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제1장

An_SW
Esang21c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9월 16일 (금) 10: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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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문 출처: [동양고전종합DB 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tab=tab1_02&bnCode=jti_3n0401&titleId=C7&compare=true]

 道(도)는 可道(가도)면 非常道(비상도)요 名(명)은 可名(가명)이면 非常名(비상명)이라.
 도(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왕필 주:
○ (문자로) 표현된 도와 (문자로) 규정된 이름은 (구체적 사태를 가리키는) 지사(指事)나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조형(造形)에 해당하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 규정할 수 없다.


 無名(무명)은 天地(천지)[萬物(만물)]之始(지시)요 有名(유명)은 萬物之母(만물지모)라.
 무명(無名)은 만물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미이다.

왕필 주:
○ 무릇 유(有)는 모두 무(無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만물이) 아직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이) 형체가 있고 이름이 있는 때에는 (도(道)가 만물을) 자라게 하고 길러주며 형통케 하고 성장케 하니 (만물의) 어미가 된다. 이는 도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시작하고 이루어주지만, 만물은 (그 도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면서도 그 소이연(所以然: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니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고 했다.


 故常無欲(고상무욕)이면 以觀其妙(이관기묘)하고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신묘함을 보고,

왕필 주:
○ ‘묘(妙)’란 지극히 ‘작다[미(微)]’는 뜻이다. 만물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한 뒤에 성장하고, 무(無)에서 시작한 뒤에 생장한다. 따라서 늘 욕심이 없어 그 마음을 텅 비워내면 그 시작하는 만물의 신비를 볼 수 있다.


 常有欲(상유욕)이면 以觀其徼(이관기요)하니라.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돌아가는 끝을 본다.

왕필 주:
○ ‘끝[요(徼)]’이란 돌아가 마치는 곳이다. 무릇 유(有)가 이롭게 되려면 반드시 무(無)를 써야 한다. 욕심의 뿌리인 (마음은) 도에 나아간 뒤에야 가지런해진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있으면 마치고 (돌아가는) 만물의 끝을 볼 수 있다.


 此兩者(차양자)는 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으로 同謂之玄(동위지현)이니 玄之又玄(현지우현)이 衆妙之門(중묘지문)이라
 이 두 가지는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 것으로, 함께 일컬어 ‘신비하다’고 하는데, 신비하고 또 신비한 것이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다.

왕필 주:
○ 양자(兩者)란 ‘시작[시(始)]’과 ‘어미[모(母)]’이다. ‘함께 나왔다[동출(同出)]’는 것은 ‘함께 현(玄)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이름이 다르다[이명(異名)]’는 것은 (‘시작[시(始)]’과 ‘어미[모(母)’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래서 머리 쪽에 있으면 ‘시(始)’라 일컫고, 끝 쪽에 있으면 ‘모(母)’라고 일컫는다.
○ ‘현(玄)’은 깊고 어두운 것이니, 고요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무유(無有)]이며 ‘시작[시(始)]’과 ‘어미[모(母)’가 나오는 곳으로서 〈이러한 현(玄)에 대해〉 ‘이름[명(名)]’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현(玄)’이라고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다.
○ 그런데도 ‘함께 일컬어 현(玄)이라 한다.[동위지현(同謂之玄)]’고 말한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붙여 일컬을 수 없다는 데서 취한 것이다.
○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현(玄)’이라는 하나의 (글자로) 확정할 수 없으니, 만약 ‘현(玄)’이란 하나의 (글자로) 확정하면 이것은 곧 이름이요 〈본래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그래서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현지우현(玄之又玄)]’고 〈형용하는 의미로 중복하여〉 말한 것이다.
○ 뭇 신비함이 모두 같은 현(玄)에서 나오니, 이 때문에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