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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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 단군 민족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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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 말 단군과 민족주의의 결합''' ==
  
 
☞ 서영대, <근대 한국의 단군 인식과 민족주의>, <<동북아역사논총>> 20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br>
 
☞ 서영대, <근대 한국의 단군 인식과 민족주의>, <<동북아역사논총>> 20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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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조선시대에 단군은 기자보다 낮게 평가되었음. 조선 역사서에서 단군의 시대는 미개한 시대였고 기자에 와서 비로소 문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공적에서는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t/view.do?levelId=ht_001_0020_0020 기자]가 더 훌륭하다고 여겨졌음
 
* 하지만 조선시대에 단군은 기자보다 낮게 평가되었음. 조선 역사서에서 단군의 시대는 미개한 시대였고 기자에 와서 비로소 문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공적에서는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t/view.do?levelId=ht_001_0020_0020 기자]가 더 훌륭하다고 여겨졌음
 
* 하지만 일제가 한국의 국권 침탈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인 1900년대 중후반에 '단군의 자손'이란 언급이 더 강조되게 됨. 일제의 국권 침탈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했음
 
* 하지만 일제가 한국의 국권 침탈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인 1900년대 중후반에 '단군의 자손'이란 언급이 더 강조되게 됨. 일제의 국권 침탈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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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국가는 일종의 대가족으로 이해되고 있었음. 국가의 중심이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민족이 곧 대가족임. 즉 민족은 핏줄이 같은 혈연공동체라는 것임. 그리고 혈연공동체는 조상의 뿌리가 되는 시조의 존재로 말미암아 성립될 수 있음. 단군만큼 확실한 상상의 근거를 제공하는 시조는 찾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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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군은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시조임. 따라서 단군은 한국사의 출발점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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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군은 유구성의 표상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기원전 2300년 경이며 중국에서는 요 임금이 있을 때라고 전해짐. 유교경전인 <<서경>>에서는 요에서부터 중국사를 서술하고 있음. 그렇다면 요와 동시대 인물인 단군에 의해 한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사가 중국사 못지 않게 유구함을 의미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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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군이 하늘과 직결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단군은 천손에 의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자생적인 독자성을 가진 것임을 보여주며, 아울러 국가와 민족의 신성성을 뒷받침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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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군은 한국사회의 동질성의 표상임. 한국사에서는 많은 국가나 왕조들이 흥망을 되풀이 했지만 이들 국가나 왕조는 단군에서 비롯된 역사 전통을 계승했다는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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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이후 개화기 교과서에서는 단군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통일하고 개국 기년을 사용했음. 당시 신문들은 1905년을 단기 4238년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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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단군의 강조는 구한말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민족공동체 의식을 확립하고 민족 결속에 일조했지만 국권 침탈 이후 총독부 당국에 의해 중단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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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단군 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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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화, <근대 단군민족주의의 계승과 단군운동: 한말에서 임시정부 수립까지>, <<단군학연구>> 제39집, 201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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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3%C2%B71_%EC%9A%B4%EB%8F%99 3.1운동기] 1919년에 57개의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는데 이 중 일부 선언서에서는 단군의식이 표출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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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 선언서에서는 단기를 표기하여 단군기원의 민족의식을 드러냈으며 우리 민족인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이라는 근거하여 일본 식민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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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이후 1919년 4월 상해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9E%84%EC%8B%9C%EC%A0%95%EB%B6%80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 상해에는 신규식을 중심으로 박은식, 신채호, 조성황 등의 인물들이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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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수립후 1919년 11월 25일 처음으로 [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C%B2%9C%EC%A0%88 개천절] 기념식을 맞이하며 내무총장이었던 이동녕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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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일은 내외지(內外地)를 막론하고 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날이라. 그러나기쁜 중에도 나의 원하고 축하하는 바가 세 개 있으니, (一)우리의 시조를 알게 됨을 축함이라. 이전시대에는 중국의 명현(名賢)만 알고 자국의 시조를 알지 못하던바, 금일 이와 같이 시조의 기념일을 당하여 우리의 시조가 우리를 위하야 얼마나 진력하셨음을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한 혈통의 민족임을알아 상친상애(相親相愛: 서로 친하고 서로 사랑함)의 정이 더욱 심후케 되니 이것이오. (二)국가라는 것을 알게됨을 축하함이오. (三)정부와 국민이 회합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함이니, 전에는이같이 정부와 국민이 합동하야 경축한 적이 없었는데 금일이 갓치 회합(會合)됨은가장 환희하고 축하는 바라. 오직 유감된 것은 이러한 경축을 본국땅에서하지 못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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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신문>> 1919.11.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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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의 개천절 행사는 정부수립이라는 민족적 성과를 단군과 연결하고 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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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10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특수사관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사발전의 한 단계(농업공산체 붕괴 단계)를 반영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보았음

2022년 11월 27일 (일) 22:39 판

한국 근대 단군 민족주의

구한 말 단군과 민족주의의 결합

☞ 서영대, <근대 한국의 단군 인식과 민족주의>, <<동북아역사논총>> 20호, 동북아역사재단, 2008

  • 단군의 존재는 한국사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이전부터 중시되고 있었음. 특히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그 존재는 더욱 뚜렷해짐. <<삼국유사>>, <<제왕운기>>와 같은 고려시대 역사서에서 한구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시조로 언급되었음. 그 이유는 역사공동체라는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몽골의 침입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음. 단군은 한국사의 근원이며 삼국이든 고려든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을 강조함으로써 역사공동체의 의식을 뒷받침하고 고려사회 내부의 결속을 도모했음

☞ 참고: 고려시대 고구려 계승 의식 vs 신라 계승 의식

  • 조선시대로 오면서 국가 차원에서 조선의 시조임을 인정하고 단군을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삼았음

☞ 참고: 고전종합DB 속 단군

  • 하지만 조선시대에 단군은 기자보다 낮게 평가되었음. 조선 역사서에서 단군의 시대는 미개한 시대였고 기자에 와서 비로소 문명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공적에서는 기자가 더 훌륭하다고 여겨졌음
  • 하지만 일제가 한국의 국권 침탈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인 1900년대 중후반에 '단군의 자손'이란 언급이 더 강조되게 됨. 일제의 국권 침탈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했음
  • 당시 국가는 일종의 대가족으로 이해되고 있었음. 국가의 중심이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민족이 곧 대가족임. 즉 민족은 핏줄이 같은 혈연공동체라는 것임. 그리고 혈연공동체는 조상의 뿌리가 되는 시조의 존재로 말미암아 성립될 수 있음. 단군만큼 확실한 상상의 근거를 제공하는 시조는 찾기 어려움

1. 단군은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시조임. 따라서 단군은 한국사의 출발점임
2. 단군은 유구성의 표상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기원전 2300년 경이며 중국에서는 요 임금이 있을 때라고 전해짐. 유교경전인 <<서경>>에서는 요에서부터 중국사를 서술하고 있음. 그렇다면 요와 동시대 인물인 단군에 의해 한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사가 중국사 못지 않게 유구함을 의미함
3. 단군이 하늘과 직결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단군은 천손에 의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자생적인 독자성을 가진 것임을 보여주며, 아울러 국가와 민족의 신성성을 뒷받침함
4. 단군은 한국사회의 동질성의 표상임. 한국사에서는 많은 국가나 왕조들이 흥망을 되풀이 했지만 이들 국가나 왕조는 단군에서 비롯된 역사 전통을 계승했다는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음

  • 1905년 이후 개화기 교과서에서는 단군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통일하고 개국 기년을 사용했음. 당시 신문들은 1905년을 단기 4238년이라고 했음
  • 이처럼 단군의 강조는 구한말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민족공동체 의식을 확립하고 민족 결속에 일조했지만 국권 침탈 이후 총독부 당국에 의해 중단되게 됨


3.1운동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단군 계승

☞ 이숙화, <근대 단군민족주의의 계승과 단군운동: 한말에서 임시정부 수립까지>, <<단군학연구>> 제39집, 2018

  • 3.1운동기 1919년에 57개의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는데 이 중 일부 선언서에서는 단군의식이 표출되게 됨
  • 이들 선언서에서는 단기를 표기하여 단군기원의 민족의식을 드러냈으며 우리 민족인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이라는 근거하여 일본 식민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음
  • 3.1 운동 이후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 상해에는 신규식을 중심으로 박은식, 신채호, 조성황 등의 인물들이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졌음
  •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수립후 1919년 11월 25일 처음으로 개천절 기념식을 맞이하며 내무총장이었던 이동녕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금일은 내외지(內外地)를 막론하고 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날이라. 그러나기쁜 중에도 나의 원하고 축하하는 바가 세 개 있으니, (一)우리의 시조를 알게 됨을 축함이라. 이전시대에는 중국의 명현(名賢)만 알고 자국의 시조를 알지 못하던바, 금일 이와 같이 시조의 기념일을 당하여 우리의 시조가 우리를 위하야 얼마나 진력하셨음을 생각하고, 동시에 우리 한 혈통의 민족임을알아 상친상애(相親相愛: 서로 친하고 서로 사랑함)의 정이 더욱 심후케 되니 이것이오. (二)국가라는 것을 알게됨을 축하함이오. (三)정부와 국민이 회합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함이니, 전에는이같이 정부와 국민이 합동하야 경축한 적이 없었는데 금일이 갓치 회합(會合)됨은가장 환희하고 축하는 바라. 오직 유감된 것은 이러한 경축을 본국땅에서하지 못함이라.
 -<<독립신문>> 1919.11.27일자

=> 임시정부의 개천절 행사는 정부수립이라는 민족적 성과를 단군과 연결하고 있음

  •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특수사관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사발전의 한 단계(농업공산체 붕괴 단계)를 반영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