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자성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9번째 줄: | 39번째 줄: | ||
- 퇴계의 공부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이었음. 그와 반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학문의 목적이 과거시험을 보아서 남들을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함</br> | - 퇴계의 공부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이었음. 그와 반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학문의 목적이 과거시험을 보아서 남들을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함</br> | ||
+ | [[파일:성학십도.jpg]] | ||
+ | ☞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30624000023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성학십도 병풍 / 출처: <<헤럴드경제>> 2013.6.24일자, 남민 기자] | ||
+ | |||
+ | ☞질문: <span style="color:#ff0000;">'''왜 병풍으로 만들어서 두고 보았을까?'''</span> | ||
[[분류: 한국철학사]] | [[분류: 한국철학사]] |
2022년 4월 7일 (목) 00:53 판
자성록(自省錄) 서문
-이황 지음, 최중석 옮김, <<이퇴계의 자성록>>, 국학자료원, 2003
옛적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이제 벗들과 더불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강구(講究)함에 그 말을 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어 그런 것이니,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물며 이미 말한 뒤에 상대방은 잊지 않았으나 내가 잊은 것이 있고, 상대방과 내가 모두 잊은 것도 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거의 꺼려할 줄 모르는 것에 가까운 것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그 동안 옛날 상자를 꺼내 편지의 원고가 남아 있는 것을 찾아서 손으로 베껴 책상 옆에 두고, 때때로 살펴보고 거듭 반성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 원고가 없어서 기록하지 못한 것도 그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편지를 다 기록하여 권(卷)과 질(帙)을 이룬다한들 역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가정(嘉靖) 무오(戊午)년(1558) 단오 다음날 퇴계노인 씀
- 퇴계 편지와 관련된 책들
- 퇴계가 쓴 편지들
- 장윤수, <편지를 통한 퇴계의 손자교육: 교학이념과 교육내용을 중심으로>, <<사회사상과 문화>> 18권 3호, 동양사회사상학회, 2015, 69~109쪽
○ 퇴계는 평생 동안 수많은 편지를 썼음. 그 중에서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만 하더라도 1000여통이나 됨. 문집에 실린 퇴계의 편지는 주로 제자들과 학문적 논의를 주고받은 것들임. 이 편지들 속에는 퇴계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들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음
○ 그렇지만 퇴계의 편지가 모두 학문적 논의만 한 것은 아님. 제자들이 아닌 아들, 손자 및 친지들에게 보낸 가서(家書: 가족 간에 주고받는 편지)도 많음
☞ 퇴계 이황이 외손자에게 글씨본으로 써준 친필 서첩 / 출처: <<연합뉴스>> 2011.4.2일자 '퇴계 이황 글씨 교본과 편지 기탁' 김용민 기자
☞질문: 위의 서문에서 보이는 퇴계의 평생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 퇴계의 자신을 위한 공부, 자기 반성과 성찰의 바탕이 되는 공부
○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 복혜린, <유아교사 인성교육을 위한 퇴계 삶과 숙흥야매잠도 탐색>, <<아동부모학회지>> 3(2), 한국아동부모학회, 2017, 31~57쪽
- 61세에 도산서당이 완성되었음. 50세부터 계상서당에서 가르쳤는데 시간이 흘러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자 장소의 비좁음을 고민하다가 약 3년에 걸쳐서 도산서당을 완성하게 됨
- 68세 12월에 선조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면서 좋은 임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성학십도>를 적은 상소문을 올리게 됨
- 퇴계의 공부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이었음. 그와 반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학문의 목적이 과거시험을 보아서 남들을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는 것을 말함
☞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성학십도 병풍 / 출처: <<헤럴드경제>> 2013.6.24일자, 남민 기자
☞질문: 왜 병풍으로 만들어서 두고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