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오죽헌 답사 이야기(2021.12.5)[편집 | 원본 편집]
- 율곡 이이의 동상과 견득사의(見得思義)
※ 참고: 위키 심화과정 수업을 듣지 않아 아직 구글지도 구현법은 잘 익히지 못했습니다.ㅠㅠ 여러분은 잘 익히셔요^^
☞ 오죽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율곡 동상에 왜 "견득사의"가 쓰여 있을까?
○ 견득사의(見得思義)
- “얻을 것이 있으면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한다”는 뜻
- 군자가 갖춰야 할 아홉 가지 생각인 구사(九思) 중 하나로 『논어(論語)』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말
- 어제각(御製閣)
○ 어제각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율곡이 친필로 쓴 그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오죽헌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정조가 1788년에 건립한 것임
○ 정조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기록해 둔 관동 지역에 관한 그의 묘사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이 지역에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음
정조가 율곡의 벼루 뒷면에 남긴 글
무원(주자의 고향)에 있는 연못의 물을 떠다가 먹을 갈고 / 涵婺池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학문에 정진하심이여! / 象孔石 율곡은 그 뜻을 널리 펴시었다 / 普厥施 용(율곡)은 동천(딴 세상)으로 돌아갔건만 / 龍歸洞 그 명성은 먹에서 피어오르고 / 雲潑墨
☞ 정조와 율곡은 무슨 관계일까?
☞ 한국고전종합DB에서 '오죽헌'을 검색해 보니 정조실록 등 정조와 관련된 기록에서 오죽헌이 많이 등장했음
○ 정조의 율곡을 사모하던 마음
“이 문성공(李文成公, 율곡 이이)은 내가 존모(尊慕)하는 분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읽으며 그분을 상상하곤 했는데, 근자에 들으니 강릉에 초본(草本) 『격몽요결(擊蒙要訣)』과 남긴 벼루가 있다고 하므로 속히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았더니, 점획(點畫)이 새로 쓴 듯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 총명하고 순수한 뛰어난 자질과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깨끗한 기상을 애연(藹然)히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문득 문성이 떠난 지 2백여 년이 되었음을 모르게 되었으니, 그분의 글을 읽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러했던 것이다. ”
“유교의 기풍이 점점 멀어지고 성인의 말씀이 날로 없어져 가므로 매번 경연(經筵)에 나아갈 적이면 두 분[퇴계와 율곡]과 시대를 함께하지 못한 한탄을 더욱 금할 수 없다. 강릉은 바로 공의 외가(外家)이자 공이 실제로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이른바 오죽헌(烏竹軒)이 바로 그곳이다. 뒤에 권씨(權氏) 소유의 책이 되어 역시 그의 집안에 간직되었는데, 권씨의 선대(先代)는 바로 공의 이종(姨從)이 된다. 이미 이렇게 기록하고 또 그 벼루의 명(銘)을 지어 돌려보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5권, 「잡저(雜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