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개설 노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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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이夷(무색)라고 부른다.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들어보고자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를 희希(무성)라고 부른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를 미微(무형)라고 부른다. 이들 세 가지는 각각 인간의 감각으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본래 이것들은 뒤섞여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윗부분이라고 해서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랫부분이라고 해서 어둡지도 않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길이 없다. 그것은 형태, 모습이 없는 비존재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형태가 없는 형태, 모습이 없는 모습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황홀(恍惚,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br> | ||
+ |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도덕경>> 14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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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황홀'하다고 한 것임</br> | ||
+ | ○ '형태가 없는 형태, 모습이 없는 모습' 등의 표현은 도의 불가사의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설명하는 도가 특유의 용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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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4일 (월) 23:59 판
노자사상의 중요성
- 동양철학의 균형을 지켜 준 또 하나의 축 <동양철학에세이>(김교빈, 이현구 지음, 동녘, 2021) 66쪽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도가 학파를 이루었습니다. 도가는 특히 공자와 맹자가 대표인 유가 사상과 대결하였습니다. ...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고, 도교는 민중의 의식 속에 '잡초와 같은 철학'으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은 단지 민간에서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계속 읽혔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나온 어떠한 학파의 저술보다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 노자가 전하는 삶의 지혜 <동양철학에세이>(김교빈, 이현구 지음, 동녘, 2021) 89쪽
"노자는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물처럼 겸허하게, 골짜기처럼 포용력 있게, 통나무처럼 본래 모습을 지키는 것, 즉 근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 노자는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가치들로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노자는 이것으로 거짓으로 치닫는 분열된 세상의 도도한 흐름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노자는 자기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포용하여 사랑할 것, 둘째 요즘을 단단히 지킬 것, 셋째 천하의 앞에 나서지 말 것입니다.
고전 중의 고전
- <<노자>>라는 책, 노자라는 사람
○ 노자가 <<노자>>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니라 B.C.350~B.C.200년 경 사이에 집단 작업으로 이루어진 저작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
○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과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
○ <<노자>>는 5천자가 조금 넘는 분량임
○ <<노자>>를 <<도덕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앞부분 상편이 '도경(道經)', 뒷부분 하편이 '덕경(德經)'이기 때문임
○ 한나라 때 마왕퇴 묘에서 비단에 쓰인 <<노자>>가 발굴되었음. 이를 '백서 노자'라고 함. 백서 <<노자>>에는 상하편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음
☞ 마왕퇴 위치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
- 공자의 도
○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온 천하게 미치게 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수 있다고 보았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가르쳤음
○ 공자가 강조한 도덕은 큰 도가 무너지고 가정이 불화하며 나라가 어지럽게 된 뒤에 그것을 수습하려는 것이었음
☞질문: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진짜 그게 문제일까? 도덕이 회복되면 사람들의 삶이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오히려 뭘 하려고 하는 인위적인 노력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질문: 조장(助長, 도울 조(助), 자라날 장(長))이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아나요?
○ 참고: <<맹자>>에 나오는 조장 이야기
송나라 사람 중에 벼의 싹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것을 들어올려 준 사람이 있었다.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돌아와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매우 피곤하구나. 내가 벼의 싹이 자라도록 도와주었다[조장(助長)]."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아들이 달려나가서 보았더니 벼의 싹이 말라 있었다. -<<맹자>> <공손추 상>
☞ 생각해보면 자연은 그대로 내버려둬도 대체로 잘 자라난다. 그런데 인간만은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 걸까? 인간은 자연에 속하지 않는 것인가?
- 노자의 도
모기가 물어대면 밤새 잘 수가 없다. 지금 인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귀찮게 인심(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혀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저절로 두껍고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은 저절로 늘어서 있고 초목은 본래 종류가 여럿이다. 거기에 다시 인의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북을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태평광기>>
○ 노자의 도
- 인간에 대해 어떤 자야의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일에 대해 무정하고 냉담함
-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인이니 악인이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음
- 공자의 도에 대해 노자의 도가 갖는 의미
○ 공자를 비롯한 초기 유가사상은 오로지 현실적 문제, 즉 사회적 윤리, 도덕에 그 관심을 집중하였고, 세계의 근원, 죽음,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음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아직 사람 섬기는 것도 잘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다시 “죽음에 대해 묻겠습니다.”고 묻자,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고 말하였다. -<<논어>> <선진>
공자는 괴이한 일과 힘쓰는 일과 문란한 일과 귀신에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논어>> <술이>
☞질문: 하지만 세상의 근원, 우리 존재가 왜 존재하는지 등에 관한 질문을 아예 떨쳐낼 수 있을까?
○ 반면 도가 사상가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이 세계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했음. 중국철학에서 세계의 근원, 세계의 원리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규명하고자 시도한 것임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는다. <<도덕경>> 42장
이것이 진정한 도道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도는 절대불변의 진정한 도가 아니며, 이것이 진정한 말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말은 절대적 진리의 말이 아니다. 무명의 상태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시작으로서의 진정한 도이며, 이윽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유명의 상태는 만물을 생산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덕경>> 1장
☞ 무명(無名): 명(名: 언어,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상태를 초월한 경지. 진정한 도의 다른 이름
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이夷(무색)라고 부른다.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들어보고자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를 희希(무성)라고 부른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를 미微(무형)라고 부른다. 이들 세 가지는 각각 인간의 감각으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본래 이것들은 뒤섞여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윗부분이라고 해서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랫부분이라고 해서 어둡지도 않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길이 없다. 그것은 형태, 모습이 없는 비존재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형태가 없는 형태, 모습이 없는 모습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황홀(恍惚,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도덕경>> 14장
○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 '황홀'하다고 한 것임
○ '형태가 없는 형태, 모습이 없는 모습' 등의 표현은 도의 불가사의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설명하는 도가 특유의 용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