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선비문화
사유의 전환!
○ 이미지출처: 코스트코
☞ 지구는 둥글다! 고로 내가 서 있는 곳이 이 지구의 중심이다!
- 조선 후기 주체적 역사 읽기가 가능했던 이유
○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했던 인물로 성호학파라는 한국실학의 중요한 학맥을 형성하게 됨. 이익 연구의 특징은 기존 선현들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학문을 익혔던 학풍을 만든 것으로 유명함
○ 이익의 학문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박학(博學)임. 이는 궁극의 이치를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양한 지식에 근거하여 탐구대상이 되는 학문 주제에 천착하고 이를 통해 정미한 이치를 탐구하는 데 그 방향성이 있었음(원재린,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학풍 연구>>, 혜안, 2003, 185쪽)
○ 이익은 그의 부친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사신으로 갔던 길에 연경(燕京)에서 구매해 온 수천 권의 서적들 가운데 있던 서양과학, 문물, 서양종교에 관한 서학서적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서학에 대해 선택적 포용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각을 가졌음
○ 박학의 일환에서의 서학에 관한 수용은 당시 조선의 지리적 위치, 역사적 위치를 다시금 바라보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음. 서학의 지리학적 지식을 통해 지구 위에 실증되는 여러 나라가 지도상의 위치로 제시되며, 이에 따라 주자학이 뒷받침하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 붕괴하게 되었음.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의 지리와 역사를 변방이 아닌 중심에 두고 사고할 수 있게 되었음(금장태, <<성호와 성호학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127쪽)
유교문화, 선비문화의 주체로서의 강릉
군자국의 주체, 관동
- <<해동역사(海東繹史)>> 속 군자국
○ 이 책은 정조(正祖)와 순조(純祖) 때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 1765~1814)과 그의 조카인 한진서(韓鎭書)가 함께 편찬한 것으로 중국과 일본의 각종 전적(田籍) 540여 책에 나오는 우리나라 관련 기사를 뽑아 편찬한 것임
○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가장 먼저 <동이총기(東夷總記)>가 나옴. <<해동역사>>에서는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군자국(君子國)을 언급함: “군자국이 북쪽에 있는데 관(冠)을 쓰고 검(劍)을 차며 …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 동북쪽이라는 지리적 위치상 조선땅이 고대 군자국에 해당된다고 보았음
○ <<논어>> 속 군자국에 대한 언급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 곳은 미개하니, 사실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셨다. “군자(君子)가 거주한다면 무슨 미개함이 있겠는가?”
○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한 동이: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그것이다.”
○ <<해동역사>> 속 우이(嵎夷)
요(堯)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시어 우이(嵎夷)에 거주하게 하시니 양곡(暘谷)이라는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경건히 인도하여 고루 차례에 따라 농사짓는 일을 돕도록 하셨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춘분에 별이 조수(鳥宿) 별자리가 다 나타나 자리 잡은 것으로 중춘(仲春)의 절기를 조정해 주도록 한다.
내가 살펴보니 <자허부(子虛賦)>에서는 제(齊)나라의 오른쪽은 양곡(暘谷)을 경계로 삼는다고 했다. 호위생(胡渭生)은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한서(漢書)>>를 인용하여 우이를 조선 땅이라고 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이런 학설에 근거해 본다면 우이는 경상도 영해(寧海)이거나 강원도 강릉 등지일 것이다. 요임금의 도읍지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6, 7천리에 불과하니 어찌 멀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 여기에서 우이, 즉 양곡의 위치를 중국의 <<한서>>에서는 조선땅이라고 했고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는 이 지역이 조선 땅에서 구체적으로는 영해나 강릉에 해당하는 지역일 것이라고 보았음. 고대로부터 강릉 지역은 문화적 중심지역 가운데 하나였음
신화의 땅, 강릉
○ 조선 전기 문인으로 우리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적 전통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으면서 천문, 지리, 의약 등 다방면에 능통하고 문장에도 능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사가문집(四佳文集)>>에서 강릉부(江陵府)의 운금루(雲錦樓)에 대한 기문을 남겼음
○ 이 글에서 서거정은 동한(東韓)에서 산수가 빼어난 곳은 관동이 으뜸이고 관동에서는 강릉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강릉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경포대, 사선봉(四仙峯), 한송정(寒松亭)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운금루의 누각에 대해 이렇게 읊었음
내가 들으니 누각의 높이는 티끌 같은 속세를 벗어나 비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네. 누각의 크기는 수 백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올라가서 보면 부상(扶桑)을 휘어잡고 양곡(暘谷)을 잡아당길 듯하네.
=> 강릉이 양곡과 함께 부상이라는 신화적인 지명으로 언급되고 있음
○ 강릉 출신 대학자인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도 강릉 청학산(靑鶴山)에 들어가는 양비로(楊毗盧)를 전송하면서 지은 시 가운데 청학산(지금의 소금강)을 묘사하면서 "부상의 여섯 용이 태양을 붙들고 날마다 산허리를 감고 도네.”라고 했음. 그는 청학산이 태산만큼 높다고 하면서 이를 부상의 여섯 용이 태양을 붙들고 날마다 산허리를 감고 돌 듯 웅장한 모습을 묘사했음
○ 부상(扶桑)은 고대 동양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부상 나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탕곡(湯谷) 위에 부상 나무가 있다. 하나의 해가 부상 나무로 오면 하나의 해가 부상 나무를 떠나 떠오르는데 모두 까마귀를 싣고 있다”고 했음
○ 이 부상 나무는 예 신화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산해경>> <대황남경(大荒南經)>에는 동해의 밖, 감수 사이에 희화국(羲和國)이 있는데 희화는 제준의 아내로 열 개의 해를 낳았다고 말했음
○ 그리고 <해외동경(海外東經)>에는 탕곡과 부상 나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나옴. 여기에서 부상 나무는 열 개의 해가 목욕하는 곳으로, 아홉 개의 태양이 아랫가지에 있고 한 개의 태양이 윗가지에 있다고 말했음
○ 하지만 예(羿)가 등장하는 시점은 이러한 일상적이고 평온한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 시점임.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함. <본경훈(本經訓)>에서는 요 임금 때에 이르러 열 개의 해가 함께 나타나 곡식을 태우고 초목을 죽이는 바람에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고 보았다. 게다가 알유, 착치, 구영, 대풍, 봉희, 수사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보았음
○ 이 시점에 예가 등장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착치를 비롯한 괴물을 없앰과 동시에 열 개의 해를 쏘아 재앙을 멈추게 되는 신화적 이야기로 전개됨. 여기에서 열 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재앙과 함께 괴물들이 백성들의 일상적 삶을 피폐하게 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부상 나무에서 뜨고 지는 열 개의 해 속에는 까마귀로 구체화된 새가 실려 있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음
○ 강릉지역의 진또배기 문화와 관련이 있을까?
문화 속에 깃들 철학 찾기
☞ 강릉의 유적지, 얼마나 가 보았나요?
☞ 윤사순, <<조선, 도덕의 성찰: 조선 시대 유학의 도덕철학>>, 돌베개, 2010, 15~25쪽
○ 한국인의 철학적 사유를 살펴볼 수 있는 것들에는 비정형화된 것과 정형화되지 않은 것이 있음
○ 정형화된 것은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으로 한국철학자들의 문집, 글 등에서 살펴볼 수 있음
○ 한편 한국인의 철학적 사유를 살펴볼 수 있는 비정형화된 문화적 측면도 있음. 이론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사유는 한국의 언어를 비롯한 문화에 깃든 사유인 만큼, 정형화된 사유보다 더 원초적인 성격을 띰. 한국인은 독특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독특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 그리고 이 언어와 문화 및 역사를 이루는 근본 바탕과 뼈대가 철학임
☞ 나를 이세상 어디에 두드냐가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꾼다!
문화에서 드러나는 비정형화된 한국의 철학적 사유들
- 강릉의 임경당
- 임경당(臨鏡堂)은 김열(金說, 1506~?)의 호임. 강릉 김씨(25세손)로 어릴 때부터 과거 응시를 위한 공부를 접어서 임영처사(臨瀛處士)라고 불리기도 했음. 그는 학문과 문장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효친과 우애로 수신제가에 힘썼던 인물로 존경받았음.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친분이 있기도 했음
=>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인터넷 족보에서 살펴볼 수 있음: <강릉김씨대종회 인터넷족보>(http://www.gnkim.kr/)
- 강릉의 임경당을 방문해 보면 자연의 바위를 그대로 담장 삼아 집을 지었고 바닥에 솟아 올라와 있는 바위를 그대로 두었음
- 율곡이 임경당을 위해 남긴 「호송설(護松說)」
○ <호송설> 다운로드 받고 싶으시면 클릭(출처: 율곡학프로젝트(http://yulgok.geeo.kr/))
○ <호송설> 속 일화
당시 임경당의 집 주위는 빙 둘러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소나무가 꽤나 빽빽하게 많이 심어져 있었다. 이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임경당은 말했다. “우리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죠. 우리 형제들이 모두 여기에 집을 지어놓고 살았는데 이 소나무가 울타리가 되어주었죠. 이 소나무를 보면 부모님 생각이 그치지가 않아요.” 그러면서 임경당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항상 두려운 것은 세대가 멀어지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어지면 도끼로 베어지는 일을 피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대에게 몇 마디 말을 받아서 가묘(家廟)의 벽 위에 걸어두고자 합니다.”
율곡은 임경당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한다. 율곡은 예기(禮記) 「옥조(玉藻)」의 문장을 인용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서책을 차마 읽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아버지의 손때가 남아있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사용하던 술잔과 그릇으로 차마 마시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의 입김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드리워져 있는 소나무는 더욱 그러하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흥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선조가 고된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은 반드시 한 세대를 거쳐야 비로소 가업으로 이루어지길 기약할 수 있는데 자손들이 불초하면 무너짐이 한순간이니 한 해를 마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빠를 것입니다. 이 소나무가 심어진 뒤에 수 십 년을 기다려야 비로소 큰 나무[成樹]가 될 수 있는데 도끼로 벤다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것입니다. 가업을 이루기는 어렵고 파괴하기는 쉬운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강릉의 그 수많은 소나무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심어지고 길러지고 지켜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나무가 이제는 강릉 곳곳을 지키고 있다. 강릉의 문화도 그러하지 않을까? 우리는 미처 그 손길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런 감성과 생각을 지니게 하는 밑바탕에는 강릉의 문화, 전통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