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철학: 허균
스토리의 힘
☞ 이혜숙, <2020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스토리텔링의 힘>, <<융합경영리뷰>>, 한국융합경영학회, 2020
-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즉 이야기하는 인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향유하고 창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음. 이를 통해 세계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임
- 미디어의 변화에 의해 아무리 다양한 양식으로 변화해 가더라도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호응될 수 있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음. 특히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전달하며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음
- 스토리는 우리의 삶과 일터에서 세 가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
1. 스토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법임. 스토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거대한 잠재성을 지님. 삶의 스토리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듣는 것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강력한 수단임
2. 스토리는 조직과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냄. 지식을 전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성숙시키고 혁신을 이끌기도 함
3. 스토리는 지나온 이력-역사에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함.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재를 미래로 끌고 나감. 스토리의 교환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것을 익히는 동시에 새로운 집단적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 됨
- 우리가 가져야 할, 특히 리더가 가져야 할 스토리
1.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스토리. 개인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는 연결정도가 약해서 깨지기 쉬움. 영감을 주는 스토리는 이 연결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접착제와 같음
2.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례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함. 페이스북의 리더들은 임원들이 언론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용과 방식에 대해 비판과 조언을 쏟아냈던 인턴의 이야기를 자주 거론하는데, 페이스북 리더들이 이 사례를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성원들의 서슴없는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기 위해서임. 실제로 했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필요함. 좋은 사례의 스토리는 조직의 문화를 바꾸고 직원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며 경영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놀라운 도구임
3. 실패 스토리도 말할 수 있어야 함. 리더가 자신의 단점과 실수를 주저없이 얘기하면 구성원들은 리더를 인간적으로 느끼고 좀 더 편하게 리더에게 다가서며 리더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됨
스토리의 힘을 알았던 허균
☞ 이규운, <허균이 지향하는 삶: 허균 <전>을 중심으로>, <<한문고전연구>> 제21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10
허균의 작품 속에 녹아든 그의 삶
- 허균(1569~1618)은 시대를 초월한 삶과 문학적 기행을 보여준 작가임. 허균은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갈구하고 있었음.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작품들에서 잘 드러남
- 허균은 그가 처한 현실의 불만을 문장으로 그대로 드러냄. 불만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음
허균이 지향하는 삶: 진짜 유학자의 삶, <엄처사전>
- 처사(處士)는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대를 난세로 인식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초야에 은둔했던 선비들을 말함. 허균이 살았던 16세기에는 사화의 여파로 이러한 선비들이 다수 존재했음. 특히 처사라는 칭호는 단대 사람들에게 매우 영예스러운 호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임
- 그들의 처사적 삶 속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현실대응 자세를 규정하면서 벼슬길에 나가는 대시 은둔하는 방식을 선택하도록 했음
엄 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그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을 다하여 새벽이나 저녁에는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즐겨하자, 그물을 짜고 간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기필코 잡아다가 대접하였다. 그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타이르자,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부(詩賦)를 아주 아건(雅健)하게 지어 내서 여러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유독《주역(周易)》과《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어 이치에 높고 멀리 나아가, 저술한 글들이 하도 낙서(河圖洛書)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자기를 데려가고 어머니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했지만, 회생하지 못하자 여러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3년간 여묘(廬墓) 살이에도 죽만 마셨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처사(處士)는 울면서, “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과거보려 하였다. 이제 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는 누릴 수 없게 하랴.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하면서 목메인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남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우계현(羽溪縣 강릉의 속현)으로 이사와 살며 산수(山水)가 유절(幽絶)한 곳을 택하여 띠집[茆舍]을 짓고,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게 살았다.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툭 트여 남들과 거슬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으나 고을에서의 잘잘못을 평하거나,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어야 할 것들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가 없었고, 일체를 의(義)로만 재단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반드시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화려한 명리(名利) 따위야 완전히 벗어난 듯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사서(史書)를 읽으며 성패(成敗)ㆍ치란(治亂)ㆍ군자(君子)ㆍ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히 판단하고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무목(武穆)이나 문산(文山)이 죽어간 대목에 있어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여 운치가 있었고, 시도 역시 장려(壯麗)하게 지어 냈다. 그래서 전해지고 외어지던 것들이 1백여 편이었는데, 모두 시작(詩作)의 규범에 합치되었으나 처사 자신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조정(朝廷)에서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재랑(齋郞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말았다. 향년(享年) 78세였다. 생을 마치려던 무렵에 오래 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학자 10여 명을 초대하였다.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고는 이어서 자기 죽은 뒤의 일을 말했으니, 반드시 선산(先山)에다 장사지내 주고 그의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끼던 도서(圖書)들을 문인(門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서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유문(遺文)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모아놓지를 못했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분명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그의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선비들이 묻혀 사는 암혈(巖穴)에는 이분처럼 이름이 인몰(湮沒)하여 전해지지 않는 선비들로는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어서, 더욱 슬퍼진다.
☞ 허균은 엄처사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span
=> 공부의 목적: 세상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 도덕을 수양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 중요함
=> 철학은 실천: 엄처사는 자신이 배운 유교경전의 내용을 삶에서 실헌함.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몸과 성의를 다하고 고을에서는 공손하고 정성스럽게 사람을 대했음
=>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뚜렷한 역사인식을 갖는 것의 중요성: 엄처사는 역사서를 읽으며 진정한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 군자와 소인은 어떤 사람인지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음. 처사라고 세상을 잊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염려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함
=> 당대 비판: 이러한 진실한 삶을 살았던 엄처사였고, 그가 죽고나서 모두 그의 장례식에 왔지만 그는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고 그저 엄처사로서 잊혀짐
고뇌하고 도전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삶,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선생의 이름은 두(斗), 대대로 임피(臨陂 전북 옥구의 옛 지명)에서 살아 집안도 오래되고 재산도 넉넉하여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에는 과거에 뽑혀 관리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남궁두만은 박사의 제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30세에 처음으로 을묘년(1555, 명종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과장(科場)을 울렸다. 일찍이 대신불약부(大信不約賦)라는 글을 지어 성균관(成均館) 시험에 수석으로 뽑혀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전송(傳誦)하기도 했다.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감히 재주만 믿고는 고을에서 호탕한 채 멋대로 지냈었다. 잘난 체하면서 장리(長吏 고을의 원)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지도 않으니 읍내의 상하간이 모두 남궁두를 흘겨보며 앙심을 품었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선생이 서울로 이사하여 진취(進取)할 계획을 세우고는, 첩(妾) 한 사람만 시골 집에 남겨 두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가을 수확을 처리하였다. 첩(妾)은 무인(武人)의 딸이었으나 매우 예쁘고 영특하여 글과 계산법을 가르쳐 주면 뛰어나게 빨리 알아차렸다. 그래서 남궁두는 그를 가장 사랑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서울에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독수공방으로 지냈으므로 몰래 남궁두의 성(姓)이 다른 당질(堂姪)과 사통(私通)하고 있었다. 무오년(1558, 명종13) 가을 남궁두는 급한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30리를 남기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배들만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는 혼자서 말 한 필을 타고 시골 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등불이 밝혀 있는 밤이었다. 노복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나 중문(中門)이 활짝 열려 있어 첩이 보이는데,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 당질 놈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 반자[半尺]쯤 닿지 않고 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안아서 맞아들이고 있었다. 남궁두는 분노를 참으며 짐짓 그 마지막까지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馬]을 외문(外門)의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겨 가린 채, 틈 사이로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희희덕거리며 온갖 추잡을 떨다가, 옷을 벗고 함께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남궁두는 당장 그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니 걸려 있는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서 쏘아, 먼저 계집의 흉부를 꿰뚫어 즉시 넘어뜨리니 그 사내는 놀라서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또 쏘아 늑골을 적중시켜서 죽게 하였다. 남궁두는 관(官)에 알리고도 싶었으나 가문(家門)을 더럽히는 일이자, 또 고을 원님의 마음을 보장하기도 어려운 일이어서 곧 바로 두 시체를 끌고 가서 벼논의 도랑 속에 매장해 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왔었다. ... 농장의 어떤 종놈이 남궁두의 곡식 1백여 석(石)을 훔친 적이 있어 남궁두가 오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 그 자는 남궁두가 두 사람을 죽였지 않을까 의심하고는 그 자취를 찾아대었다. 벼논 도랑의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걸 보고서 삽질하여 파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곧바로 첩의 집에 알리자 늙은 병졸이 현령(縣令)에게 고발하고, 사내 집안에서 숙원(宿怨)이 있었다는 증거를 세웠다. 현령이나 여러 아전들은 본래부터 남궁두를 불쾌하게 여겼기에 모두 기뻐하여 잘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미움으로 당질을 모살(謀殺)했다고 죄안(罪案)을 꾸몄다. ... 남궁두는 곧바로 금대산(金臺山)으로 들어가 낙발(落髮)하고 중이 되었으니, 법명(法名)을 총지(摠持)라고 하였다. 계행(戒行)을 무척 엄하게 지키며 1년을 지냈다. 원수로 여기던 집에서 있는 곳을 알아내어 병졸들을 거느리고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꿈을 꾸는데, 산신(山神)이 일러주기를, “원수진 사람들이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겠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나자 급히 하산(下山)에 버리니 잡으러 오던 사람들이 도착해서는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남궁두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으로 향하다가 쌍계사(雙溪寺)에서 한 달 정도 기거하였다. 이름 있는 절이라 중들이나 속인들이 모여드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곳을 버리고 태백산(太白山)으로 향했다. 의령(宜寧)에 있는 야암(野庵)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뒤따라 중 한 사람이 도착하였다. 예쁘게 생겼고 나이도 어린데 삿갓을 벗고 당(堂)으로 오르더니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면서,
“그대는 사족(士族)이군요. 왜 뒤늦게 삭발하였습니까?” 하고는 조금 뒤에, “참을성이 있는 분이군요.” 하더니 잠시 뒤에는, “유도(儒道)를 업으로 하시면 큰 벼슬 하실 텐데.” 하였다. 얼마쯤 지나서는 껄걸 웃으면서, “두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고 죄를 지어 도망온 사람이군요.” 하는데, 말한 네 마디가 모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밤이 되어 그의 침소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해준 말이 사실이라고 승복하여 이어서 무척 간곡하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청했었다. ... 남궁두가 지금 스승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자 그 중은, “무주(茂朱 전북의 지명)의 치상산(雉裳山)에 계시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 한 해 동안을 머물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이 구르는 층계와 산의 정상(頂上), 나는 새도 이른 적이 없는 곳까지를 찾아다녔다. 세번 네번을 돌며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중이 속였다고 여기고 창연(悵然)히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자 숲속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었는데,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흐르고 있었다. 남궁두는 마음 속으로 기뻐서, “이 계곡 가운데가 선사(仙師)가 계시는 곳이 아닐는지.” 하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물줄기를 따라 몇 리(里) 정도를 걸어 들어가 우뚝 솟은 한 봉우리를 바라보니, 소나무와 삼목(杉木)이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인데 돌로 쌓은 층계로 대(臺)를 만들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옷깃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그 위로 오르니 동자(童子)가 맞이해 주며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 하기에, 남궁두는 읍(揖)하고서, “총지(摠持)가 선사(仙師)를 찾아 뵈러 왔습니다.” 했더니, 동자가 동편의 왼쪽 합문(閤門)을 열어주었다. 노승(老僧)이 계시는데 모습은 마른 나무 같았으며 해진 가사(袈裟)를 입고 나오면서, “화상(和尙)의 풍신이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오셨나?” 하였다. 남궁두는 꿇어앉으며,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기예(技藝)가 없습니다. 노사(老師)께서 많은 방술(方術)을 알고 계심을 듣고 세상에서 한 가지의 방술이라도 행하고 싶어서 천리 먼 길에 스승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1년을 지내고야 겨우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려 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하였다. 장로(長老)가,
“산야(山野)에서 죽음이 임박해 있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나.” ... 장로가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고 오직 죽지 않는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있겠네.” 했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그거면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였다. 장로(長老)가, “대저 모든 방술(方術)이란 먼저 정신(精神)을 모은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혼(魂)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神仙)으로 탈바꿈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게 있겠나.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하게나.”
하였다.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4일이 되어도 장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루에 한 차례 흑두말(黑豆末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고도 전혀 배고프고 피로한 기색이 없어, 마음에 별다르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는 온 정성을 다하여 큰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 단련한 지 거의 6개월 만에 단전(丹田)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 남궁두는 도(道)가 이루어짐을 기뻐하다 급히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남을 억제할 수 없더니 타녀(姹女 신단(神丹)의 물)에 불이 붙어 이환(泥丸)이 타오르자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장로(長老)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치면서, “슬프다,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는구려.” ... 다음날 남궁두를 불러들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인연이 엷어서 여기에 오래 남아 있기에는 합당치 못하니 하산(下山)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黃精)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나. 음탕한 사람이나 도둑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ㆍ소ㆍ개고기 등을 먹지 말며, 타인을 음해(陰害)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땅 위의 신선이네. 행하고 수양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면 또한 승선(昇仙)도 할 수 있을 거네. " ... 남궁두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곧 하직하여 하산(下山)하였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에 이르고 보니, 옛날의 집이라고는 터도 남지 않았고 전장(田莊)은 모두 2~4차례씩 주인이 바뀌었다. 또 서울로 가보아도 옛날의 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만이 묵은 풀 속에 종횡으로 놓여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돌아오고 말았다. 늘 생각하던 착실한 늙은 종이 있었다. 그 종은 해남(海南)에 살며 충분한 전택(田宅)도 있다기에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더니 얼마 후에 자기 주인임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울어댔다. 그가 살던 곳을 비워 주며 거처하도록 하였다. 상민(常民)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 수십 년 동안 황정(黃精)과 솔잎을 채취하여 식사로 했으니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지 않고 걸음걸이도 나는 듯하였다. ... 선생의 나이는 그해에 83세였으나 얼굴은 마치 46~47세 된 사람과 같았다. 시력(視力)이나 청력(聽力)이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톡 쏘는 눈동자나 검은 머리털이 의젓하여 여윈 학(鶴)과 같았다. ... 나는 선생의 음식ㆍ거처가 보통 사람과 같음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선생은,
“내가 처음에는 비승(飛昇)하리라 여겼는데 빨리 이루고 싶어하다가 이루지를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님께서 이미 지상의 신선은 되었으니 부지런히 수련하면 8백 세의 나이는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네. 요즘 산중(山中)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하여 속세로 내려왔으나 아는 사람 한 사람 없을뿐더러,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나의 늙고 누추함을 멸시하여 인간의 재미라고는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보고 싶어하는 것이란 본래 즐거운 일인데, 쓸쓸하고 즐거움이라고는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속세의 음식을 금하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승화(乘化)하여 깨끗이 돌아가 하늘이 주신 바에 순종하려네. 그대야말로 선재(仙才)와 도골(道骨) 있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진선(眞仙)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참아 내지를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네. 인(忍)이라는 글자 하나는 선가(仙家)의 오묘한 비결(祕訣)이니 그대 또한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