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제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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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제22편 <지북유(知北遊)> 살펴보기 전, 지난주 못 다 살펴본 제6편의 <대종사> 들여다보기[편집 | 원본 편집]

<대종사> 속 도의 전수과정[편집 | 원본 편집]

 曰(왈) 聞諸副墨之子(문저부묵지자)호라
 副墨之子(부묵지자)는 聞諸洛誦之孫(문저낙송지손)하고 洛誦之孫(낙송지손)은 聞之瞻明(문지첨명)하고 瞻明(첨명)은 聞之聶許(문지섭허)코 聶許(섭허)는 聞之需役(문지수역)하고 需役(수역)은 聞之於謳(문지오구)하고 於謳(오구)는 聞之玄冥(문지현명)하고 玄冥(현명)은 聞之參寥(문지참료)하고 參寥(참료)는 聞之疑始(문지의시)하니라
여우(女偶)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부묵(副墨)의 아들에게서 들었다. 부묵의 아들은 그것을 낙송(洛誦)의 손자에게서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그것을 첨명(瞻明)에게서 들었고, 첨명은 그것을 섭허(聶許)에게서 들었고, 섭허는 그것을 수역(需役)에게서 들었고, 수역은 그것을 오구(於謳)에게서 들었고, 오구는 그것을 현명(玄冥)에게서 들었고, 현명은 그것을 참료(參寥)에게서 들었고, 참료는 그것을 의시(疑始)에게서 들었다.”

◈ 부묵(副墨): 문자를 쓰는 도구인 먹[墨]을 의인화한 표현. 부묵의 아들은 먹으로 쓰여진 문자를 지칭하며 도를 전달하는 보조수단을 상징
◈ 낙송(洛誦): 낙송(洛誦) 또한 인명이지만 여기서는 문자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말을 의인화한 표현
◈ 첨명(瞻明): 눈으로 직접 도를 보고 분명히 안 사람이라는 뜻으로 앞의 부묵의 아들과 낙송의 손자가 도를 문자나 말 따위의 이차적인 도구를 통해 불완전하게 이해한 것이라면, 여기의 첨명은 도를 직접 보았다는 뜻으로 도에 더 가까이 다가갔음을 의미
◈ 섭허(聶許): 도를 들으면 바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뜻
◈ 수역(需役): 기다렸다가 도를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 실천적인 시도를 하는 사람
◈ 오구(於謳): 도를 즐겨서 감탄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 밀로 부족해서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 스스로 도를 얻은 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함
◈ 현명(玄冥): 깊고 어두워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 현(玄)과 명(冥)은 모두 깊고 어둡다는 뜻으로 도와 일체가 되어서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형용한 표현
◈ 참료(參寥): 텅 비어 있는 도에 참여하는 사람, 또는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 의시(疑始): 시작을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 도는 스스로를 근본으로 삼기[자본자근(自本自根)] 때문에 그 시작을 추측할 수 없다는 뜻

도의 전수과정을 부묵(副墨)의 아들(문자)←낙송(洛誦)의 손자(말)←첨명(瞻明)(직접 도를 본 사람)←섭허(聶許)(도를 바로 알아듣는 사람)←수역(需役)(도를 기르는 사람)←오구(於謳)(도를 즐기는 사람)←현명(玄冥)(깊고 어두워 알 수 없는 사람)←참료(參寥)(텅 비어 있는 도에 참여하는 사람)←의시(疑始)(시작을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역순으로 묘사하고 있음


<대종사> 속 좌망(坐忘)의 경지[편집 | 원본 편집]

 顔回曰(안회왈) 回(회)는 益矣(익의)로이다
 仲尼曰(중니왈) 何謂也(하위야)오
 曰(왈) 回(회)는 忘仁義矣(망인의의)로이다
 曰(왈) 可矣(가의)나 猶未也(유미야)로다
 他日(타일)에 復見(부현)하야 曰(왈) 回(회)는 益矣(익의)로이다
 曰(왈) 何謂也(하위야)오
 曰(왈) 回(회)는 忘禮樂矣(망예악의)로이다
 曰(왈) 可矣(가의)나 猶未也(유미야)로다
 他日(타일)에 復見(부현)하야 曰(왈) 回(회)는 益矣(익의)로이다
 曰(왈) 何謂也(하위야)오
 曰(왈) 回(회)는 坐忘矣(좌망의)로이다
 仲尼(중니) 蹴然曰(축연왈) 何謂坐忘(하위좌망)고
 顔回曰(안연왈) 墮枝體(휴지체)하며 黜聰明(출총명)하야 離形去知(이형거지)하야 同於大通(동어대통)할새 此謂坐忘(차위좌망)이니이다
 仲尼曰(중니왈) 同則無好也(동즉무호야)요 化則無常也(화즉무상야)니 而(이)는 果其賢乎(과기현호)인저
 丘也(구야)는 請從而後也(청종이후야)호리라
안회(顔回)가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仲尼, 공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仁義)를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예악(禮樂)을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좋긴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했다. “사지백체(四肢百體: 팔, 다리, 온갖 신체)를 다 버리고, 귀와 눈의 감각작용을 물리치고 육체를 떠나고 지각작용을 없애서 대통(大通)의 세계와 같아졌을 때, 이것을 좌망(坐忘)이라 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대통(大通)의 세계와 같아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게 되며, 큰 도의 변화와 함께하면 집착이 없게 되니,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

◈ 대통의 세계와 같아짐[同於大通(동어대통)]: 대도(大道, 위대한 도)와 일체가 된다는 뜻


<<장자>> 제22편 <지북유(知北遊)> 간략 소개[편집 | 원본 편집]

○ 이 편명이 '지북유(知北遊)'로 된 것은 이 편이 '지북유(知北遊)'로 시작하기 때문
○ 이 편은 모든 개념적인 규정을 초월하는 도의 절대성을 밝히면서도 도의 체득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음

☞ 번역문 출처: 동양고전종합DB(안병주 선생님 역주)


<<장자>> 제22편 <지북유>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知北遊於玄水之上(지북유어현수지상)하야 登隱弅之丘而適遭無爲謂焉(등은분지구이적조무위위언)하야
 知(지) 謂無爲謂(위무위위)하야 曰(왈)
 予欲有問乎若(여욕유문호약)하노라
 何思何慮(하사하려)면 則知道(즉지도)며 何處何服(하처하복)이면 則安道(즉안도)며 何從何道(하종하도)면 則得道(즉득도)오 三問而無爲謂(삼문이무위위) 不答也(부답야)하니 非不答(비부답)이라 不知答也(부지답야)니라
 知(지) 不得問(부득문)하야 反於白水之南(반어백수지남)하야 登狐闋之上而睹狂屈焉(등호결지상이도광굴언)하야
 唉(애)라 予知之(여지지)하노니 將語若(장어약)호리라 中欲言而忘其所欲言(중욕언이망기소욕언)하야늘
 知(지) 不得問(부득문)하야 反於帝宮(반어제궁)하야 見黃帝而問焉(견황제이문언)한대 黃帝曰(황제왈)
 無思無慮(무사무려)라야 始知道(시지도)하고 無處無服(무처무복)이라야 始安道(시안도)하고 無從無道(무종무도)라야 始得道(시득도)하리라
지(知)가 북쪽으로 현수 물가에 놀러 가서 은분(隱弅)의 언덕에 올랐다가 마침 무위위(無爲謂)를 만났다. 지가 무위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도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일해야 도에 편안할 수 있으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말미암아야 도를 터득할 수 있는가?” 하고 세 가지를 물었는데 무위위가 대답하지 않았는데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백수의 남쪽으로 돌아가서 호결(狐闋) 위에 올라서 광굴(狂屈)을 보았다. “응! 내가 그것을 안다. 너에게 일러 주겠다.” 하고는 말을 막 하려던 중에 말하고자 하던 것을 잊어버렸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황제(黃帝)의 궁궐로 돌아가서 황제를 만나 물어보자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되고 처신하지 말고 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에 편안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말미암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지(知): 가공의 인명. 사람의 지혜/지식/앎(人知)을 의인화하여 우언으로 표현했음
◈ 현수(玄水): 지명
◈ 은분(隱弅): 가공의 지명
◈ 무위위(無爲謂): 지(知)와 마찬가지로 비유적 뜻을 담은 가공의 인명
◈ 호결(狐闋): 가공의 언덕 이름
◈ 광굴(狂屈): 가공의 인명


 知(지) 問黃帝曰(문황제왈)
 我與若(아여약)의 知之(지지)와 彼與彼(피여피)의 不知也(부지야) 其孰是邪(기숙시야)오
 黃帝曰(황제왈)
 彼無爲謂(피무위위)는 眞是也(진시야)요 狂屈(광굴)은 似之(사지)하고 我與汝(하여여)는 終不近也(종불근야)하니라
 夫知者(부지자)는 不言(불언)하고 言者(언자)는 不知(부지)하니 故(고)로 聖人(성인)은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하나니라
 道不可致(도불가치)며 德不可至(덕불가지)요 仁可爲也(인가위야)며 義可虧也(의가휴야)며 禮相僞也(예상위야)니
 故(고)로 曰失道而後(왈실도이후)에 德(덕)이오 失德而後(실덕이후)에 仁(인)이오 失仁而後(실인이후)에 義(의)오 失義而後(실의이후)에 禮(예)니 禮者(예자)는 道之華而亂之首也(도지화이난지수야)니라
 故(고)로 曰爲道者(왈위도자)는 日損(왈손)이니 損之(손지)하고 又損之(우손지)하야 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하나니 無爲而無不爲也(무위이무불위야)니라
 今(금)에 已爲物也(이위물야)요 欲復歸根(욕복귀근)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其易也(기역야)는 其唯大人乎(기유대인호)인저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나와 당신은 도에 대해서 알고 저 무위위와 광굴은 알지 못하는데 누가 옳은 것일까요?” 황제가 말했다. “저 무위위는 정말 제대로 아는 자이고 광굴은 비슷하게 아는 자이고 나와 당신은 끝내 도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무릇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니 그 때문에 성인은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도는 이르게 할 수 없고 덕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인(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의(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 뒤에 덕을 말하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인이 나타나게 되고 인을 잃어버린 뒤에 의를 말하게 되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니 예란 도를 거짓으로 꾸민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으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인뿐일 것이다.

◈ 도는 이르게 할 수 없고[道不可致(도불가치)]: 도는 인지(人知: 인간의 지혜/지식/앎)로 궁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
◈ 덕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德不可至(덕불가지)]: 덕은 언어로 도달할 수 없다는 뜻
◈ 인(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의(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仁可爲也(인가위야)며 義可虧也(의가휴야)며 禮相僞也(예상위야)]: 인, 의, 예는 도와 덕에 비해 인위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
◈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爲道者(왈위도자)는 日損(왈손)이니 損之(손지)하고 又損之(우손지)하야 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하나니 無爲而無不爲也(무위이무불위야)]: 《노자》 제48장에 “배우는 일은 날마다 보태지만 도를 닦는 일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라고 하여 유사한 내용이 보임
◈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今(금)에 已爲物也(이위물야)요 欲復歸根(욕복귀근)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세상 사람들은 이미 순박한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도 매우 어렵다는 뜻
◈ 대인(大人): 도를 터득한 사람. 지인, 진인, 성인 등으로 표현되는 이상적인 인간


 生也(생야)는 死之徒(사지도)요 死也(사야)는 生之始(생지시)니 孰知其紀(숙지기기)오
 人之生(인지생)은 氣之聚也(기지취야)니 聚則爲生(취즉위생)이오 散則爲死(산즉위사)니 若死生爲徒(약사생위도)면 吾又何患(오우하환)이리오
 故(고)로 萬物(만물)이 一也(일야)어늘 是其所美者(시기소미자)를 爲神奇(위신기)오 其所惡者(기소오자)를 爲臭腐(위취부)언마는 臭腐復化爲神奇(취부부화위신기)하며 神奇復化爲臭腐(신기부화위취부)하나니
 故(고)로 曰通天下(왈통천하)히 一氣耳(일기이)라 하니 聖人(성인)이 故(고)로 貴一(귀일)하나니라
 知(지) 謂黃帝曰(위황제왈)
 吾問無爲謂(오문무위위)호니 無爲謂不應我(무위위불응아)하니
 非不我應(비불아응)이라 不知應我也(부지응아야)니라
 吾問狂屈(오문광굴)호니 狂屈(광굴)이 中欲告我而不我告(중욕고아이불아고)하니
 今予問乎若(금여문호약)호니 若(약)이 知之(지지)하니 奚故(해고)로 不近(불근)고
 黃帝曰(황제왈)
 彼其眞是也(피기진시야)는 以其不知也(이기부지야)라 此其似之也(차기사지야)는 以其忘之也(이기망지야)라 予與若(여여약)이 終不近也(종불근야)는 以其知之也(이기지지야)니라
 狂屈(광굴)이 聞之(문지)하고 以黃帝(이황제)로 爲知言(위지언)이라하다
삶이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누가 그 끝을 아는가. 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니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게 되는 것이니 만약 삶과 죽음이 같은 무리임을 안다면 내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무릇 만물은 매한가지인데 자기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냄새나고 썩었다고 하지만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바뀌고 신기한 것이 다시 냄새나고 썩은 것으로 바뀐다. 그 때문에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기(一氣)일 뿐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니 성인은 그 때문에 하나를 중시한다.” 지(知)가 황제(黃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무위위(無爲謂)에게 물어보았더니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꾸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았더니 광굴이 나에게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잊어버리고) 나에게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에게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일러 줄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신은 그것을 아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에 가깝지도 못하다 하시는지요.” 황제(黃帝)가 말했다. “저 무위위(無爲謂)가 참된 도를 터득한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이고 저 광굴(狂屈)이 도와 비슷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며 나와 그대가 끝내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광굴(狂屈)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를 두고 말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장자>> 제22편 <지북유>의 그 유명한 구절[편집 | 원본 편집]

 東郭子問於莊子曰(동곽자문어장자왈)
 所謂道(소위도)는 惡乎(오호)에 在(재)오
 莊子曰(장자왈) 無所不在(무소부재)하니라
 東郭子曰(동곽자왈) 期而後(기이후)에 可(가)니라
 莊子曰(장자왈) 在螻蟻(재누의)하니라
 曰(왈) 何其下邪(하기하야)오
 曰(왈) 在稊稗(재제패)하니라
 曰(왈) 何其愈下邪(하기유하야)오
 曰(왈) 在瓦甓(재와벽)하니라
 曰(왈) 何其愈甚邪(하기유심야)오
 曰(왈) 在屎溺(재시뇨)하니라
 東郭子不應(동곽자불응)이어늘
 莊子曰(장자왈) 夫子之問也(부자지문야) 固不及質(고불급질)이로다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른바 도는 어디에 있는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동곽자가 말했다. “꼭 찍어 말씀해 주셔야 알아듣겠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그리 낮은 곳에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돌피나 피 따위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 아래로 내려가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기왓장이나 벽돌 조각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 심해지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똥이나 오줌 속에 있다.”
 동곽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했다. “그대가 물은 것은 본디 본질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오늘의 사유 및 토론 주제(2022.10.18)[편집 | 원본 편집]

 <개인적으로 정리해 볼 것>
 ☞ 1. 자신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왜 그런 목표를 갖게 되었나요? 
 <토론 주제>
 ☞ 2. 장자가 말하고 있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도의 관점에서 1을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3. 장자의 도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내 삶의 목표 혹은 궁극적 목적 추구에 대해 건네는 메시지가 있나요? 있다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