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박괘와 복괘로 생각해 보는 삶과 죽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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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筮] 둔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서는 깨어나서 기뻐하며 ‘처음에는 둔(屯)했으나 그 둔이 변하여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종당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음. 여기에서 둔괘는 어려움을 뜻하는 괘임. 하지만 복괘는 온통 음으로 춥고 어두웠던 시절에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양효의 새싹 하나가 피어오르는 괘로, 회복, 돌아옴을 의미함. 하지만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됨</br>
 
○ 1801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筮] 둔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서는 깨어나서 기뻐하며 ‘처음에는 둔(屯)했으나 그 둔이 변하여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종당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음. 여기에서 둔괘는 어려움을 뜻하는 괘임. 하지만 복괘는 온통 음으로 춥고 어두웠던 시절에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양효의 새싹 하나가 피어오르는 괘로, 회복, 돌아옴을 의미함. 하지만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됨</br>
 
○ 하지만 1801년 그해 10월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밀서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더 멀리 유배가게 됨</br>
 
○ 하지만 1801년 그해 10월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밀서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더 멀리 유배가게 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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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동안 수많은 저작을 남기게 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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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괘(復卦) 「단전」의 한 구절'''

2023년 10월 22일 (일) 23:25 판

삶의 흥망성쇠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 인간의 태어나고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역』의 흥망성쇠의 원리를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박괘(剝卦)와 복괘(復卦)

박괘+복괘.png


박괘(剝卦), 깎임

박괘.jpg


  • 괘의 순서: 현행본 『주역』의 23번째 괘
  • 박(剝)의 의미: 박괘의 ‘박(剝)’은 일반적으로 깎여서 떨어진다는 ‘박락(剝落)’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 이를 음양소식(陰陽消息: 음양이 깎이고 자라남)의 관점에서 설명하곤 함. 즉 음이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해서 양을 변화시켜 양이 깎여 떨어져나가는 상(象)으로 해석하는 것임

12벽괘.png

  • 박괘는 다섯 효가 음효로 이루어져 있어 소인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해석되기도 함. 양이 군자의 상징을 가진 데 반해 음은 소인의 상징을 지니고 있음
  • 박괘는 초효의 소인으로 상징되는 음효가 점점 이효, 삼효, 사효, 오효로 올라가면서 자라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며, 이는 소인의 세력이 강해져서 군자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임


박괘의 마지막, 상구 효사

박괘 상구.png

 上九(상구)는 碩果不食(석과불식)이니 君子(군자)는 得輿(득여)하고 小人(소인)은 剝廬(박려)리라.
 상구는 큰 과일은 먹지 않으니(큰 과일이 먹히지 않으니) 군자는 수레를 얻을 것이고 소인은 오두막집마저 허물어뜨릴 것이다.

=> 군자는 힘겨운 시기에도 큰 과일이 될 싹을 먹어 치우지 않고 기다림. 마침내 사람들의 신뢰와 여론을 얻고 명예를 얻게 됨. 소인은 그 반대임


복괘(復卦), 회복함

복괘2.png


  • 괘의 순서: 현행본 『주역』의 24번째 괘
  • 복(復)의 의미: 복(復)은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님. 「서괘전」에 복괘가 박괘(剝卦) 다음에 온 이유에 대해 “사물이 끝내 다 깎일 수만은 없으니 위에서 궁극에 달하면 아래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박괘 다음에 복괘로 받았다(物不可以終盡剝, 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했음
  • 참고: 유배지에서 다산의 『주역』꿈

☞ 김윤규, 「장기 유배기 다산 시의 성격」, 『동방한문학』 57권, 동방한문학회, 2013.12, 253~261쪽

○ 1789년 28세에 급제한 이후 1800년 정조(1776~1800)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조는 다산을 총애했으며,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각별한 군신관계를 지속했음
○ 왕의 전폭적인 신뢰 하에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정조의 특별한 총애와 다산이 지닌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게 됨. 특히 그는 당시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로 논란이 되고 있었으나 정조는 여전히 다산을 신뢰했음
○ 1800년 39세 때 끊이지 않는 비방과 질시를 잠시 피하기 위해 낙향해 있던 다산은 정조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됨. 이듬해 1801년 신유년, 신유박해와 함께 그는 인생의 고난의 시기를 마주하게 됨.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이에 호의적인 집단을 보호했던 정조의 죽음 이후, 정치적 숙청의 일환으로 천주교 신자와 그의 가족들을 처단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됨. 이 때 다산도 억울하게 귀양길에 오르게 됨
○ 1801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筮] 둔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서는 깨어나서 기뻐하며 ‘처음에는 둔(屯)했으나 그 둔이 변하여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종당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음. 여기에서 둔괘는 어려움을 뜻하는 괘임. 하지만 복괘는 온통 음으로 춥고 어두웠던 시절에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양효의 새싹 하나가 피어오르는 괘로, 회복, 돌아옴을 의미함. 하지만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됨
○ 하지만 1801년 그해 10월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밀서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더 멀리 유배가게 됨
○ 이후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동안 수많은 저작을 남기게 됨


  • 복괘(復卦) 「단전」의 한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