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겸괘, 진정한 겸손의 의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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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호 교수는 이에 대해 여기의 “군자”는 퇴계를 가르키며 “마치는 때가 되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다하여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퇴계는 평소 생활이 매사에 덕이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물러나 사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그러할수록 사람들은 더 그를 존경했음 | 신창호 교수는 이에 대해 여기의 “군자”는 퇴계를 가르키며 “마치는 때가 되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다하여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퇴계는 평소 생활이 매사에 덕이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물러나 사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그러할수록 사람들은 더 그를 존경했음 | ||
'''"군자의 죽음을 마칠 '종(終)'이라고 하고 소인의 죽음을 죽을 '사(死)'라고 한다."''' | '''"군자의 죽음을 마칠 '종(終)'이라고 하고 소인의 죽음을 죽을 '사(死)'라고 한다."''' | ||
− | 君子曰終(군자왈종), 小人曰死(소인왈사) -『예기(禮記)』 | + | 君子曰終(군자왈종), 小人曰死(소인왈사)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 |
* 퇴계의 사후 그는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벼슬을 받았고 도산서원은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게 됨. 세상을 하직하는 날 아침 퇴계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고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았다고 함. 평소 좋아하던 매화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으며 편안한 얼굴로 운명했다고 함 | * 퇴계의 사후 그는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벼슬을 받았고 도산서원은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게 됨. 세상을 하직하는 날 아침 퇴계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고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았다고 함. 평소 좋아하던 매화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으며 편안한 얼굴로 운명했다고 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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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겸괘(謙卦) 읽기''' = |
2023년 11월 19일 (일) 22:28 판
☞ 겸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긍정? 부정?
퇴계 이황(李滉, 1502~1571)과 주역
- 20세 때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주역을 읽다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 퇴계가 주역을 읽기 시작한 것은 1520년 경진년(중종 15) 20세때부터임
- 『퇴계선생연보(退溪先生年譜)』의 해당 기록
주역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하였다. 이때부터 항상 몸이 마르고 허약해지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 선생이 조사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초년에는 뜻은 가지고 있었지만, 나아갈 방향을 모른채 너무 지나치게 애를 쓰다가 몸이 마르고 허약해지는 병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 퇴계는 특히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배움을 중시했음. 퇴계는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을 했음. 한 글자 안에 담긴 의미를 정독하고 곱씹으며 그 지식과 지혜가 온전히 자기 마음속에 녹아들 수 있게 했음. 독서와 사색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독서법을 지향했음(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3/article_no/7121/ac/magazine 이치억, 퇴계선생의 학습법, 2015년 7월)
- 퇴계는 꾸준하게 주역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신의 살림집의 서실 당호 구절을 주역에서 따오기도 했음
- 퇴계는 1531년 신묘년(중종 26) 31세 때에 처음 마련한 자신의 살림집 지산와사(芝山蝸舍: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도산면사무소 위쪽 영지산(靈芝山) 북쪽 기슭 양곡(暘谷)에 위치)의 서실 당호를 ‘선보당(善補堂)’이라고 하였음. 여기서 ‘선보(善補)’라고 하는 말은 『주역』 「계사전」의 “허물이 없다는 것은 과실을 잘 보완하는 것이다(无咎者, 善補過也).”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임
- 퇴계 이황은 1554년 갑인년 54세 때에는 서울에 있으면서 조정의 명령을 받고 『역학계몽』을 연구했음
- 퇴계는 후에 주자의 역학계몽에 대한 해설서인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게 됨. 주희(1130~1200)가 주역의 성격으로 기본적으로 점으로서의 주역으로 본 데 반해 퇴계는 기본적으로 주역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을 의리적인 관점에서 보게 됨. 물론 주역이 점치는 책으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주역』의 성격을 점서에 주목하기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본 것임
퇴계 이황의 최후
☞ 신창호, 『함양과 체찰 :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미다스북스, 2010, 62~63쪽
- 퇴계가 노환으로 눕게되자, 제자인 조목(趙穆)이 점을 쳤는데, 지산겸(地山謙)이라는 괘가 나왔음
- 점괘는 『주역』 겸괘(謙卦)에 나오는 “군자가 마치는 때가 되었다.”라는 괘사였음
신창호 교수는 이에 대해 여기의 “군자”는 퇴계를 가르키며 “마치는 때가 되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다하여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퇴계는 평소 생활이 매사에 덕이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물러나 사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그러할수록 사람들은 더 그를 존경했음
"군자의 죽음을 마칠 '종(終)'이라고 하고 소인의 죽음을 죽을 '사(死)'라고 한다." 君子曰終(군자왈종), 小人曰死(소인왈사)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
- 퇴계의 사후 그는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벼슬을 받았고 도산서원은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게 됨. 세상을 하직하는 날 아침 퇴계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고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았다고 함. 평소 좋아하던 매화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으며 편안한 얼굴로 운명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