “덥지 않아?” “여름이니까.” 수아를 눈으로 한 번 훑었다. 땀을 먹어 옷이 꿉꿉해고 묵직해진 나와 달리 뽀송해보였다. 정말 신기한 애야하고 난 생각했다. 교실에 돌아갔을 땐 15분 정도 늦었다. 선생님은 다행히 별 말 없이 넘어가주었다. 나만 지각했을 땐 분명 혼냈었는데 말이다. 보충수업이 끝나기 까지 열흘 채 남지 않았지만, 남은 열흘은 결석도 지각도 하지 않고 나름 성실히 임했다. 수업을 듣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커피를 샀네?” 세븐일레븐 봉투에서 점심거리를 꺼내는 걸 진아가 지켜봤다. 한 입 할래? 내가 묻자 그녀는 그 아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안에 넣어달라는 듯 양손을 뻗었다. 웅크린 손 안으로 알루미늄 병에 든 블랙커피를 주었다. 병을 돌려 따고 경계하듯 한 모금 들이킨 진아는 잠깐 인상을 썼다. 그걸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난 큭큭 거리며 웃었다.
“너 쓴거 진짜 못 먹는구나?” “커피 처음 마셔봐서……,”
부끄러워한다. 진아가 이렇게 감정표현을 한 적이 있었나? 찔끔나오는 눈물을 털어내며 같이 사온 라떼를 사왔다. 난 그걸 진아에게 건냈고, 어쩐지 심통이 난 듯 그걸 받았다. 마스터 라떼……, 위험물질이라도 처리하는 듯 조그맣게 글자를 읽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이건 다네?” “편의점 커피는 거의 다 달아. 1+1으로 산거니까 너 마셔.” “고마워. 잘 마실게.” 다음 날, 진아는 어쩐지 피곤해보였다. 어제 잠 못잤어?묻자 대답하길. 커피 때문인지 오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고 했다. 커피에 무너지는 친구구나하고 난 생각했다. 함께 점심을 먹는 마지막 방학 날이었다.
“이제 끝이네.” “드디어 지루한 보충수업에서 해방이다.”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수아는 말 없이 전방을 보고 있었다.
“이제 나랑 같이 밥 먹을 필요없지? 넌 친구가 많으니까?” 나는 얼빠진 채로 어?응?했다. 얼굴 표정은 분명 평소와 같았다. 뭐든 초연하게 여기는 듯 한 눈빛과 약간의 미소를 품은 입꼬리. 다만 인상이 꽤 달랐다. 좀 더 무거웠다고 해야할까? 아직 그 인상을 뭐라고 표현하고 정리해야할지 난 모르겠다.
“같이 먹자 밥. 항상은 아니겠지만.” 수아는 고개를 돌려 말 없이 날 쳐다보았다.
“거 참 사람 무안하게 대답도 안하고. 나랑 먹기 싫구나?” “아니야. 의외라서 그랬어.” “같이 먹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그래 가끔이라도 같이 먹자.” 웃고있던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다시 눈을 피했다. 원래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진 않는데. 우린 그러곤 서로를 바라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고 나란히 서있었다.
남은 방학은 집에서 뒹굴거리거나 외출하여 친구들을 만나는 것의 반복이었다. 생각해보니 진아에게 번호를 받아놓고 문자 한 통 나누지 않았다. 누워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책상다리를 했다. 그리고 문자창을 띄우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화면 위의 검은 글자들은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없어졌다를 반복했다. 잘 지내?는 너무 멋쩍다. 뭐 하고 있었어?는 너무 급진적인 것같고. 몇 십분은 고민한 것같다. 결국 우리 개학 언제지? 그렇게 보내놓고는 핸드폰을 이불 위에 대충 던져놓고는 배게를 깨물었다. 남들을 쪽팔릴때면 이불을 찬다고 하던데 나는 부드러운걸 물어뜯는 습관이 있다. 가령 옷소매부분 이라던가.
“엿새 남았어.” “고마워! 그때 봐” “응” 개학날을 물어보는 건 너무 바보같았던 것같다. 하지만 더 좋은게 안 떠올랐었다!
개학 첫 날. 막 등교해서 교실로 가던 중 수아와 마주쳤다. 수아는 내게 고개를 끄떡했다. 어떻게 인사할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웃으며 양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후 별 다른 것 없이 우린 서로 지나쳤다. 전 학기만 해도 그녀와 아는 척도 하지 않았었다. 친해졌다는 생각에 기분이 살랑거렸다. 그 날 저녁 여섯 시 쯤에 우린 교문에서 마주쳤다.
“어라? 이제 집 가는 거야?” “응” 친구들이랑 저녁약속이 있었던 나는 집에 돌아갈 빠엔 학교에 남기를 택했다. 뭐하고 있었어?묻자 야자실에서 공부를 좀 했다고 한다. 난 어색하게 그렇구나하고 대답했다. 방학 때는 잘 얘기를 했는데 학기 중이 되니 이상하게 이랬다. 그녀는 춘추복을 입고 있었다. 좀 이른 시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펑퍼짐하고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치마다.
“교복 수선 아예 안 한거지? 수선 얼만큼 해야하는지 봐줘?” “그렇게 별로야?” “응, 넌 예쁜데 옷이 다 죽여놓는다고.” “정말?”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여느때와 같은 미소였을 텐데 평소와는 기분이 달랐다. 피부에 뭐라도 내려앉은 듯 간질간질했다.뭐, 그렇다고. 어째 퉁명스러운 말이 나왔다. 나는 연신 괜찮다고 하는 그녀를 끌고 수선집으로 갔다. 심하게 부담스러워한 탓에 기장은 무릎 위로 살짝 오는 정도로, 통은 꽉 낄 정도로 자르진 못했다. 옷이 날개는 못 되어도 짐은 되지 않게 한 걸로 만족했다. 수아는 잘 입겠다며 연신 고마워했다. 약속시간에 늦어 전화기에 불이 났다.
다음날은 진아가 하얀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왔다. 일회용 천 마스크였다. 기침을 하거나 코를 먹지도 않았고 이마에서 열이 나지도 않았다. 마스크를 왜 쓴거냐고 묻자 궁금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걸 물어봐도 괜찮을지 마음 속이 턱 막혔다. 그래도 마스크를 쓴 이유는 궁금했다. 누군가들 서로의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난 그게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여야 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 그녀가 사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옥상에 올라가자 문고리를 감싸는 쇠사슬 위에 자물쇠가 교모하게 매달려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잠긴 줄 알았을 것이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조심히 사슬을 풀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늘의 바람이 내 몸을 빠르게 스치며 반겼다. 풀어둔 머리카락이 연처럼 날렸다. 그 바람은 샴푸냄새를 실어왔다. 수아다. 또 두유와 크래커, 방학때도 점심은 항상 저거였다.
“알고 싶어.”
진아는 말 없이 하얀 천 마스크를 턱 밑까지 내렸다. 얼굴엔 큼지막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니, 딸을 이렇게 때리는게 말이 돼? 어떻게 하면 멍이 이렇게 들어?”
퍼렇게 변한 피부를 보고 말했다. 그녀는 세 손가락으로 광대뼈 위를 어루만졌다.
“지금은 거의 안 아파.” 옥상 위에서 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진아도 어색한 품으로 연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땐 담배를 결코 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헛 된 생각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종이 쳤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선생님께선 진아를 슬쩍 불렀다. 한 교시가 끝나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 교무실을 찾았다. 진아는 교무실 한 켠에 마련된 파티션, 파티션 안에 담임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난 안을 빼꼼 쳐다보았다가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 바로 옆에 서 내 단화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발을 꼼지락거렸다. 수업 종이 치기 전에 진아가 나온다면 같이 돌아가야지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문득문득 시계를 쳐다보았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렸다. 진아가 나온 직후 종이 울렸다. 그녀는 날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게 좀 걱정되서……, 무슨 일이었어? 심각해보이던데”
어쩐지 머슥해졌다. 아, 하고 진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너 땡땡이 많이 쳐봤지?”
그 말이 찔려 무언가 위축되었다. 뒤이어 나온 말에 깜짝놀랐다.
“어떻게 해야해?” 이상하게 그녀 앞에서 얼어붙은 일이 많다. 내가 그렇게 있자 진아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덧붙였다.
“뭐….., 안 쳐봤다면 거짓말이지.” “어떻게 했는지 좀 알려줄 수 있니? 땡땡이치곤 보통 뭐해?”
우리는 함께 담을 넘었다. 그러는 사이 종이 울렸다.
“내 생애 이 정도 일탈은 처음인걸.” 진아는 그렇게 말했다. 전혀 걱정되거나 하는 표정도 말투도 아니었다. 어쩐지 그 말이 좋았다. 나는 진아를 위에서 쇠담장 넘어로 올려주었다. 발을 몇 번 헛딛어 안 잡아주었으면 뒤로 한 번 정도는 엎어졌을 것이다. 나는 진아를 올려둔 채로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밑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앉아있는 그녀를 내려다주었다. 처음에는 광이 나는 에나멜 구두를 잡아주었고 발과 허벅지, 마지막으로 허리를 잡아주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뭐 할거야?” “경포대를 가볼까?”
우린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초록색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어색하게 나란히 서 버스를 기다리자 곧 지평선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우린 그 버스를 타고 호수로 갔다. 깜깜한 밤임에도 호수 근처를 노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진아야,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교무실엔 왜 불려갔던거야? 분위기가 많이 안 좋던데.” “누가 우리 집을 신고했던 것 같아.” “뭐?” “어제 경찰이 가정폭력신고 받았다면서 찾아왔어. 몇 가지 묻고 가더라고.” “아빠는……, 누그러지셨나보네.” “응 그때부터 안 때리시더라 소리도 안 지르시고.” “그건 그렇고 왜 때린거야?” “정말 괜찮아? 걱정되서 그러는거야.” “그래, 숨길 일도 아니지. 우리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셔. 어머니는 도망가셨고. 내가 치마 줄이고 온 걸 못 마땅해하시더라고. 내 엄마처럼 다른 남자찾아 도망갈거냐면서. 어제는 통화하는 상대가 남자냐고 그러셨던거고.” “아……, 그 미안! 나 때문에. 그런데 괜찮은거 아니잖아. 나 안 미워?” 몸이 마구움직였다 어느새 난 그녀의 팔뚝을 붙잡고 있었다. 평이하고 초연한 말투 때문에 더 측은하게 느껴졌다.
“너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야. 잠깐 아플 뿐이잖아. 그런 건 흘려버리면 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수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정말 괜찮아하고. 나 때문인가란 생각에 얼어붙었다. 빛을 등진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너 잘못이 아니야.
“넌 어떻게 그렇게 초연해?” “세상에 집착할 만한 건 없으니까. 그런데 나 팔에 멍 들었어” 난 아차싶은 마음에 손을 재빨리 때었다. 어쩌면 내가 멍이 든 곳을 움켜쥐고 있었나보다. 난 그 초연함이 부러웠다. 둘 다 가족의 굴레에 갇혔음에도 나랑 달리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아이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제서야 머리로 깨달았다.
“사실 나도 부모님이랑 사이가 불편해. 내가 입양아라고 하시더라고……, 몇 년째 말도 서로 못하고 있어. 목이 막힌 것같아 답답해죽겠어.” 나는 홀린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말하다보니 울컥하는 심정이 올라왔다. 수아는 내 말을 경청해주었다. 이 나이들고 울기엔 쪽팔리다고 생각해서 담배곽을 꺼냈다. 내 습관이다. 담배를 펴서 눈물을 몰아내는 것 말이다.
“여기 급연인데.” 우리는 나란히 벽 앞에 섰다. 난 벽에 기대어 담배곽을 꺼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아는 허리를 꼿꼿이 핀 채로 다소곳 서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며 흘긋 쳐다보았다.
“욕 좀 들으면 되는거지. 아! 담배연기 싫어하겠구나.” “상관없어. 아빠가 맨날 집에서 피우시거든.” 라이터를 켰다. 주황색 불티가 몇 번 날렸다. 연이어 난 불을 난 담배에 붙였다. 옆에선 여전히 가로등처럼 우드커니 서서 앞을 보고 있었다. 심심하지도 않나? 꼼지락거리지도 않은 모습에 그런 생각을 했다.
“너도 한 번 펴볼래?”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쥔 그대로 입에서 뗐다. 오른손 통째로 옆으로 살짝 뻗었다.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필터엔 연분홍의 틴트자국이 묻어있었다, 어색하게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몇 번 콜록거렸다. 인상을 쓰는 건 그때 처음 보았다. 내가 피웠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밍숭맹숭했다
“너도 번뇌에서 벗어나길 바래.” 기침이 끝난 진아가 말했다. 자신이 끼고 있던 염주를 건내면서 말이다. 내 이야기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염주를 손목에 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와 같은 오른손에 찼던 것 같다.
그게 계기였던 것 같다. 내 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다 했던 관계는 처음이었다. 진아와 인사 정도나 하고 지내는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화를 하는 상대는 나 뿐이었다. 왠지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학교에서가 아닌 주말에도 가끔 만났다. 진아는 사복 역시 수수했다. 그걸 못 봐 끌고다니며 이 옷 저 옷 대보고 사준 것도 여러번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이렇게 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으시던 것같다. 진아는 운이 좋으면 나갈 수 있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내 생각에 꽤 정확한 표현이다. 어쩔 수 없이 극성인 부모다. 난 그걸 십분 이해했다. 언젠가 너는 학교 공부로 충분하냐고 물었었다.
“할 수 있는 한에서 해야지.” “어렵지 않아?” “학원을 다녔다고 안 어렵진 않았을거야.” “너 멘탈이 정말 대단하다.” “......, 그냥 불가항력이니까 신경 안 쓰는 거지.”
나는 진아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었다. 친구가 의젓해 보였고 왠지 내가 뿌듯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허진아는 공부에 열중했다. 책을 한 번 본 후 노트 위에서 샤프가 움직였다 멈췄다. 움직였다 멈췄다. 당일 부모님에게 용기내 말을 걸었다. 학원 그만 다니고 스스로 해보겠다고. 내가 마음을 다 잡았다고 부모님은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말을 듣고 대답해주며 그런 감정이 표정에 묻어났댜. 이해가 안되는 건 인강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진아와 함께 남아 공부할 땐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어쩐지 함께 남아 공부할 때는 집중이 잘 됐다.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난 알지도 못했고 목표가 있지도 않았다.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그녀는 가끔 핸드폰을 꺼내 인강을 보곤 했다. 화면 너머를 슬쩍 쳐다보면 ebs나 강남인강이었다. 둘다 무료인강사이트다.
2학년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래도 우린 거의 매일 하교 후에 함께 공부했다. 언젠가는 진아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매니큐어를 할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단다. 더 예쁜 걸 해주고 싶었지만 분홍색으로 손톱을 채워주는 것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 그녀가 예쁘다며 좋아했던 걸 생각해보니 하교길에 매니큐어를 잔뜩 샀다. 다음 날 학교에서 손톱이 다 깨지고 매니큐어가 거칠게 벗겨진 걸 보았다. 누가 이랬는진 뻔하지, 나는 말 없이 그 손을 어루만졌다. 아픔이 가시길 바라면서. 그 매니큐어는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 쳐박혀 있을 것같다. 버린 기억은 없지만 쓴 기억도 없다.
우리가 다시 같은 반이 된 건 3학년 때였다. 진아는 수험생이 되어서도 학원도 과외도 하지 않는 것같았다. 그녀에게 물었다. 학원이나 과외를 해볼까? 이 시기엔 누구나 괜히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로 부족한가봐?” 대답을 듣고 얼어붙었다. 그녀는 항상 엇비슷한 표정이라 가끔은 사람을 더욱 철렁하게 만들곤 했다. 당황해 말도 못하자 진아는 여전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었던 거 맞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3학년이니까 그게 더 좋을거야.” “역시……그런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신의 말이 더 이상의 함의가 없다는 듯한 언행으로. 가끔 이럴때면 진아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되뇌인다. 역시 내가 오해한 거겠지? 과외는 주말로 구했다. 평일에는 우리 둘이 계속 함께 할 수 있게. 그리고 가끔은 공부를 하다 학교 밖으로 잠시 나서 놀기도 했다. 나는 의자를 이어붙였고 진아의 다리를 베개삼아 누웠다. 나는 위를 보고 말을 걸었다. 진아는 수학문제를 풀면서도 내 말에 대답했다. 그녀의 머리끝에 향기가 맺혀 이슬비처럼 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 기분좋게 부들거렸다.
“우리 오늘은 좀 놀래?” “어디로?” “그러게. 그냥 좀 돌아다녀보면서 정해도 좋을 것같은데, 넌 어때?” 책을 보던 진아는 고개를 숙여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냐보단 누구랑 있냐가 중요하데. 진아는 수긍했다. 우린 책가방을 챙겨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수험생이 되어 좋은 점이 생겼다. 집에 늦게 들어갈 명분이 항상 있었다. 이상하게도 진아의 몸에 멍이 생길 때가 더 잦아졌다. 그럴때면 난 그곳을 쓰다듬고 어루만져주었다. 그런 때에도 진아는 항상 묵묵했다. 맞았다고 내게 말을 먼저 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할때도 그랬다. 공부하기 싫다고 하루에 몇 번은 말했던 나와 다르게 그랬다. 가슴을 졸이게도 하고 날 설레게도 했던 시기, 시험날은 성큼 다가섰다. 안 좋은 점도 있었다. 부모님의 눈치는 더 무거워졌다. 난 이상하게 예민해졌고. 언젠가는 어머니한테 내 진짜 부모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고 소리를 질렀다.
“학원이나 과외같은거 안 필요하니?” 오히려 감사해야할 말이었다. 울컥하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바람의 잎새처럼 떨리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 난 기어가는 목소리로 학원 하나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렸던 나에게 그건 사과의 일종이기도 했다. 시간은 속절없었다. 눈 깜짝하고 보니 수능날이었고, 집에 돌아와 잠에서 깨어보니 수능이 끝난 이후였다.
우리의 관계는 지속된 건 졸업식 직전까지였다. 수능이 끝나고 학교는 놀자판인 건 당연한 일이다. 안 나오는 친구들이 생기는 것 역시 그렇고. 그러는 와중에 수아는 돌연히 사라졌다. 자주 연락을 하고 드문드문이라도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과는 달리 두문불출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물었다. 수아는 연락도 안 된다고 혹시 친한 내가 아냐고.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 대답을 해야하는 순간, 이런 무력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문자는 자주 보내봤다. 읽는지 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답변은 없었다.
비감한 2월이 되어서야 수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정문이 잠긴 학교, 나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야외 한 켠에 마련된 정자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익숙한 샴푸냄새가 바람을 탔다. 정자에 다가가자 몇 번 껌뻑거리며 가로등이 켜졌다. 어둠이 걷히고 수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마음 속에 있던 화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보고 싶었어.” “오랜만이야.”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수아의 옆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쉽사리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내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길 난 바랐다. 바닥은 차가웠다.
“너한테는 말해줘야할 것같아서.” 바닥이 차갑다. 정자의 지붕과 수풀들의 그림자가 수아의 얼굴 위에서 하늘거렸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늘에 눈이 가려졌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뭘 말이야?” “이제 못 볼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어른이 되었잖아.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나이지.”
나는 뛰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은 혼자 오므라들었다. 그때 약간이나마 울었던 것같기도 했다.
“그럼 나는? 나한테 그냥 이렇게 말만 하고 떠나겠다고?” “......, 너는 나의 이런 면이 좋은 거 아니었어?” 나는 수아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푸른 핏줄이 살 밑에서 비쳤다. 분노와 충격에 팔이 떨렸다. 나는 분명 수아를 사랑했다. 그건 배신감이었다.
“이래도 아무렇지 않아?” “세상에 집착할 만한 건 아니것도 없어.” “너가 너무 미웠는데……., 이젠 너무 애처로워. 넌 허무함을 잡고 있을 뿐인거야. 대체 뭐가 널 그렇게 만든거야?”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눈동자엔 여느때와 같았다. 그런 평온함이 이젠 서슬퍼렇게 보였다. 난 손을 놓고 허진아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충격에 빠진 몸을 다 잡았고 손목에 낀 염주를 뺐다. 그걸 바닥에 내던지고 싶어 팔을 크게 들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겠어. 난 염주를 조심히 수아 머리맡에 내려두었다. 그녀가 날 다시 잡으려고 한다면, 나는 백번도 했을 것이다.
“역시 또 이렇게 끝나네……,” 진아는 누운채로 그렇게 말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날 다시 붙잡지 않았다.
그제서야 난 붙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았다. 가족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난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그들은 내 가족이었다. 날 사랑해주었고 내가 사랑할 부모님. 그 날 우리 가족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