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겸괘, 진정한 겸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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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李滉, 1502~1571)과 주역
- 20세 때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주역을 읽다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 퇴계가 주역을 읽기 시작한 것은 1520년 경진년(중종 15) 20세때부터임
- 『퇴계선생연보(退溪先生年譜)』의 해당 기록
주역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하였다. 이때부터 항상 몸이 마르고 허약해지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 선생이 조사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초년에는 뜻은 가지고 있었지만, 나아갈 방향을 모른채 너무 지나치게 애를 쓰다가 몸이 마르고 허약해지는 병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 퇴계는 특히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배움을 중시했음. 퇴계는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을 했음. 한 글자 안에 담긴 의미를 정독하고 곱씹으며 그 지식과 지혜가 온전히 자기 마음속에 녹아들 수 있게 했음. 독서와 사색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독서법을 지향했음. 퇴계는 “크게 의문을 갖는 자만이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생각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의문도 없고 깨달음도 없을 것”이라고 했음. 책으로 읽은 지식을 내 생각을 통해 내 것으로 소화시키고 내 삶으로 살아내는 독서법을 취했던 것임
- 퇴계는 꾸준하게 주역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신의 살림집의 서실 당호 구절을 주역에서 따오기도 했음
- 퇴계는 1531년 신묘년(중종 26) 31세 때에 처음 마련한 자신의 살림집 지산와사(芝山蝸舍: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도산면사무소 위쪽 영지산(靈芝山) 북쪽 기슭 양곡(暘谷)에 위치)의 서실 당호를 ‘선보당(善補堂)’이라고 하였음. 여기서 ‘선보(善補)’라고 하는 말은 『주역』 「계사전」의 “허물이 없다는 것은 과실을 잘 보완하는 것이다(无咎者, 善補過也).”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임
- 퇴계 이황은 1554년 갑인년 54세 때에는 서울에 있으면서 조정의 명령을 받고 『역학계몽』을 연구했음
- 퇴계는 후에 주자의 역학계몽에 대한 해설서인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게 됨. 주희(1130~1200)가 주역의 성격으로 기본적으로 점으로서의 주역으로 본 데 반해 퇴계는 기본적으로 주역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을 의리적인 관점에서 보게 됨. 물론 주역이 점치는 책으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주역』의 성격을 점서에 주목하기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