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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또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치신다면 비록 앞의 말씀보다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역시 타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 | 만약 또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치신다면 비록 앞의 말씀보다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역시 타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 | ||
이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의 재료이니 이 두 가지에는 원래 구분이 있으나 그것이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 혼합되어 있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리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고 발현하는 사이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과불급]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칠정의 발함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여 성의 본체가 혹 온전하지 못함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은 바로 천명의 본연이고, 악한 것은 곧 기품의 과불급이니 이른바 '''사단, 칠정이란 것이 원래부터 별개의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이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의 재료이니 이 두 가지에는 원래 구분이 있으나 그것이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 혼합되어 있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리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고 발현하는 사이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과불급]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칠정의 발함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여 성의 본체가 혹 온전하지 못함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은 바로 천명의 본연이고, 악한 것은 곧 기품의 과불급이니 이른바 '''사단, 칠정이란 것이 원래부터 별개의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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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토론 주제(2022.10.5): 고봉의 마음 읽기''' == | == '''오늘의 토론 주제(2022.10.5): 고봉의 마음 읽기''' == |
2023년 5월 18일 (목) 13:55 기준 최신판
조선 성리학의 주요 과제[편집 | 원본 편집]
☞ 윤사순, <<조선, 도덕의 성찰>>, 돌베개, 2010
○ "천인심성합일지도"라는 제목 그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하늘, 만물과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음
○ 권근은 '인(人)'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人)은 인(仁)이다"라고 해석했음
=> 인(仁)은 공자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애인(愛人)]"으로 설명된 뒤에 성리학을 일으킨 정호(程顥, 1032~1085)는 우주의 입장에서 "생(生: 낳음)의 뜻"이라고 했음. 또 후에 주희(1130~1200)에 오면 인(仁)은 "만물을 낳는 이치[생물지리(生物之理)]" 또는 "만물을 낳는 본성[생물지성(生物之性)]"이라고 해석됨
=> 권근은 이러한 중국 성리학자들의 "사람에 대한 사랑"을 넘어선 "만물 생성의 특성(혹은 이치/본성)"을 가리키는 인(仁)의 의미를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적용함. 즉 만물을 낳는 이치로서 인(仁)이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만큼 인간의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인(仁)은 사람을 살리고 만물을 살리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음
☞ 그런데 이 선한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선의 근원, 본성 파악을 위한 천명 연구[편집 | 원본 편집]
- <중용(中庸)>에서 말한 인간 본성의 근원으로서의 천명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 본성]이라고 한다.[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 <중용>에서는 하늘이 명한[천명(天命)] 본성이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다고 보았음
- 후대 중국 성리학들이 정의한 인간 본성
○ 후에 중국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했음. 기질지성은 기질로 인한 본성의 의미이고 본연지성은 사단과 관련된 인의예지의 본성임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편집 | 원본 편집]
○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대표하는 추만 정지운(1509~1561), 하서 김인후(1510~1560), 퇴계 이황(1501~1570), 고봉 기대승(1527~1572) 등은 모두 천명에 대한 연구에 열중했음. 이들은 다 <천명도>를 그렸는데 정지운은 그것에 대한 해설서인 <<천명도해(天命圖解)>>를 지었고, 이황도 같은 종류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었음
○ 천명에 대한 성리학적 연구, 그림과 해설을 통한 연구 방식은 다른 나라의 성리학계에서 볼 수 없는 특수한 현상임. 천명에 대한 그림을 통한 연구는 조선 성리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음
- 정지운의 <천명도>(고려대 소장 만송문고 <천명도해>)
- 이황의 <천명신도(天命新圖)>
☞ 퇴계는 자신의 <천명도>에 대해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이 <천명도>를 통해 진실로 천명이 자신에게 구비되어 있음을 알고 덕성을 존중하여 그것을 보존, 확충[존덕성(尊德性)]하고 믿고 따름을 극진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음. 그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모델로 하면서도 천명을 하나의 권역으로 보고 순선한 성(性)과 그로부터 발현되는 사단칠정에 이르는 선의 일맥을 표현하고 있음 (이정환, <퇴계 <천명도설>과 <천명도>에 대한 철학적, 도상적 재검토>, <<퇴계학보>> 제135집, 2014, 9쪽)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배경[편집 | 원본 편집]
○ <<퇴계집>>에 따르면, 추만 정지운이 그와 이웃에 살았는데 퇴계의 조카가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도설과 해설에 고칠 곳을 발견하게 됨. 처음에는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다가 수소문 해서 그것이 정지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됨
○ 특히 이 <천명도>에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며,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작성했던 부분을 이황이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게 함
○ 이에 정지운도 이황의 견해를 따라 새로 <천명신도>를 작성하게 됨
○ 정지운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보여주었고 고봉은 이에 대해 비판함
○ 정지운이 고봉에게 <천명도>를 보여주었고, 고봉은 이에 대해 비판함. 이 비판이 여러 경로를 통해 퇴계의 귀에 들어가고, 퇴계(1501~1570)는 비판의 일부를 인정하면서 자신이 수정한 내용을 고봉에게 편지로 전달했음. 이후 10여 년간 약 1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임
사단칠정논쟁을 살펴보기 전에 참고해야 할, 조선성리학의 기반인 주자학적 시각[편집 | 원본 편집]
☞ 이상호,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글항아리, 2011, 67~71쪽
○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와 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원칙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됨. 사람에게도 사람의 이치가 주어져 있으며 그러한 이치가 사람을 형성하는 다양한 속성들의 기와 만나 '나'라는 특수한 사람을 만듬
=> 모든 사물, 사건은 이와 기로 구성됨. 기는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이고 이(理)는 사물의 본질과 규칙임
천지간에는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도며 사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는 형이하학적인 물질[기(器)]이며, 사물을 생성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성될 때는 반드시 리를 품수한 후에 성(性)이 생기고, 기를 품수한 뒤에 형(形)이 생긴다. 天地之間, 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是以人物之生, 必稟此理然後有性, 必稟此氣然後有形. (<<주문공문집>> 권58)
○ 사람에게 주어진 사람의 이치에 대해 주희는 맹자의 철학에 주목했음.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본성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음. 주자학은 "사람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이치이다[성즉리(性卽理)."라고 보았음
☞ 여기서 필연적으로 드는 질문. 주자학과 조선 성리학의 공통적인 질문: 어째서 악이 생겨날까?
○ 인간의 본성은 이(理)이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악이 생겨날까?
① 본연지성(천명지성): 천지의 이(理)를 품부받아 생긴 성(性). 하늘이 명한 성(性). 맹자가 선하다고 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성(性)
② 기질지성: 인간은 이와 함께 기 또한 품부받음. 이 때 받은 기에 깃들어 있는 성. 이 육체적인 요소인 기의 작용에 의해 욕망이 발동되어 현실에서 악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됨
☞ 여기서 관건은 인간의 마음
○ 주자학에서는 사람을 곧 마음으로 보았음. 사람의 마음[심(心)] 또한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음
○ 인간의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총괄하고 주재한다고 보았음[심통성정(心統性情)]. 여기에서 성(性)은 이(理)임
○ 인간의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는 활동을 하지만 성(性)은 그렇지 못함. 인간의 성인 인, 의, 예, 지 4덕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음. 인간 마음의 활동을 뜻하는 사람[마음]의 기의 영역은 인의예지가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과 사람이 가진 일상적 감정, 욕망 등임. 마찬가지로 도덕 본성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행동을 제어하는 모든 마음의 활동도 사람의 기임
다시,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으로[편집 | 원본 편집]
☞ 이상호,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글항아리, 2011, 155~158쪽
○ 1558년 10월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황(1501~1570)에게 갓 과거에 급제한 젊은 학자 기대승(1527~1572)이 찾아왔음. 당시 이황의 나이 58세였고 기대승은 32세였음. 이황이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수정한 데 대해 세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고 기대승 역시 그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서울에 있는 이황을 찾았음
-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첫 편지
여러 동학들 사이에서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내 생각에도 지난번에 내가 말한 것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마친 그대의 지적과 비판을 받고 보니 더욱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를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로 바꿈
- 고봉이 퇴계에게 답한 편지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만약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여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가 갈라져서 두 가지가 되는 것이며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이 기(氣)를 타지 않는 것이 되니, 말의 뜻에 병폐가 없을 수 없을뿐더러 후학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또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치신다면 비록 앞의 말씀보다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역시 타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 이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의 재료이니 이 두 가지에는 원래 구분이 있으나 그것이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 혼합되어 있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리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고 발현하는 사이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과불급]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칠정의 발함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여 성의 본체가 혹 온전하지 못함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은 바로 천명의 본연이고, 악한 것은 곧 기품의 과불급이니 이른바 사단, 칠정이란 것이 원래부터 별개의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토론 주제(2022.10.5): 고봉의 마음 읽기[편집 | 원본 편집]
☞ 1. 고봉은 무엇을 우려했던 것일까? 고봉의 편지 속에 숨겨진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을 읽어본다면? ☞ 2. 왜 사단, 칠정에 관한 논의가 중요했을까?(인간의 감정과 선/악의 관계 등 자유롭게 생각해 보기)
참고: 유교경전 속 사단칠정[편집 | 원본 편집]
- <<맹자>> <공손추 상>의 사단
맹자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차마 남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다. …… 모두가 차마 남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惻隱)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인명을 구조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았다는 악평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상으로 살펴보면 다음을 알 수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고,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고,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다. 사람들이 이 사단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 <<예기>> <예운禮運>의 칠정
무엇을 사람의 감정[인정(人情)]이라 하는가? 그것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감정으로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 ... 음식을 향한 식욕, 남녀의 성욕은 사람들의 큰 욕망이고, 죽음과 가난, 고통은 사람들이 크게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과 싫어함은 마음의 큰 단서다. 사람이 그 마음을 감추는 일이 많아 이를 추측하여 알기 어려우며, 선함과 악함도 모두 마음속에 있어서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한 가지 방법에 의해 사람들의 심정을 궁구하려면 예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 <<중용>>의 칠정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다. 중과 화를 극진하게 실현하면 천지의 질서가 바로잡히고 온갖 만물이 생장하여 번영한다.
오늘의 토론 내용(2022.10.5): 고봉의 마음 읽기[편집 | 원본 편집]
☞ 고봉은 무엇을 우려했던 것일까? 고봉의 편지 속에 숨겨진 그의 생각, 그의 마음을 읽어본다면?
○ 성리학의 논의가 너무 이론적으로 가는 데 대한 우려의 마음이 있었지 않을까?
=> 현실 속 인간의 마음, 경험적인 인간의 감정은 선한 감정과 악한 감정이 서로 혼재함. 선한 감정이 악한 감정으로, 그 반대로 되기도 하는데 사단을 칠정과 명확하게 구분해 놓을 수는 없지 않을까?
=> 이황이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을 너무 기계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 이황은 이의 우월성은 강조했는데 고봉은 이와 기의 본질적인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을까? 이는 기를 통해 현실속에서 작용될 수 있는 것인데 퇴계의 관점이 이(理)만 일방적으로 우월하다는 관점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 칠정 안에 사단이 포함되지 않으면, 사단을 칠정과 분리시켜 놓으면 악에서 선으로 가는 것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 퇴계가 너무 순선한 사단에만 너무 주목하고 있는 점을 고봉이 걱정한 것은 아닐까?
○ 사단만을 믿고서 자신의 감정을 선하다고만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어쩌나?
○ 선과 악의 상대성. 선악도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얼마나 선한지도 달라질 수 있음. 그런데 사단처럼 순선하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 이론상으로는 이와 기가 구분될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실제로 구분하기 어려운 것임. 고봉은 이 현실적 인간에 대한 관점을 놓아버려서는 안된다고 보지 않았을까?
○ 퇴계가 당시 대학자였던 만큼 그의 말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고봉은 더욱 사단 칠정에 대한 관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왜 사단, 칠정에 관한 논의가 중요했을까?
○ 사단칠정 논의를 비롯한 성리학의 논의는 조선시대에 실제 교화적인 측면에서 제도적, 사회적으로 반영되었기에 중요한 문제였음
○ 인간의 발전가능성의 방향에 대한 논의에서 사단칠정은 중요한 논의 주제였음
○ 감정을 배제하면 인간을 배제하는 것과 같음. 인간은 감정 없이 행동할 수 없음
실제 고봉이 퇴계의 편지에 답한 글들[편집 | 원본 편집]
☞ 이상호,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글항아리, 2011, 162~164쪽
1. 이(理)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가 주재하는 대로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이므로, 이와 기는 구분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물로 형성된 후에는 섞여 있어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 이가 기와 합해져서 세상의 다양한 변화나 사물들의 속성, 운동 등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는 '지나치거나 모자라는[과불급] 차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선한 본성이 일반 감정으로 드러날 때에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본성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함은 하늘이 사람에게 명한 본래의 모습이고 악함은 기가 합해져서 감정으로 드러날 때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감정과 일반 감정은 처음부터 결코 두 가지 뜻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양선생사칠리기왕복서>> <고봉상퇴계사단칠정설(高峰上退溪四端七情說)>
=> 고봉은 이미 드러난 양상에 주목했음. 이와 기가 합쳐져서 감정이나 운동, 사물과 같은 '존재의 형태'로 드러난 것은 이와 기의 구분이 어려움
=> 본성은 하늘의 이치[천리(天理)]이므로 모든 사람에게서 이것은 동일함. 그러나 사람의 감정에 따라 본성이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 본성이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 따라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것임. 고봉은 선과 악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 그 자체를 모두 일반 감정, 칠정이라고 보았음
- 고봉의 기본 관점
○ 세상 모든 것은 이와 기가 함께 있는 것. 사단, 칠정도 이와 기가 함께 하는 것인데 사단은 이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고 나누어 볼 수 없음. 이황의 말처럼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면 사단에는 기가 없고 칠정에는 이가 없게 됨
○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것임. 칠정 가운데 선한 것만을 뽑아내면 사단임
○ 성리학의 이기 개념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뿐이고 이는 불변의 원리임. 사단, 칠정의 모든 감정은 기의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뿐임. 사단을 움직일 수 없는 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없음
2. 만약 포괄적인 감정을 가지고 세밀하게 논의를 해보면 사단으로 드러난 것에도 도덕적으로 딱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사단 모두를 선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마땅히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마땅히 시비를 가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시비를 잘못 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 이(理)는 매우 미미한데 기가 드러나는 것은 강하기 때문에 이가 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드러나는 감정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감정에 불선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으며, 사단 역시 불선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는 사람들이 자세하게 살펴야 할 대목입니다. 만약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불선함이 없다고만 생각하면 '사람의 개인적 욕망'을 '하늘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병폐가 이기지 못할 정도로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선생사칠리기왕복서>> <고봉답퇴계논사단칠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