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철학: 허균
스토리의 힘
☞ 이혜숙, <2020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스토리텔링의 힘>, <<융합경영리뷰>>, 한국융합경영학회, 2020
-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즉 이야기하는 인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향유하고 창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음. 이를 통해 세계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임
- 미디어의 변화에 의해 아무리 다양한 양식으로 변화해 가더라도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호응될 수 있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음. 특히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전달하며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음
- 스토리는 우리의 삶과 일터에서 세 가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
1. 스토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법임. 스토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거대한 잠재성을 지님. 삶의 스토리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듣는 것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강력한 수단임
2. 스토리는 조직과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냄. 지식을 전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성숙시키고 혁신을 이끌기도 함
3. 스토리는 지나온 이력-역사에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함.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재를 미래로 끌고 나감. 스토리의 교환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것을 익히는 동시에 새로운 집단적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 됨
- 우리가 가져야 할, 특히 리더가 가져야 할 스토리
1.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스토리. 개인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는 연결정도가 약해서 깨지기 쉬움. 영감을 주는 스토리는 이 연결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접착제와 같음
2.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례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함. 페이스북의 리더들은 임원들이 언론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용과 방식에 대해 비판과 조언을 쏟아냈던 인턴의 이야기를 자주 거론하는데, 페이스북 리더들이 이 사례를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성원들의 서슴없는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기 위해서임. 실제로 했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필요함. 좋은 사례의 스토리는 조직의 문화를 바꾸고 직원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며 경영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놀라운 도구임
3. 실패 스토리도 말할 수 있어야 함. 리더가 자신의 단점과 실수를 주저없이 얘기하면 구성원들은 리더를 인간적으로 느끼고 좀 더 편하게 리더에게 다가서며 리더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됨
스토리의 힘을 알았던 허균
☞ 이규운, <허균이 지향하는 삶: 허균 <전>을 중심으로>, <<한문고전연구>> 제21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10
허균의 작품 속에 녹아든 그의 삶
- 허균(1569~1618)은 시대를 초월한 삶과 문학적 기행을 보여준 작가임. 허균은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갈구하고 있었음.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작품들에서 잘 드러남
- 허균은 그가 처한 현실의 불만을 문장으로 그대로 드러냄. 불만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음
허균이 지향하는 삶: 진짜 유학자의 삶, <엄처사전>
- 처사(處士)는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대를 난세로 인식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초야에 은둔했던 선비들을 말함. 허균이 살았던 16세기에는 사화의 여파로 이러한 선비들이 다수 존재했음. 특히 처사라는 칭호는 단대 사람들에게 매우 영예스러운 호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임
- 그들의 처사적 삶 속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현실대응 자세를 규정하면서 벼슬길에 나가는 대시 은둔하는 방식을 선택하도록 했음
엄 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그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을 다하여 새벽이나 저녁에는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즐겨하자, 그물을 짜고 간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기필코 잡아다가 대접하였다. 그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타이르자,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부(詩賦)를 아주 아건(雅健)하게 지어 내서 여러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유독《주역(周易)》과《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어 이치에 높고 멀리 나아가, 저술한 글들이 하도 낙서(河圖洛書)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자기를 데려가고 어머니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했지만, 회생하지 못하자 여러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3년간 여묘(廬墓) 살이에도 죽만 마셨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처사(處士)는 울면서,
“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과거보려 하였다. 이제 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는 누릴 수 없게 하랴.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하면서 목메인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남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우계현(羽溪縣 강릉의 속현)으로 이사와 살며 산수(山水)가 유절(幽絶)한 곳을 택하여 띠집[茆舍]을 짓고,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게 살았다.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툭 트여 남들과 거슬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으나 고을에서의 잘잘못을 평하거나,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어야 할 것들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가 없었고, 일체를 의(義)로만 재단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반드시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화려한 명리(名利) 따위야 완전히 벗어난 듯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사서(史書)를 읽으며 성패(成敗)ㆍ치란(治亂)ㆍ군자(君子)ㆍ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히 판단하고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무목(武穆)이나 문산(文山)이 죽어간 대목에 있어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여 운치가 있었고, 시도 역시 장려(壯麗)하게 지어 냈다. 그래서 전해지고 외어지던 것들이 1백여 편이었는데, 모두 시작(詩作)의 규범에 합치되었으나 처사 자신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조정(朝廷)에서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재랑(齋郞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말았다. 향년(享年) 78세였다. 생을 마치려던 무렵에 오래 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학자 10여 명을 초대하였다.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고는 이어서 자기 죽은 뒤의 일을 말했으니, 반드시 선산(先山)에다 장사지내 주고 그의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끼던 도서(圖書)들을 문인(門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서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유문(遺文)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모아놓지를 못했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분명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그의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선비들이 묻혀 사는 암혈(巖穴)에는 이분처럼 이름이 인몰(湮沒)하여 전해지지 않는 선비들로는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어서, 더욱 슬퍼진다.
☞ 허균은 엄처사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span
=> 공부의 목적: 세상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 도덕을 수양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 중요함
=> 철학은 실천: 엄처사는 자신이 배운 유교경전의 내용을 삶에서 실헌함.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몸과 성의를 다하고 고을에서는 공손하고 정성스럽게 사람을 대했음
=>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뚜렷한 역사인식을 갖는 것의 중요성: 엄처사는 역사서를 읽으며 진정한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 군자와 소인은 어떤 사람인지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음. 처사라고 세상을 잊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염려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함
=> 당대 비판: 이러한 진실한 삶을 살았던 엄처사였고, 그가 죽고나서 모두 그의 장례식에 왔지만 그는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고 그저 엄처사로서 잊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