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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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李翺 774?~836)라는 인물
☞ 김용남, 『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 네이버 탑재 『중국역대인명사전』 참조
- 한유(768~824)의 제자
- 한유와 함께 송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됨
- 한유가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불교 이론과 수양 방법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평가받음
- 당시 특별한 인맥이나 기득권을 지니지 못했던 유학자들은 대개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고 이고 역시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나아갔음
- 그의 나이 20대 중반(25~27세 무렵)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음. 안록산의 난 이후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는 급선무의 과제였음. 동요하는 민심을 잠재우고 불교가 아닌 유교로 부응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음
- 성격이 강직하고 급해 의론할 때 피하는 게 없어서 권력자들이 그의 학문은 존중했지만 과격한 것을 싫어해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음. 나중에 ‘중서사인’이라는 관직까지 올랐음. 이 관직은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여(익명) 장관과 차관급인 중서령과 중서시랑이 이를 읽고 다양한 의견을 취합해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했음. 그렇게 해서 국가의 주요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직책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