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이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An_SW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96번째 줄: 96번째 줄:
 
   5. '''어떤 이가 물었다. "사람의 성은 본래 모두 선하지만 사특한 정이 어둡게 한다'고 하니 감히 묻습니다. 성인의 성도 다시 기호와 욕심 때문에 혼탁해지게 됩니까?" 내가 대답했다. "다시 혼탁해지지 않는다. 정은 본래 사특한 것이고 망령된 것이다. ... 성인은 이미 그 성을 회복했으므로 정의 사특함을 알면 사특함은 이미 밝음에 의해 깨우쳐지게 된다. 깨우치면 사특함이 없어지니 사특함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갔는가?'''</br>
 
   5. '''어떤 이가 물었다. "사람의 성은 본래 모두 선하지만 사특한 정이 어둡게 한다'고 하니 감히 묻습니다. 성인의 성도 다시 기호와 욕심 때문에 혼탁해지게 됩니까?" 내가 대답했다. "다시 혼탁해지지 않는다. 정은 본래 사특한 것이고 망령된 것이다. ... 성인은 이미 그 성을 회복했으므로 정의 사특함을 알면 사특함은 이미 밝음에 의해 깨우쳐지게 된다. 깨우치면 사특함이 없어지니 사특함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갔는가?'''</br>
 
   問曰:「人之性,本皆善而邪情昏焉;敢問聖人之性,將復為嗜欲所渾乎?」曰:「不復渾矣!情本邪也、妄也,邪妄無因,人不能復;聖人既復其性矣,知情之為邪;邪既為明所覺矣,覺則無邪,邪何由生也?」(「복성서(復性書)」)
 
   問曰:「人之性,本皆善而邪情昏焉;敢問聖人之性,將復為嗜欲所渾乎?」曰:「不復渾矣!情本邪也、妄也,邪妄無因,人不能復;聖人既復其性矣,知情之為邪;邪既為明所覺矣,覺則無邪,邪何由生也?」(「복성서(復性書)」)
 +
 +
 +
  6. '''물의 성은 맑은 것인데 그 혼탁하게 하는 것은 모래와 진흙이다. 그 혼탁할 때라도 성이 전혀 없겠는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으면 모래와 진흙은 스스로 가라앉아서 청명한 본성이 천지를 비추게 되지만 이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혼탁한 때에도 성은 본래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며 그것을 회복하는 경우에도 성이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니 사람의 성도 물과 같은 것이다.'''</br>
 +
  水之性清澈,其渾之者沙泥也;方其渾也,性豈遂無有耶?久而不動,沙泥自沉;清明之性鑒於天地,非自外來也;故其渾也,性本勿失;及其復也,性亦不生;人之性,亦猶水之性也。(「복성서(復性書)」)
 +
 +
 +
[[분류: 유학의 인간본성론]]

2023년 5월 3일 (수) 17:23 판

이고(李翺 774?~836)라는 인물

☞ 김용남, 『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네이버 탑재 『중국역대인명사전』 참조

  • 한유(768~824)의 제자
  • 한유와 함께 송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됨
  • 한유가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불교 이론과 수양 방법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평가받음
  • 당시 특별한 인맥이나 기득권을 지니지 못했던 유학자들은 대개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고 이고 역시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나아갔음
  • 그의 나이 20대 중반(25~27세 무렵)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음. 안록산의 난 이후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는 급선무의 과제였음. 동요하는 민심을 잠재우고 불교가 아닌 유교로 부응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음
  • 성격이 강직하고 급해 의론할 때 피하는 게 없어서 권력자들이 그의 학문은 존중했지만 과격한 것을 싫어해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음. 나중에 ‘중서사인’이라는 관직까지 올랐음. 이 관직은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여(익명) 장관과 차관급인 중서령과 중서시랑이 이를 읽고 다양한 의견을 취합해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했음. 그렇게 해서 국가의 주요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직책이었음


이고의 주요 철학적 주제: 복성(復性: 본성 회복하기)

☞ 김용남, 『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68쪽
☞ 원문출처: https://zh.wikisource.org/wiki/%E5%BE%A9%E6%80%A7%E6%9B%B8

  • 이고의 존재 이유는 성인이 되는 데 있었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욕망의 삶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이 극복되는 것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임. 행봉한 삶은 곧 순수한 본성의 삶을 살 때만 가능하기 때문임. 이것이 이고의 복성론의 핵심임
  • 이고의 「복성서(復性書)」는 이러한 이고의 복성론의 핵심을 담고 있음
 1.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성(性) 때문이고, 사람이 자기 성(性)을 미혹시키는 것은 정(情) 때문이다.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 일곱 가지는 모두 정의 작용이다. 정으로 이미 어두워지면 성은 숨어버리지만 성의 허물은 아니다. 칠정이 순환하여 교대로 오기 때문에 성이 충만해질 수 없는 것이다. 물이 혼탁하게 되면 그 흐름도 맑지 않게 되고, 불이 연기를 내게 되면 그 빛은 밝지 않게 되지만, 그것은 물과 불이 맑고 밝게 하는 데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래가 섞이지 않으면 흐름은 곧 맑아지고, 연기가 무성하지 아니하면 빛은 곧 밝아진다. 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은 충만할 것이다.
人之所以為聖人者,性也;人之所以惑其性者,情也。喜、怒、哀、懼、愛、惡、欲,七者皆情之所為也,情旣昏,性斯匿矣;非性之過也,七者循環而交來,故性不能充也。水之渾也,其流不清;火之煙也,其光不明;非水、火清明之過,沙不渾,流斯清矣;煙不鬱,光斯明矣;情不作,性斯充矣。(「복성서(復性書)」)
 생각해 보면.. 파도는 왜 치는가? 그것이 바다의 본성인가? 원래 바다는 잔잔한가 요동치는가? 인간의 본성은 원래 고요한가 요동치는가?

바다.png

바다+바람.png

바다+감정.png


  • 이고가 본 성과 정의 문제

이고+성정(1).png

이고+성정(2).png


한유와 이고의 관점의 차이

☞ 이원석, 「한유의 성삼품설 연구」, 『대동철학』 제53집, 대동철학회, 2010

  子曰(자왈) 性相近也(성상근야)나 習相遠也(습상원야)니라
  공자가 말했다. "사람의 성(性, 성품)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 
  -『논어』「양화(陽貨)」  


  • 한유의 해석
 앞에서는 “본성이 서로 가깝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습관에 의해 상지가 되거나 하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뒤에서는 “상지(上智: 최고로 지혜로운 사람)와 하우(下愚: 최고로 어리석은 사람)가 변하지 않는다[唯上智與下愚不移]”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습관에 의해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가 상반된다. 선대 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궁구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편(인용자 주: 「季氏」편)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생이지지(生而知之)]는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학이지지(學而知之)]는 그 다음이며, 고생고생해서[곤이학지(困而學之)] 배우는 사람은 다시 그 다음이다. 고생스러워도 배우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가장 아래에 처한다”라고 했으니 여기의 두 구절과 함께 보면 아울러 분명해질 것이다.
韓曰, 上文云, 性相近, 是人可以習而上下也. 此文云, 上下不移, 是人不可習而遷也. 二義相反, 先儒莫究其義. 吾謂, 上篇云, 生而知之, 上也, 學而知之,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與此篇二義, 兼明焉.”(한유, 이고, 「論語筆解」 )

=> 한유는 인간의 본성을 상, 중, 하의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공자의 "性相近(성상근) 習相遠(습상원)의 의미를 이해했음


  • 이고의 해석
 사람의 본성은 원래 고요하다는 면에서 서로 가깝지만, 움직임에 이르게 되면 외물에 의해 자극받아 올바른 것도 있고 사악한 것도 있게 된다. 움직여서 올바르다면 상지(上智)이고 움직여서 사악하다면 하우(下愚)이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감정과 본성 두 가지를 잊게 될 것이다. … 아성(亞聖, 안연) 이하는 본성은 가깝고 습관은 멀며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수만 가지로 다르다. 공자의 “고생스러워도 배우지 않는다”, “하우는 변화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배우는 이들을 권면하기 위한 말이었다.
謂人性本相近於静, 及其動, 感外物, 有正有邪. 動而正則爲上智, 動而邪則爲下愚. 寂然不動, 則情性兩忘矣. … 亞聖而下, 性習近遠, 智愚萬殊. 仲尼所以云, 困而不學, 下愚不移者, 皆激勸學者之辭也. (한유, 이고, 「論語筆解」 )

=> 이고는 性相近(성상근: 본성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이 본래 고요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習相遠(습상원: 습관이 서로 멀다)는 것은 고요한 본성이 외물의 자극에 응하여 서로 다른 감정을 내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보았음. 그래서 어떤 사람의 본성이 올바로 반응할 경우 그 사람은 상지가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은 하우가 됨. 이고는 공자가 고생스러워도 배우지 않는 사람과 하우를 상정했던 것은 상지와 하우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는 이들을 경계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함


이고의 「복성서(復性書)」 속 인간 본성[성(性)]과 감정[정(情)]의 관계와 문제

☞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2011
☞ 김용남, 『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68쪽
☞ 원문출처: https://zh.wikisource.org/wiki/%E5%BE%A9%E6%80%A7%E6%9B%B8

 2. 성과 정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성이 없으면 정이 생겨날 곳이 없다. 정은 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정이 저절로 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으로 인해 정이 되는 것이다. 성도 성 그 자체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으로 인해 밝아지는 것이다. 성은 하늘이 명한 것이다. 성인(聖人)은 그 성을 얻어서 미혹되지 않은 자이다. 정이라는 것은 성이 발동한 것이며 일반 사람들은 그 정에 빠져서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性與情不相無也,雖然無性則情無所生矣,是情由性而生;情不自情,因性而情;性不自性,由情以明。性者,天之命也,聖人得之而不惑者也;情者,性之動也,百姓溺之而不能知其本者也。(「복성서(復性書)」)


 그렇다면 어떻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나?


 3. 어떤 이가 말했다. "사람들이 어두워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본성을 회복하려고 할 때에는 분명 점진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니 그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이 생기지 않는다. 정이 이미 생기지 않으면 바른 생각이 된다. ... 고요해졌을 때[정(靜)] 마음에 본래 생각기 없음을 아는 것이 재계이다."
或問曰:「人之昏也久矣,將復其性者必有漸也,敢問其方?」曰:「弗思弗慮,情則不生;情既不生,乃為正思;正思者,無慮無思也。... 方靜之時,知心無思者,是齋戒也」(「복성서(復性書)」)

=> 생각의 제거. 악한 감정은 생각에서 생겨남. 악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함
=> 맹자의 부동심(不動心)

 맹자의 제자인 공손추가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 경상(卿相)의 높은 지위에 오르셔서 도(道)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닐세. 나는 40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네.[부동심(不動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4. 정은 성의 사특함이다. 그 사특함을 알게 되면 사특함은 본래 없었던 것이 되니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게 되어 사특한 생각은 저절로 없어지고 오직 성만 밝게 비추어질 것이니 사특함이 어디에서 생겨나겠는가?
情者,性之邪也,知其為邪,邪本無有,心寂然不動,邪思自息,惟性明照,邪何所生?(「복성서(復性書)」)

=> 진래 교수는 이고가 고요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를 추앙한 것은 그가 도가와 불교의 정신 생활을 흡수한 것과 관련 있다고 보았음


 5. 어떤 이가 물었다. "사람의 성은 본래 모두 선하지만 사특한 정이 어둡게 한다'고 하니 감히 묻습니다. 성인의 성도 다시 기호와 욕심 때문에 혼탁해지게 됩니까?" 내가 대답했다. "다시 혼탁해지지 않는다. 정은 본래 사특한 것이고 망령된 것이다. ... 성인은 이미 그 성을 회복했으므로 정의 사특함을 알면 사특함은 이미 밝음에 의해 깨우쳐지게 된다. 깨우치면 사특함이 없어지니 사특함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갔는가?
問曰:「人之性,本皆善而邪情昏焉;敢問聖人之性,將復為嗜欲所渾乎?」曰:「不復渾矣!情本邪也、妄也,邪妄無因,人不能復;聖人既復其性矣,知情之為邪;邪既為明所覺矣,覺則無邪,邪何由生也?」(「복성서(復性書)」)


 6. 물의 성은 맑은 것인데 그 혼탁하게 하는 것은 모래와 진흙이다. 그 혼탁할 때라도 성이 전혀 없겠는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으면 모래와 진흙은 스스로 가라앉아서 청명한 본성이 천지를 비추게 되지만 이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혼탁한 때에도 성은 본래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며 그것을 회복하는 경우에도 성이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니 사람의 성도 물과 같은 것이다.
水之性清澈,其渾之者沙泥也;方其渾也,性豈遂無有耶?久而不動,沙泥自沉;清明之性鑒於天地,非自外來也;故其渾也,性本勿失;及其復也,性亦不生;人之性,亦猶水之性也。(「복성서(復性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