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한국문화 속 주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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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색바탕: 백색을 존중하는 백의민족을 나타냄</br> | ||
+ | ○ 태극: 우주만물의 근원이고 인간생명의 근원임. 인도(人道)의 극치가 인극(人極)이고, 인극이 곧 태극임. 우주의 중심이 나의 중심이고 나의 주체가 남의 주체임</br> | ||
+ | ○ 태극 일원 속에 홍색의 양(陽)과 청색의 음(陰)이 상하로 상대 화합되어 있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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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양인 건에서 소음인 리로 바뀌고 리에서 태음인 곤으로 성장하며, 곤에서 송양인 감으로 바뀌고 감에서 태양인 건으로 성장하여 무구하게 순환 발전함</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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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지만 이 외에도 다양한 설명이 존재함</br> | ||
2023년 12월 3일 (일) 16:05 판
-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주역의 문화적 영향력
=> 공자, 노자, 주자, 토정 이지함, 남명 조식, 퇴계, 라이프니츠, 칼 융, 헤세, 윤선도, 도연명 등 동서양 사상과 문화사의 주요 인물들이 주역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음
- 건축물에 나타난 태극과 음양 문양들
☞ 그림 출처: 『불교신문』2005.3.30일자
○ 학계에서는 중국의 태극도설이 들어오기 40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미 태극 도형과 음양 사상을 활용하고 있음을 밝혔음
○ 경주 감은사지 태극 문양은 주돈이의 태극도형보다 400여년 앞섰음
○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극문양이 사찰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음
- 참고: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太極圖)>
- 태극기
☞ 류숭국,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9, 514쪽
○ 백색바탕: 백색을 존중하는 백의민족을 나타냄
○ 태극: 우주만물의 근원이고 인간생명의 근원임. 인도(人道)의 극치가 인극(人極)이고, 인극이 곧 태극임. 우주의 중심이 나의 중심이고 나의 주체가 남의 주체임
○ 태극 일원 속에 홍색의 양(陽)과 청색의 음(陰)이 상하로 상대 화합되어 있음
○ 양이 위에 있고 음이 아래에 있는 이유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음의 위치를 표현한 것임
○ 건, 곤, 감, 리의 4괘는 8괘의 축약임
○ 건은 태양(太陽)으로 양이 가장 성(盛)한 방위에 배치되어 있고, 오른편 아래의 곤은 태음(太陰)으로 음이 가장 성한 방위에 배치되어 있음
○ 오른편 위의 감은 음중양(陰中陽)인 소양(少陽)으로 음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임
○ 왼편 아래의 리는 양중음(陽中陰)인 소음(少陰)으로 양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모습을 나타낸 것임
○ 태양인 건에서 소음인 리로 바뀌고 리에서 태음인 곤으로 성장하며, 곤에서 송양인 감으로 바뀌고 감에서 태양인 건으로 성장하여 무구하게 순환 발전함
○ 건은 하늘의 도로서 정의, 곤은 땅의 도로서 풍요, 감은 물의 성질로서 지혜, 리는 불의 성질로서 광명을 뜻함
○ 하지만 이 외에도 다양한 설명이 존재함
- 훈민정음 속 역학 원리
☞ 류승국,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9
☞ 이정호, 「한국역학의 인간학적 조명」, 『국제대학논문집』 제7집, 1979
『훈민정음 해례(解例)』 「제자해(制字解)」: “천지의 도는 하나의 음양오행뿐이다. 곤괘(坤卦)와 복괘(復卦) 사이가 태극이 되며 동(動)하고 정(靜)한 후에 음양이 되느니라."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坤復之間爲太極, 而動靜之後爲陰陽.
인간, 마음에 주목했던 한국역학
☞ 성이심 지음, 심의용 옮김, 『인역』, CommunicationBooks, 2013
☞ 장숙필, 「盤谷 成以心의 과 그 사상적 특징」, 『민족문화연구』 54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1
☞ 김학권, 「成以心의 『人易』에 나타난 實踐哲學으로서의 易學」, 『공자학』 제29호, 한국공자학회, 2015
- 성이심(成以心, 1682~1739)의 『인역(人易)』
○ 성이심이 태어난 때는 조선사회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큰 전쟁 이후 전반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던 때였음. 이에 대해 정치계, 학술계에서 본질적이고 진정성 있게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
○ 이 혼란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는 절의를 절대시하는 산당(山黨)과 현실론을 내세우는 한당(漢黨)으로 분화되기도 했고 이론적으로는 퇴율의 호발설과 기발일도설을 계승한 사칠논쟁이 논의의 본질을 넘어서 심화되었으며 또 복제를 중심으로 한 예설논쟁 및 기호학파내에서의 인물성동이논쟁이 새롭게 대두되기도 했음
○ 이 시대에 대해 성이심은 이렇게 말했음. “(시대의 운세가 자주 변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사람들의 마음과 지조가 생각 따라 변하여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이 없어지고 어지러워졌다. 이제 정신을 바로 잡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내 스스로 사리에 맞게 행함을 넓혀 가리니, 성인이 천지화육에 참여하면 하늘도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한 마음이 혹 잘못되면 백 사람의 눈물을 불러오는 것이니, 온 나라 백성이 모두 편안함이 한결같은 마음의 바람이다”
○ 성이심은 인간의 마음에 주목했음.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주위사람들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음. 그런 그가 쓴 책은 바로 ‘사람 인(人)’자를 쓴 『인역(人易)』이었음
“역(易)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변화인 천역(天易), 하나는 산가지로 상징된 죽역(竹易), 그리고 하나는 사람의 변화인 인역(人易)이다. 역의 도는 흩어지면 천하의 모든 일들에 있지만 모여지면 한 사람의 덕행에 달려 있다. 사람만이 그것을 신묘하게 밝혀낼 수 있으니 역이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산가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 하늘의 원리가 아무리 이 모든 사물과 일에 깃들어 있더라도 결국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음
- 성이심의 의의설(擬議說)
- 성이심(成以心, 1682~1739)의 『인역(人易)』
○ 성이심의 역학사상의 특징은 주역의 음양, 8괘, 64괘 등을 인간의 마음에 견주어 도식화하고 있다는 점임. 그는 음을 인간의 몸, 양을 인간의 마음에 견주어보았음. 그는 주역을 통해 우리 마음을 통해 우리 본성을 자각하고 몸을 통해 이를 실천하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보았음
○ 몸이 음이고 마음이 양인 이유는 『주역』에 땅에서 형체를 이루어진다(在地成形, 「계사전」)고 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과 형체를 이룬 것을 음과 연결시켰음. 인간은 땅 위에서 제각기 제 모습을 갖추며 자라나고 완성됨. 인간의 마음은 텅 비었지만 밝게 빛나며 천리가 갖추어져 있음.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양과 연결됨
○ 성이심은 군자는 경건하지 않음이 없으나 몸을 경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기』의 말을 들면서 몸을 경건하게 하지 못하면 그 뿌리인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음
○ 몸을 경건하는 하는 방법은 자기 입에서 내뱉는 말은 진실하고 믿음 있게 하고 모든 행동을 경건하게 하고 음식을 삼가고 절제하고 글자의 획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걸을 때 안정되게 하는 등 매 순간 걷고, 말하고 먹는 그 순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몸이 자신이 마주한 순간순간에 몰입할 수 있음을 중시하는 것임
○ 이는 마음에도 영향을 미침. 그는 하나에 집중해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되, 여러 가지 상황과 사물에 대응하면서도 미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을 처리하고 결정하는 매 순간을 경건함으로 하는 것임
=> 성이심은 ‘역’을 인간 심성의 발현에 따른 수양론적 도덕 문제 속으로 끌어들여 재구성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임. 이런 관심은 19세기 후반에 흥성에 살았던 박만경(1817~1898)이 저술한 『심역(心易)』에서도 그 유사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
- 한국역학의 창의적 응용, 이제마
☞ 이기복, 『동무 이제마(1837-1900)의 의학 사상과 실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학위논문, 2014
☞ 이경록, 「이제마의 의학론과 그 시대적 성격」, 『의사학』 제14권 제2호(통권 제27호), 2005
- 이제마(李濟馬 1837-1900)
○ 근대로의 이행기에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그가 속해있던 그룹만 보아도 그 당시를 다각로도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임
○ 1837년 조선의 함경도 함흥(咸興)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의 19대 후손으로 태어났음
○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서자로 태어났음. 그의 이름과 관련해서 유명한 일화가 있음
○ 그의 아버지 이진사는 원래 술이 약한 사람이었으나 어느날 향교에서 일을 보고 오다가 친구들을 만나 주막에서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음. 친구들은 이진사가 술이 취하자 주모에게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주모는 이진사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에게 딸을 주려고 했음
○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 충원공(忠源公)의 꿈에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달라.” 하고는 기둥에 매 놓고 가버렸음
○ 그 때 어떤 여인이 강보에 갓난아기를 싸 안고 와서 이진사님의 아기오니 받아달라 간청을 하자, 충원공은 큰 길조라 여기고 모자를 받아 들이도록 허락했음. 그리고 꿈에 제주도 말을 얻었다 하여 아기 이름을 제마(濟馬)라고 지었다고 함
○ 이제마가 서출이라는 신분적 차별대우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던 일화도 전해지는데 이제마가 집안 어른들 앞에서 족보에 올려주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렸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지만 총명했던 이제마를 가족들이 또한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짐
○ 이를테면 조부 이충원은 이제마를 총애하여 가솔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제마를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할 것을 선언하였고 임종 시에는 상당량의 재산을 손자인 이제마에게 미리 배분해 주었다고 함. 당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완화되어가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 이제마는 1875년(고종 12) 그의 나이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어 다음해에 무위별선(武衛別選) 군관(軍官)으로 입위(入衛)되었음
○ 1886년(고종 23)에 진해현감겸병마절도사(鎭海縣監兼兵馬節度使)에 제수되어, 이듬해 2월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9년 12월에 퇴임했음
○ 그가 어떤 관료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구절이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에 등장함. 이는 헌종(憲宗) 13년(1847) 1월부터 고종(高宗) 27년(1890) 3월까지 경상도 고성(固城)에 있던 통제영의 통제사(統制使)가 승정원(承政院)에 올린 장계(狀啓), 일종의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등록(謄錄)한 것으로, 진해 현감(鎭海縣監) 이제마(李濟馬)…정사를 종합하여 자상하게 하니, 그 뜻이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호하는 데 있었음. 상으로 근무 성적이 평가되어 있었음
○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1894년 4월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상하 2권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 책은 1893년 7월 13일에 쓰기 시작해서 잠시의 휴식도 없이 이듬해 1894년 4월 13일에 이르러 완성하였으며(東醫壽世保元 卷4 四象人辨證論 283쪽) 김영관(金永寬) 등 문인 7명이 1901년 6월 함흥군 栗洞契에서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이제마가 의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당시에 유행했던 괴질을 들 수 있음. 당대는 괴질 콜레라가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였으며 이제마도 주변의 친족들이 여러 질환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았음. 19세기에는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했음
○ 조선에서도 1821-22년 처음으로 괴질이 대유행하면서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고 이어서 1858년, 1859년, 1862년, 1886년에 몇 차례 더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음
○ 이제마의 저술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괴질(怪疾)에서 비롯한 증상으로 추정되는 병증들과 온역(瘟疫) 등을 여럿 다루고 있음
○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이제마의 근친들, 특히 여성들이 젊은 나이에 여럿 사망하였다는 사실임. 부친인 이반오(李攀五)가 부인을 네 명이나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마 자신도 세 번이나 혼인했음. 이렇듯 괴질, 병고, 단명이라는 삶의 실존 문제들에 이제마는 가까이 있었던 것임
○ 이제마는 무관으로 나가기 전 39세가 되는 을해(1875)년에 이미 의사로서 의학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음
○ 이제마가 46세가 되는 임오(1882)년에는 이미 사상인(四象人)의 심욕(心慾)과 성정(性情)에 대한 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으로 보임
○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의약 경험이 있었던 이제마는 지방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간간이 의학 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원 군수 시절에 이미 약국(藥局) 즉 의원(醫院)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정황이 보임
○ 근대로의 이행기에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그가 속해있던 그룹만 보아도 그 당시를 다각로도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임
○ 1837년 조선의 함경도 함흥(咸興)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의 19대 후손으로 태어났음
그는 서자출신에, 유학자로 불리면서도 의인(醫人)으로서 중인층에 속했으며, 변방인(邊方人), 무관(武官), 관료(官僚), 반족(班族) 등에 속하는 인물이었음
○ 이제마는 스스로를 “동국(東國)의 무관(武官)”이라는 의미에서 동무(東武)라고 칭했음
- 이제마의 사상의학
○ 당시 신흥종교가 발흥하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통해 서양과학이 소개되는 등 지적인 유연성과 역동성이 증가한 시기에 종래의 사상과 입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제마는 자신의 사유를 구체화하여 사상의학을 내놓게 됨
○ 이제마의 사상의학의 사상(四象)은 사실 주역에서 나오는 용어임. 일부 학자들은 당시 이제마가 주역(周易) 등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하면서 이제마의 사상학설(四象學說)이 유학계의 큰 발명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함
「계사전」의 태극에서 팔괘로의 언급 이런 까닭에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내고, 양의는 사상을 내고, 사상은 팔괘를 내니 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 이제마의 사상의학: 태양인(太陽人)·태음인(太陰人)·소양인(少陽人)·소음인(少陰人)으로 나누고 폐비간신(肺脾肝腎) 장기의 크기도 다르고 체형, 성품, 재주 등 일상의 모든 모습에서 구별된다고 보았음
○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당시 의료적 문제점을 해결하고 민중들을 구휼해 주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
○ 그는 『동의수세보원』에서 “궁항벽촌에서 갑자기 병에 걸리는 경우에는 한 가지 약재라도 쓰는 게 대책 없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백배 낫다“라고 했음
○ 당시 조선에서는 궁벽한 곳일수록 약재 수급이 곤란하였고 의학 지식은 어려워서 널리 전파되지 않았다 이제마는 약재 획득의 곤란함을 극복하기 위해 체질에 따른 단방(單方)이라도 권장하였고 의학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특유의 체질론을 제시하였던 것임
○ 그는 이러한 몸이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했음. 즉 인간의 감정이 각각 우리 몸의 신체부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임
○ 그는 타고난 장부의 편차에 따라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이 서로 상반된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음. 그러나 그 감정에서는 태양인은 소음인, 소양인과 대음인이 서로 반대 입장에 있다고 보았음
-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주역에서 발견한 마음의 중요성
☞ 임병학, 「『격치고, (格致藁)』에 나타난 이제마(李濟馬)의 역학적(易學的) 사유체계(思惟體系), 퇴계학보 제132권, 2012
이제마의 『격치고(格致藁)』: 주역에서는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여기에서 양의(兩儀)가 생성된다. 양의는 사상(四象)을 생성하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생성하며 팔괘는 길흉을 정하고 길흉은 대업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태극은 마음[心]이다 양의는 마음과 몸[心身]이다. 사상은 일, 마음, 몸, 사물[事心身物]이다 … 모두 통괄해서 이야기한다면 64괘가 모두 태극이요 64괘 가운데 32괘가 모두 건(乾)이며 8괘가 모두 마음[心]이니 단지 한 가지 생각만 고집해서 의심을 둘 필요는 없다.
○ 이제마 인체론에서 질병이란 바로 마음과 몸의 충돌을 가리킴. 특히 그는 심화(心火) 즉 불완전한 감정을 중요한 병인(病因)으로 지적하기도 했음
○ “모든 질병의 원인은 심화(心火)에서 생겨난다. … 상황에 맞춰 심화를 과도하게 쓰지 않는다면 천수를 누리지 않을 수 없다 화복(禍福)은 자초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수요(壽夭)도 자초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이제마, 『동무유고(東武遺稿)』)
현대미술과 주역의 만남
- 이응노와 주역
☞ 이응노의 추상 문자 시리즈, 주역 64괘차서도 온라인 전시 ☞ https://www.leeungnomuseum.or.kr/ 이응노 미술관
○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은 동양 예술을 전세계적으로 알린 화가임. 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음. 그가 태어난 집안 자체는 대대로 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문인 집안이었음. 10대때부터 수묵화와 사군자의 기초를 배웠고 1936년 33세 때에는 부인과 일본 유학을 떠나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점을 두루 공부했음. 1945년 3월 도쿄 공습이 시작되고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일본에 있던 친척들을 데리고 귀국하여 구향 홍성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됨. 3.1절을 기념하여 열린 제1회 단구미술원전에 <투쟁> 등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고 해방이후에는 홍익대 미술학부 주임교수가 되어 6·25 전쟁 전까지 동양화부를 지도하기도 했음. 6·25전쟁때 아들 이문세가 북한에 끌여가게 되었고 그는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스케치를 멈추지 않고 전시회를 열기도 했음. 1957년 54세 때 이응노가 프랑스의 한국인 유학생에게 보낸 그림을 본 프랑스 미술평론가 자크 자세뉴(Jacques Lassaigne)가 이응노 개인전을 파리에서 열고자 초청장을 보낸 것을 계기로 프랑스로 건너가게 됨. 1960년 57세 때 파리로 이주하여 유럽 미술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된다. 베르사유 세브르 지역에 아뜰리에를 마련하여 이곳에서 이응노는 콜라주, 도작기,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의 추상작품을 왕성하게 실험하게 됨
○ 이응노 화백은 한국의 전통, 민족정신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연구로서 창작적 동양화를 발전시키고자 했음. 이응노 화백은 이 민족정신에 대해 기백이 있어야 하고, 전통을 넘어서는 창작이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는 소박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음. 흥미로운 점은 그가 파리로 떠날 때의 목표가 “자신의 미술을 통해 한국의 미술을 서양인들에게 알리고 가르치겠다”는 것이었음. 전통적인 한지와 먹, 붓으로 한국미술이 현대미술을 서양인들에게 알리고 유럽에게 인정받는 것이었음
○ 이응노의 유럽인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응노 선생은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는 살아있는 창조정신을 가진 분이었다고 함. 그래서 이응노는 동양의 피카소라고 불렸음. 주변의 모든 존재로부터 창조적 영감을 얻고, 제자들에게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쳐주었던 분이었다고 함.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임. 밑바닥에 있을 때는 위로 끌어올려야 하고 그러면서 균형을 찾는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고 함. 그의 유럽인 제자들은 그렇게 이응노 화백으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 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철학, 이런 예술의 본질을 배우면서 하얀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서예를 배워갔(<KBS 인물현대사> 다큐)
○ 이응노 화백의 <주역64괘 차서도>는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노 화백이 파리로 돌아가 창작활동을 하면서 1974년에 제작한 것임. 동백림사건은 1967년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200여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한 사건으로 당시 이응노 화가를 비롯하여 윤이상 작곡가, 천상병 시인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음. 이응노 화백은 그의 외아들이 6·25때 행방불명이 됐는데 납북당해서 북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소식을 듣기 위해 동백림(동베를린의 한자 음차)의 북한 공관원을 만났던 것이 결국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음. 60대 중반의 나이에 1년 8개월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도시락을 화폭으로 삼고 고추장을 물감으로 대신하고 감옥에서 먹던 밥에 천 조각과 종이를 이기고 섞어서 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주역64괘 차서도>에 보이는 작품들에 대해 구글 아트 앤 컬쳐에서는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화의 원리로 파악하는 주역의 세계관에 익숙했다고 설명하고 있음. 내용적으로는 변화의 원리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주역의 원리를 표현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서예와 같은 방식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문자 추상의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의미를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평가되고 있음
○ 이응노는 한자 그 자체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고 보았음. 글자가 기호이면서도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임. 64괘를 글자로, 기호로, 의미로 담아낸 그의 작품 속에서 하나하나의 글자, 기호, 그림, 괘들은 율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
오늘의 조별 활동(2023.11.27)
☞ 한국 문화 속에서 주역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요? 주요 키워드들(최대한 많이)과 함께 간단한 내용을 아이캠퍼스 토론방에 올려주세요!(가능하면 자신이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 주제와 관련한 키워드를 찾아보면 좋겠음)
- 한국 문화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주역(周易) 관련 주제들 예시
1. 한국 대중문화(시, 소설, 영화, 음) 속 주역(周易) 2. 정치 뉴스 속 주역 3. 경제 뉴스 속 주역 4. 한국 건축과 주역 5. 전통문화와 주역 6. 종교와 주역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