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한국문화 속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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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게 길을 묻다.jpg

=> 공자, 노자, 주자, 토정 이지함, 남명 조식, 퇴계, 라이프니츠, 칼 융, 헤세, 윤선도, 도연명 등 동서양 사상과 문화사의 주요 인물들이 주역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음


  • 건축물에 나타난 태극과 음양 문양들

감은사지.jpg

☞ 그림 출처: 『불교신문』2005.3.30일자

○ 학계에서는 중국의 태극도설이 들어오기 40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미 태극 도형과 음양 사상을 활용하고 있음을 밝혔음
○ 경주 감은사지 태극 문양은 주돈이의 태극도형보다 400여년 앞섰음
○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극문양이 사찰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음

    • 참고: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太極圖)>

★태극도(최종).png


  • 태극기

태극기 건곤감리.png


  • 훈민정음 속 역학 원리

☞ 류승국,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9

 『훈민정음 해례(解例)』 「제자해(制字解)」: 
 “천지의 도는 하나의 음양오행뿐이다. 곤괘(坤卦)와 복괘(復卦) 사이가 태극이 되며 동(動)하고 정(靜)한 후에 음양이 되느니라."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坤復之間爲太極, 而動靜之後爲陰陽.


  • 한국역학의 창의적 응용, 이제마

☞ 이기복, 『동무 이제마(1837-1900)의 의학 사상과 실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학위논문, 2014
☞ 이경록, 「이제마의 의학론과 그 시대적 성격」, 『의사학』 제14권 제2호(통권 제27호), 2005


    • 이제마(李濟馬 1837-1900)

○ 근대로의 이행기에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그가 속해있던 그룹만 보아도 그 당시를 다각로도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임
○ 1837년 조선의 함경도 함흥(咸興)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의 19대 후손으로 태어났음
○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서자로 태어났음. 그의 이름과 관련해서 유명한 일화가 있음
○ 그의 아버지 이진사는 원래 술이 약한 사람이었으나 어느날 향교에서 일을 보고 오다가 친구들을 만나 주막에서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음. 친구들은 이진사가 술이 취하자 주모에게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주모는 이진사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에게 딸을 주려고 했음
○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 충원공(忠源公)의 꿈에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달라.” 하고는 기둥에 매 놓고 가버렸음
○ 그 때 어떤 여인이 강보에 갓난아기를 싸 안고 와서 이진사님의 아기오니 받아달라 간청을 하자, 충원공은 큰 길조라 여기고 모자를 받아 들이도록 허락했음. 그리고 꿈에 제주도 말을 얻었다 하여 아기 이름을 제마(濟馬)라고 지었다고 함
○ 이제마가 서출이라는 신분적 차별대우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던 일화도 전해지는데 이제마가 집안 어른들 앞에서 족보에 올려주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렸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지만 총명했던 이제마를 가족들이 또한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짐
○ 이를테면 조부 이충원은 이제마를 총애하여 가솔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제마를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할 것을 선언하였고 임종 시에는 상당량의 재산을 손자인 이제마에게 미리 배분해 주었다고 함. 당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완화되어가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 이제마는 1875년(고종 12) 그의 나이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어 다음해에 무위별선(武衛別選) 군관(軍官)으로 입위(入衛)되었음
○ 1886년(고종 23)에 진해현감겸병마절도사(鎭海縣監兼兵馬節度使)에 제수되어, 이듬해 2월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9년 12월에 퇴임했음
○ 그가 어떤 관료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구절이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에 등장함. 이는 헌종(憲宗) 13년(1847) 1월부터 고종(高宗) 27년(1890) 3월까지 경상도 고성(固城)에 있던 통제영의 통제사(統制使)가 승정원(承政院)에 올린 장계(狀啓), 일종의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등록(謄錄)한 것으로, 진해 현감(鎭海縣監) 이제마(李濟馬)…정사를 종합하여 자상하게 하니, 그 뜻이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호하는 데 있었음. 상으로 근무 성적이 평가되어 있었음
○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1894년 4월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상하 2권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 책은 1893년 7월 13일에 쓰기 시작해서 잠시의 휴식도 없이 이듬해 1894년 4월 13일에 이르러 완성하였으며(東醫壽世保元 卷4 四象人辨證論 283쪽) 김영관(金永寬) 등 문인 7명이 1901년 6월 함흥군 栗洞契에서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이제마가 의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당시에 유행했던 괴질을 들 수 있음. 당대는 괴질 콜레라가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였으며 이제마도 주변의 친족들이 여러 질환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았음. 19세기에는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했음
○ 조선에서도 1821-22년 처음으로 괴질이 대유행하면서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고 이어서 1858년, 1859년, 1862년, 1886년에 몇 차례 더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음
○ 이제마의 저술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괴질(怪疾)에서 비롯한 증상으로 추정되는 병증들과 온역(瘟疫) 등을 여럿 다루고 있음
○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이제마의 근친들, 특히 여성들이 젊은 나이에 여럿 사망하였다는 사실임. 부친인 이반오(李攀五)가 부인을 네 명이나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마 자신도 세 번이나 혼인했음. 이렇듯 괴질, 병고, 단명이라는 삶의 실존 문제들에 이제마는 가까이 있었던 것임
○ 이제마는 무관으로 나가기 전 39세가 되는 을해(1875)년에 이미 의사로서 의학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음
○ 이제마가 46세가 되는 임오(1882)년에는 이미 사상인(四象人)의 심욕(心慾)과 성정(性情)에 대한 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으로 보임
○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의약 경험이 있었던 이제마는 지방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간간이 의학 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원 군수 시절에 이미 약국(藥局) 즉 의원(醫院)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정황이 보임
○ 근대로의 이행기에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그가 속해있던 그룹만 보아도 그 당시를 다각로도 생각해보게 하는 인물임
○ 1837년 조선의 함경도 함흥(咸興)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의 19대 후손으로 태어났음 그는 서자출신에, 유학자로 불리면서도 의인(醫人)으로서 중인층에 속했으며, 변방인(邊方人), 무관(武官), 관료(官僚), 반족(班族) 등에 속하는 인물이었음
○ 이제마는 스스로를 “동국(東國)의 무관(武官)”이라는 의미에서 동무(東武)라고 칭했음


    • 이제마의 사상의학

○ 당시 신흥종교가 발흥하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통해 서양과학이 소개되는 등 지적인 유연성과 역동성이 증가한 시기에 종래의 사상과 입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제마는 자신의 사유를 구체화하여 사상의학을 내놓게 됨
○ 이제마의 사상의학의 사상(四象)은 사실 주역에서 나오는 용어임. 일부 학자들은 당시 이제마가 주역(周易) 등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하면서 이제마의 사상학설(四象學說)이 유학계의 큰 발명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함


 「계사전」의 태극에서 팔괘로의 언급
 이런 까닭에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내고, 양의는 사상을 내고, 사상은 팔괘를 내니
 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사상팔괘.jpg


○ 이제마의 사상의학: 태양인(太陽人)·태음인(太陰人)·소양인(少陽人)·소음인(少陰人)으로 나누고 폐비간신(肺脾肝腎) 장기의 크기도 다르고 체형, 성품, 재주 등 일상의 모든 모습에서 구별된다고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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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당시 의료적 문제점을 해결하고 민중들을 구휼해 주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
○ 그는 『동의수세보원』에서 “궁항벽촌에서 갑자기 병에 걸리는 경우에는 한 가지 약재라도 쓰는 게 대책 없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백배 낫다“라고 했음
○ 당시 조선에서는 궁벽한 곳일수록 약재 수급이 곤란하였고 의학 지식은 어려워서 널리 전파되지 않았다 이제마는 약재 획득의 곤란함을 극복하기 위해 체질에 따른 단방(單方)이라도 권장하였고 의학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특유의 체질론을 제시하였던 것임
○ 그는 이러한 몸이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했음. 즉 인간의 감정이 각각 우리 몸의 신체부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임
○ 그는 타고난 장부의 편차에 따라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이 서로 상반된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음. 그러나 그 감정에서는 태양인은 소음인, 소양인과 대음인이 서로 반대 입장에 있다고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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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주역에서 발견한 마음의 중요성

☞ 임병학, 「『격치고, (格致藁)』에 나타난 이제마(李濟馬)의 역학적(易學的) 사유체계(思惟體系), 󰡔퇴계학보󰡕 제132권, 2012

 이제마의 『격치고(格致藁)』:
 주역에서는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여기에서 양의(兩儀)가 생성된다. 양의는 사상(四象)을 생성하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생성하며 팔괘는 길흉을 정하고 길흉은 대업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태극은 마음[心]이다 양의는 마음과 몸[心身]이다. 사상은 일, 마음, 몸, 사물[事心身物]이다 … 모두 통괄해서 이야기한다면 64괘가 모두 태극이요 64괘 가운데 32괘가 모두 건(乾)이며 8괘가 모두 마음[心]이니 단지 한 가지 생각만 고집해서 의심을 둘 필요는 없다.

○ 이제마 인체론에서 질병이란 바로 마음과 몸의 충돌을 가리킴. 특히 그는 심화(心火) 즉 불완전한 감정을 중요한 병인(病因)으로 지적하기도 했음
○ “모든 질병의 원인은 심화(心火)에서 생겨난다. … 상황에 맞춰 심화를 과도하게 쓰지 않는다면 천수를 누리지 않을 수 없다 화복(禍福)은 자초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수요(壽夭)도 자초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이제마, 『동무유고(東武遺稿)』)


오늘의 조별 활동(2023.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