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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역사다. 한국 역사면 5천 년 동안 이 민족 안에 났던 모든 사람과 일은 마디마디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따로 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 생명이다. 산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는 또 한국 역사로 그것이 완전한, 따로 서 있는 것이냐 하면 아니다. '''한국 역사는 세계 역사의 한 부분이다.''' | 역사는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역사다. 한국 역사면 5천 년 동안 이 민족 안에 났던 모든 사람과 일은 마디마디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따로 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 생명이다. 산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는 또 한국 역사로 그것이 완전한, 따로 서 있는 것이냐 하면 아니다. '''한국 역사는 세계 역사의 한 부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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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한국철학사]] |
2022년 3월 7일 (월) 14:45 판
단군신화를 읽기 전에
-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 태백산 천제단
-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 민족은 어디서 빌고 기도했을까? (임선영, 정성식, 황광욱 지음,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 동녁, 1999, 16~17쪽)
얼핏 생각해 보면 장독대가 있고 마을 어귀의 장승, 산 중턱의 당나무, 솟대 그리고 산 정상 등이 떠오른다. 여러 기도하는 곳 가운데 가장 권위 있으며 온 나라, 온 민족의 발원을 모으는 장소는 아무래도 산 정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산 정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최초의 기도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항상 신웅(神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 곰 여자가 단수(檀樹) 아래에서 잉태가 있기를 빌고 빌었다."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의 영향이다. '마리'는 '머리'의 변형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으뜸산이라는 의미에서 마리산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강원도 태백산 등 마을과 동네 어귀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여지없이 기도터였다. 그런 산들은 대개 '대, 태, 백, 우, 수, 머리' 같은 이름과 뜻을 가지고 있다.
- 단군신화에 담긴 상징들 (임선영, 정성식, 황광욱 지음,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 동녁, 1999, 19쪽)
"단군 이야기는 상징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인·환웅은 하늘 또는 하늘적 존재를 상징하고, 곰·호랑이는 땅 또는 땅적 존재를 상징한다. 여기에서의 하늘은 물론 물리적인 하늘이 아니라 정신·영혼·도덕성의 근원·생명의 씨·아버지·양(陽)을 나타내고 땅은 육체·물질·생명의 터·어머니·음(陰)을 나타낸다."
삼국유사에 담긴 단군신화
강원도와도 인연이 깊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
- 이 곳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 일연 스님(1206~1289)이 삼국유사를 지은 까닭?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5, 9~12쪽)
○ 고려시대 스님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공부를 위해 전남 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량사로 들어갔고, 14세 때 승려가 되기 위해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로 갔음
○ 일연은 당시 고려 전기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지나친 사대주의로 일관해 중국 문화의 주변 혹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음
○ 고려가 떠받들던 중국 송나라가 망하고 중국인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몽골족이 새롭게 원나라를 세운 사실은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음
○ 사실상 일연의 삶은 몽골의 침략에 따른 내정 간섬과 상당히 관련되어 있음
○ 그러나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 자주적 입장에 서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버금갈 만한 유구한 역사 민족임을 드러내려 했음
○ 일연은 기존의 유교의 도덕적 사관에 의해 서술된 <<삼국사기>>를 편협한 시각에서 저술된 것이라고 판단했음. 그의 역사서술 태도는 탈유가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것임. 그의 민중 의식은 인간 평등이라는 자신의 불교적 가치관을 근본으로 하면서 피폐한 당시 사회에 대두된 민중에 대한 자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
☞질문: 역사가 왜 중요할까?
역사가 왜 중요할까?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01
역사이해 (30~31쪽)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역사 이해다. 예로부터 인간을 가르치는 교훈 속에는 반드시 일종의 우주사(宇宙史)가 들어 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어찌하여 생겼다는 것, 어떻게 되어 가고 어떻게 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 있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첫머리, <요한계시록> 같은 것은 다 가장 두드러진 실례이지만, 그것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전이 다 그렇다. 불교에는 불교식의 우주역사, 인도교에는 또 인도교식의 우주역사가 있다. 그뿐 아니라, 사실 모든 원시적인 시대부터 있는 신화, 전설이 결국은 다 우주역사다. 그 속에 종교도, 철학도, 세계관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보고만 있을 때는 자기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인 듯하나, 사실 자기 혼자 외따로 설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고립을 두려워한다. 비록 상상으로라도 허무의 캄캄한 소(沼)를 보여주고 너는 그 절벽에 홀로 서는 존재라 할 때는 저는 부르르 몸을 떨고 거꾸로 떨어지려 한다. 사람은 홀로가 아니다. 외톨이가 아니다. 나는 나다 하면서도 또 자기를 의미 있는 전체 속에서 발견을 하고야 안심입명을 하지, 그렇지 않고는 못 산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화요, 우주사다. 인생이 가장 튼튼함을 느끼는 때는 저가 우주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는 때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역사의 정의 (39~41쪽)
'역사란 무엇이냐?'하면 누구나 서슴없이 지나간 일의 기록이라 대답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정의가 다 그런 것같이, 이 정의도 한편에서는 설명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가리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은 우선 되는대로 하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째, 지나간 것(과거)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일(사실)이라는 말이다. 지나간 일을 기록한다 하지만 지나간 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놓은 것이 역사는 아니다. 우선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지나간 10년 간의 일을 다시 나타내려면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들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역사는 영 쓸 수 없는 일이다. ... 그와 같이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의 산 관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뜻이 문제다.
역사는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역사다. 한국 역사면 5천 년 동안 이 민족 안에 났던 모든 사람과 일은 마디마디 떨어진 것이 아니고, 제각기 따로 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 생명이다. 산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는 또 한국 역사로 그것이 완전한, 따로 서 있는 것이냐 하면 아니다. 한국 역사는 세계 역사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