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사상과 콘텐츠: 장자 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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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속 양생(養生)
- 양생: 양생이란 자신의 생명을 잘 기른다는 뜻으로 외부 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신의 육체를 손상시키거나 생명을 잃는 일 없이 원래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 그대로 살아가는 것. 따라서 인위적인 수명연장사상(도교의 신선술)과는 구분됨. 전국시대 맹자로부터 비판받은 양주의 사상이 양생사상의 일면을 지니고 있음
- 양주의 사상: 양주의 사상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위아주의(爲我主義)로 털 한 올을 뽑아 세상이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 사상으로 유명했음(<<맹자>>)
<<열자>> <양주>편에 실린 양주의 사상
금자(禽子)가 양주에게 물었다. "당신은 털 한 올 뽑아 온 세계를 구제할 수 있다면 하겠는가?" 양주가 대답했다. "천하는 본래 털 하나로 구제될 수 없다." 금자가 다시 물었다. "만일 구제할 수 있다면 하겠는가?" 양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자는 나가서 양주의 제자인 맹손양에게 오고갔던 대화에 대해 말했는데 그걸 듣고 맹손양이 말했다. "당신은 선생님(양주)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고.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당신은 살갗을 할퀴고 천만금을 얻는다면 그 짓을 하겠습니까?" 금자가 말했다. "나는 하겠다." 맹손양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사지 하나를 끊어 나라를 얻는다면 그 짓을 하겠습니까?" 금자가 가만히 있었다. 그 때 맹손양이 말했다. "털 한 올은 피부보다 미미하고 작으며 피부는 사지 하나보다 미미하고 작습니다. 그러나 많은 털을 모으면 피부만큼 중요하고 많은 피부를 합하면 사지만큼 중요합니다. 털 한 올은 본래 몸의 만분의 일인데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 "생명을 온전하게 하여 그 진수를 보전하며 물질 때문에 신체에 누를 끼치게 하지 않는"(<<회남자>>) 양주의 사상은 후에 노장사상과 결합되어 인간세상의 각종 해독에 대비하여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최선책으로 하는 양생사상으로 발전함
<<장자>> 제3편 <양생주>
庖丁(포정)이 爲文惠君(위문혜군)하야 解牛(해우)하더니 手之所觸(수지소촉)과 肩之所倚(견지소의)와 足之所履(족지소리)와 膝之所踦(슬지소기)면 砉然嚮然(획연향연)하며 奏刀騞然(주도획연)하야 莫不中音(막부중음)하야 合於桑林之舞(합어상림지무)하며 乃中經首之會(내중경수지회)한대 文惠君曰(문혜군왈) 譆(희)라 技蓋至此乎(기개지차호)여 庖丁(포정)이 釋刀(석도)하고 對曰(대왈) 臣之所好者(신지소호자) 道也(도야)니 進乎技矣(진호기의)니이다 始臣之解牛之時(시신지해우지시)에 所見(소견)이 無非(全)牛者(무비전우자)러니 方今之時(방금지시)에 臣(신)이 以神(이신)으로 遇(우)하고 而不以目(이불이목)으로 視(시)하야 官知止(관지지)하고 而神欲行(이신욕행)이어든 依乎天理(의호천리)하야 批大郤(배대극)하며 導大窾(도대관)호대 因其固然(인기고연)이라 技經肯綮之未嘗(기경긍경지미상)이온 而況大軱乎(이황대고호)따녀 良庖(양포)는 歲更刀(세경도)하나니 割也(할야)요 族庖(족포)는 月更刀(월경도)하나니 折也(절야)라 今臣之刀(금신지도)는 十九年矣(십구년의)오 所解(소해)는 數千牛矣(수천우의)로대 而刀刃(이도인)이 若新發於硎(약신발어형)하니이다 彼節者有閒(피절자유간)코 而刀刃者無厚(이도인자무후)하니 以無厚(이무후)로 入有閒(입유한)이라 恢恢乎其於遊刃(회회호기어유인)에 必有餘地矣(필유여지의)니 是以(시이)로 十九年(십구년)이로대 而刀刃(이도인)이 若新發於硎(약신발어형)하니라 雖然(수연)이나 每至於族(매지어족)하야는 吾見其難爲(오견기난위)하야 怵然爲戒(출연위계)하야 視爲止(시위지)하며 行爲遲(행위지)하야 動刀甚微(동도심미)하야 謋然已解(획연이해)하야 如土委地(여토위지)어든 提刀而立(제도이립)하야 爲之四顧(위지사고)하며 爲之躊躇(위지주저)하야 滿志(만지)커든 善刀而藏之(선도이장지)하노이다 文惠君曰(문혜군왈) 善哉(선재)라 吾(오)는 聞庖丁之言(문포정지언)하고 得養生焉(득양생언)하니라
소 잡는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어서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되었으며,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경락(經絡)과 긍경(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백정은 한 달에 한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켜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그 상태로)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스스륵 하고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듯하면,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칼을 닦아서 간직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道)를 터득했다.”
◈ 상림의 무악, 경수: 모두 아름다운 음악의 이름
◈ 긍경(肯綮): 뼈에 살이 붙어 있는 부분과 살과 힘줄이 엉켜 있는 부분
<<장자>> 제11편 <대유(在宥)>
心養(심양)하라 汝徒處無爲(여도처무위)하면 而物自化(이물자화)하리니 墮爾(타이)의 形體(형체)하며 吐爾(토이)의 聰明(총명)하고 倫與物忘(윤여물망)하면 大同乎涬溟(대동호행명)하리라 解心釋神(해심석신)하야 莫然無魂(막연무혼)하면 萬物(만물)이 云云(운운)하고 各復其根(각득기근)하나니 各復其根而不知(각복기근이부지)면 渾渾沌沌(혼혼돈돈)하야 終身不離(종신불리)하리라
마음을 길러라.[心養(심양)] 그대가 무위에 머물기만 하면 만물이 저절로 감화될 것이다. 그대의 몸을 잊어버리고 그대의 총명을 버리고 세상의 규범이나 외물을 잊어버리면 혼돈한 도와 완전히 같아질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놓아서 고요히 혼도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만물이 성대하게 자라나고 각기 근본으로 돌아갈 것이니 각각 근본으로 돌아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되면 혼돈의 도와 일체가 되어 종신토록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장자>> 제15편 <각의(刻意)>
故(고)로 曰形勞而不休則弊(왈형로이불휴즉폐)하고 精用而不已則勞(정용이불이즉로)하나니 勞則竭(노즉갈)이라하노니 水之性(수지성)이 不雜則淸(부잡즉청)하고 莫動則平(막동즉평)이나 鬱閉而不流(울폐이불류)하면 亦不能淸(역부능청)하나니 天德之象也(천덕지상야)니라 故(고)로 曰純粹而不雜(왈순수이부잡)하며 靜一而不變(정일이불변)하며 惔而無爲(담이무위)하며 動而以天行(동이이천행)이라하나니 此養神之道也(차양신지도야)니라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는 혹사만 하고 쉬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 정기(精氣)는 쓰기만 하고 그만두지 아니하면 피로하게 되니, 피로가 겹치면 그 육체나 정기(精氣)가 그만 다해 버린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의 본성도 이물질이 섞이지 않으면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흔들어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수평을 이루지만, 막고 닫아서 흘러가지 않게 하면 물은 또한 맑을 수 없으니, 이것이 자연 본래의 타고난 덕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체득한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은) “순수함을 지켜 잡념을 섞지 않고 고요히 한결같음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며, 욕심없고 담백하여 무위하며, 움직일 때에는 자연의 운행을 따른다.”고 하니 이것이 정신을 기르는[양신(養神)] 방법이다.
<<장자>> 제5편 <덕충부(德充符)>
惠子謂莊子曰(혜자위장자왈) 人(인)이 故無情乎(고무정호)아 莊子曰(장자왈) 然(연)하다 惠子曰(혜자왈) 人而無情(인이무정)이면 何以謂之人(하이위지인)이리오 ... 莊子曰(장자왈) 是(시)는 非吾所謂情也(비오소위정야)라 吾所謂無情者(오소위무정자)는 言人之不以好惡(언인지불이호오)로 內傷其身(내상기신)하고 常因自然而不益生也(상인자연이불익생야)니라 惠子曰(혜자왈) 不益生(불익생)이면 何以有其身(하이유기신)이리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인간은 본래 감정이 없는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 혜자가 말했다. “사람이면서 감정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 장자가 말했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감정이 아니다. 내가 감정이 없다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안으로 자신을 해치지 않고, 항상 자연의 도를 따라 무리하게 삶을 연장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혜자가 말했다. “삶을 연장시키려 애쓰지 않으면 어떻게 그 몸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