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에세이 공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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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삶에서 피어난 위대함

☞ 김교빈, 이현구 지음, <<동양철학에세이1: 혼란 속에서 피어난 철학의 향연>>, 동녘, 2021, 34~45쪽

공자가 살던 혼란기,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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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論語』全文・現代語訳

○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고 있었음.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국강병의 논리가 아니라고 받아들여주지 않는 무도한 인금에게 실망을 느끼고 다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새로운 임금을 찾아가는 여행길이었음
○ 이 때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밭을 가는 장저와 걸닉에게 길을 묻게 됨
○ 자로가 장저와 걸닉에게 나루터 가는 길을 묻자 오히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함께 살자는 답변을 받음
○ 이에 공자는 탄식하며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고 탄식함

 ☞질문: 여기에서 장저와 걸닉은 어떤 무리의 사람들이었을까?
☞질문: 공자가 말한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 장저와 걸닉은 혼란했던 춘추시대에 세속을 떠나 밭을 갈며 은거하며 살아갔던 사람들로 보임. 이를 통해 혼란했던 당시에 시대에 대처했던 다양한 방식의 삶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음. 노자, 장자의 대처 방식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음
=> 하지만 공자는 세속을 떠난 삶을 선택하지 않았음. 결국 사람들과 함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함. 그렇다면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일어난 그 혼란들을 인간사회 안에서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 혼란한 시대가 초래된 이유

○ 경제적 변화: 소를 이용하는 농사방법, 철로 만든 농기구의 등장, 비료의 등장, 관개 시설의 개발로 인한 농사 기술의 발달 => 토지는 잠시 이용하는 것이 아닌 토지를 영원히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환 => 힘 센 나라들이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게 됨 => 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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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 林巳奈夫『中国古代の生活史』2009 吉川弘文館 p.65


  • 공자의 등장

○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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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 제도의 특징: 혈연적 봉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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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살던 시대인 주나라는 농경에 기초한 사회였음. 농사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확보하려면 집단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가족 제도가 대가족제도였음. 특히 이 대가족제도에서 노인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풍부한 농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음
- 이러한 농경에 기초한 주나라는 노인 중심의 대가족사회를 이루었으며, 이 속에서 부계,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종적 질서가 자리잡았음
- 그리고 이러한 가족질서는 국가질서와도 연결되었음. 부자 중심의 종적 윤리가 국가에 그대로 적용된 것임
- 주나라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리는 종가집을 중심에 놓고, 정복한 여러 땅에 자기 집안의 형제, 작은아버지, 조카 같은 친척,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 식구들을 제후로 임명했음
- 통치의 꼭대기에 천자의 친족인 종가집을 두고 다시 종가집과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이 있고... 이러한 가족제도를 근가에 둔 국가제도에서는 부모 자식 사이의 효, 형제들 사이의 공경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음
○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는 속에서 기존의 신분제를 비롯한 많은 제도가 무너졌고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음
○ 혈연적 가족제도에 기초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그 혈연관계가 멀어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음

☞ 출처: 중국학 위키백과

○ 춘추시대 사회 경제적 변화와 이로 인한 혼란을 보면서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됨

 ☞질문: 공자는 어떻게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을까?

공자(B.C.551~B.C479)의 일생

  • 공자의 탄생

○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 73세에 생을 마감함
○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약소국인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음. 지금의 산둥성 취푸[곡부(曲阜)]에 해당함
취푸 위치

○ 공자의 '자(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이고, 공자의 실제 이름 '구(丘)'였음.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로 공자의 성명은 '공구'였음. 그의 이름은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니구산 위치

○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흘은 하급 무사였음


  • 공자의 성장기

○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음
○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잔치가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는데 그래서 공자가 어려서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으로 보기도 함
○ 젊었을 때에는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했음


  • 공자의 장년기

○ 공자는 제나라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 그 왕들이 자기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을 바로 잡아주기를 바랐음. 그 사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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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497~B.C.484에 공자가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던 여정(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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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51세 무렵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공자는 급히 노나라로 돌아옴. 고향에 돌아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부 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음
○ 공자가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가 노나라는 서서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음. 공자가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려는 순간이었음
○ 하지만 정치를 돌보지 않는 노나라 임금을 보고 다시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68세 무렵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편찬하면서 만년을 보냈음

 ☞질문: 한 인간으로서 공자의 삶을 성공적이라고, 행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만일 나였다면 그 삶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 공자의 삶을 쉽사리 성공적이다, 행복했다라고 보기 힘든 또 다른 사연들

○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공자보다 먼저 주었고 가장 아끼던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그보다 먼저 죽었음. 공자의 부인이 그를 떠났다는 얘기도 있음
☞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공자의 평소 모습 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bnCode=jti_1h0301&titleId=C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