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스톤 디자인: 명륜동 동네탐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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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대학의 벽을 따라 흘렀던 「서반수」(西泮水)와 성균관대학 정문 앞의 「동반수」(東泮水)는 「반궁천」으로 만나 지금의 대학로까지 이어졌음. 서반수와 동반수 양 갈래 물길의 발원지는 성균관대학교 뒤편 응봉임. 이 응봉은 동궐인 창덕궁을 품고 있는 배산임수의 봉우리이기도 함. 응봉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러 갈래의 물길로 나뉘어 한양의 곳곳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됨</br>
 
☞ 성균관대학의 벽을 따라 흘렀던 「서반수」(西泮水)와 성균관대학 정문 앞의 「동반수」(東泮水)는 「반궁천」으로 만나 지금의 대학로까지 이어졌음. 서반수와 동반수 양 갈래 물길의 발원지는 성균관대학교 뒤편 응봉임. 이 응봉은 동궐인 창덕궁을 품고 있는 배산임수의 봉우리이기도 함. 응봉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러 갈래의 물길로 나뉘어 한양의 곳곳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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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수) 07:48 판

1. 성균관

☞ 성균관은 다른 말로 '반궁(泮宮)'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제후국의 학교를 의미함. '반궁'에는 반달 모양의 연못인 '반수(泮水)가 흘렀음. 공자와 성현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자 국가의 인재를 기르는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반수를 통해 주변 지역과 공간적으로 구분되었음

  • 반궁도: 옛날 성균관의 모습을 그린 그림

반궁도.png

☞ 그림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과 반촌』, 2019

아래의 반수 설명&그림 출처: 서울시 홈페이지

☞ 성균관대학의 벽을 따라 흘렀던 「서반수」(西泮水)와 성균관대학 정문 앞의 「동반수」(東泮水)는 「반궁천」으로 만나 지금의 대학로까지 이어졌음. 서반수와 동반수 양 갈래 물길의 발원지는 성균관대학교 뒤편 응봉임. 이 응봉은 동궐인 창덕궁을 품고 있는 배산임수의 봉우리이기도 함. 응봉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러 갈래의 물길로 나뉘어 한양의 곳곳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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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탕평비(蕩平碑)

○ 1742년(영조 18년)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진 비석. ‘탕평(蕩平)’이란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온 것으로,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참고: 한국일보 <탕평비(蕩平碑) 단상>

탕평비.png

☞ 그림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과 반촌』, 2019

탕평비 앞면

 周而弗比(주이불비) 乃君子之公心(내군자지공심) 比以弗周(주이불주) 寔小人之私意(시소인지사은)
 두루하며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고 치우치며 두루 하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子曰(자왈) 君子(군자)는 周而不比(주이불비)하고 小人(소인)은 比以不周(비이불주)니라.
 군자는 두루 통하면서도 편파적이 아니며 소인은 편파적이면서도 통하지도 않는다.
 (『논어』 「위정(爲政)」)

탕평비 뒷면

 황조 승정 기원 후 115년째 임술년 봄 3월 26일 직접 써서 반수교 옆에 세우라 명하다. 
 위 8자는 성인의 가르침이요, 아래의 12자는 
 아! 지금의 다음 세대를 힘쓰게 하는 뜻이다


  • 하마비(下馬碑)

하마비.jpg

○ 말에서 내려 걸어감으로써 예의를 표시하라는 문구를 새겨서 궐문(闕門) · 능묘(陵廟) · 문묘(文廟) · 서원(書院) 등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
○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비석의 표면에 적혀 있음. 각 궁궐의 정문 밖,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 홍살문에 하마비를 세웠음
○ 왕이나 장군 · 고관 ·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의에 합당했기 때문
참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하마비 설명


  • 성균관 전경

성균관전경.png


  • 대성전(大成殿)

대성전.png

○ 대성전은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셔놓은 문묘(文廟)의 정전(正殿)임. 중국 원(元)나라 성종(成宗) 때(1307),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대성(大成)은 거기에서 연유한 명칭임. ‘대성전(大成殿)’이라는 현재의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직접 쓴 글씨임
○ 대성전에는 현재 공자를 포함하여 모두 39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제사의식인 석전(釋奠)을 거행함.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위패는 공자와 4명의 성인(聖人), 공자의 제자 10명의 철인(哲人), 송나라의 6명의 현인(賢人), 우리나라의 18명의 현인임


  • 명륜당(明倫堂)

명륜당.png

○ 명륜당(明倫堂)은 성균관 유생들의 강학의 장소로, 현재 대학의 강의실에 해당하는 건물이며, 과거시험의 시험 장소로도 사용되었음. 학교는 인륜을 밝히는 곳[명인륜(明人倫)]이라는 맹자의 말에서 나온 말로, 현재의 ‘명륜당(明倫堂)’이라는 글씨는 선조 9년(1606)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임


  • 비천당(丕闡堂)

비천당.png

○ 현종(顯宗) 5년(1664)에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건립되었는데, 6·25 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되었음. 과거시험 때 제2과거 시험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성균관대학교 설립 이후에는 강의실과 도서실로도 사용되었음. 건립 당시 승려들이 사용하던 건물을 헐고 세웠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말한 ‘유학의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는 뜻에 따라서 명명한 것임


  • 전사청(典祀廳)

전사청.png

○ 석전(釋奠) 의식을 올릴 때 사용하는 희생(犧牲), 즉 제사용 고기를 준비하던 곳임
○ 성종 3년(1472)에 대사성(大司成) 이극기(李克基) 등의 요청에 따라 건립했음


  • 대학당(戴學堂) 및 수복청(守僕廳)

대학당.png

○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음.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음


  • 제기고(祭器庫)

제기고.png

○ 석전 의식이나 분향일(焚香日)에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장소임.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음


  • 신삼문(神三門)

신삼문.png

○ 대성전의 남쪽에 있는 정문. 남향의 3칸으로 된 문으로, 신(神)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라는 뜻


  • 묘정비각(廟庭碑閣)

묘정비각.png

○ 대성전 앞의 뜰에 있는 비석과 그 누각으로,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 태종 9년(1409)에 문묘를 새로 세운 뒤에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의 연혁을 기록하게 하고, 그것을 돌에 새겨서 세운 비석


  •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동무+서무.png

○ 대성전의 양쪽에 위치해 있으며, 위패를 나누어 모셔두었던 장소. 여기에서는 본래 공자의 제자와 중국의 학자,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 등이 모셔져 있었음. 현재는 우리나라의 18현은 대성전으로 옮기고, 나머지 위패는 모두 태워서 땅에 묻었기 때문에 비어 있는 상태


  • 동삼문(東三門)

동삼문.png

○ 석전 등의 행사 때 임금이 출입하는 문으로, 동무의 북쪽에 동향 3칸으로 된 문.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고 임금의 행차 때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함


  •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서재.png

○ 성균관의 유생들이 사용하던 방으로, 총 28개의 방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의 대학 기숙사에 해당함. 약 200명 정도의 유생들이 함께 기숙하면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곳임


  • 진사식당(進士食堂)

진사식당.png

○ 동재와 서재에 기숙하던 유생들의 식당으로, 모두 33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음. 유생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거기에 비치된 명부에 서명을 하는데, 그것을 원점(圓點)이라고 함. 하루 두 번의 원점에 1점을 부여하고, 원점이 총 300점 이상이 되어야만 대과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고 함


  • 존경각(尊經閣)

존경각.png

○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는데, 현재의 대학 도서관에 해당하는 건물임. 당시 성종이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고, 이후 장서가 분량이 수만 권에 달한 적도 있었으나, 현재 소장되어 있는 책은 없음


  • 육일각(六一閣)

육일각.png

○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 그리고 각종 기구를 보관하던 장소임. 활쏘기가 육례(六禮)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사용되었음


  • 정록청(正錄廳)

정록청.png

○ 성균관 관원들의 사무실로 사용하던 건물. 관직의 명칭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의 뒷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임


  • 향관청(享官廳)

향관청.png

○ 문묘에 제사 의식을 올릴 때 제관(祭官)들이 재계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장소


  • 하련대(下輦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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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이 석전의식이나 알성시 등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성균관을 방문했을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는 곳


  • 은행수(銀杏樹)

은행나무.png

○ 명륜당 앞의 뜰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던 행단(杏亶)을 상징하는 나무.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 윤탁(尹倬)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59로 지정되어 있음


  • 양현고터

양현고터.png

○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편하면서 성균관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양현고를 설치, 운영하였음
○ 1392년(태조 1) 양현고에 2인의 판관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가 태종 때에 판관제도를 폐지하고 사(使)·승(丞)·녹사(錄事) 각 1인씩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음. 초기에는 성균관에 딸린 2,000여결(結)의 섬학전(贍學田)을 관리하면서 유생 200명의 식량을 조달하였는데, 영조 때 편찬된『속대전』에 따르면 대폭 줄여 학전(學田) 400결로 식량을 공급하였다고 함
○ 양현고의 재원은 토지와 노비였는데, 이 재원으로 학생들의 식량·등유 등의 물품조달과 석전제(釋奠祭)의 비용을 충당하였음. 그러나 실제운영에 있어 학생들의 식량도 제대로 공급하기 힘들어 어물을 별도로 공급해주기도 하고, 기거하는 학생이 많을 때는 자신이 식량을 가지고 와서 공부하기도 했음
○ 따라서, 성종 때에는 양현고에 토지를 더 지급하여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음. 양현고에 속한 노비는 유생의 식사와 기타 관내의 수위·사환 등 잡역을 맡았는데, 때때로 왕이 교육진흥을 위하여 노비를 하사하는 경우가 있어 약 400명에 달했음
출처: 한국민족대백과


  • 석천문화관

석천문화관.png

○ 재단법인 고려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문화관
○ 재단은 1986년 12월 고려제강(주)의 창업주인 석천 홍종열 명예회장이 설립했음. 본 재단은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석천 홍종열 명예회장의 일념으로

 1. 미래에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
 2. 학술문화 개발과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연구비지원사업
 3. 불행, 재해, 기타 사정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를 돕기 위한 자선사업
 4. 학교에서 필요한 교부재 지원사업
 5. 독서의 생활화를 위한 석천문화관(도서관)을 운영중임

석천문화재단 홈페이지


  •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 집터

송시열집터.jpg

송시열집터설명.png

사진 출처 및 내용 참고: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 《증주벽립》의 뜻은 《옛날 증자, 주자가 그랬던 것 처럼, 흔들리지 않는 벽과 같이 서 있겠다》로 해석할 수 있고, 이는 곧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실천하려한 우암 송시열의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음
○ 조선시대에 우암 선생과 같은 고관대작이 살던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후원 등을 모두 갖춘 99칸짜리 으리으리한 집이었음. 창덕궁 안의 《연경당》이나 흥선대원군의 집이었던 《운현궁》과 비슷한 규모라고 생각하면 됨. 따라서 우암구기라는 비석이 있던 곳에서부터 이곳까지가 모두 우암 선생의 집터라고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