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왕충
왕충(王充, 27년 ~ ?)이라는 인물
☞ 임옥균, 『왕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 시대의 주류에 저항한 철학자, 왕충
○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이룬 한나라의 이데올로그들은 황제의 권위를 한껏 올릴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서는 유학의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학에 참위설을 끌어들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음
○ 참위설의 '참(讖)'이란 해, 달, 별(일월성신)의 변화에 따라 길흉이나 재이(災異: 재앙, 이변) 등을 예언하는 것이고, '위(緯)'는 경(經)에 가탁해서 미래의 일을 설명한 것임
=> 진시황의 분서 등으로 인해 진나라 때 유실된 경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회·정치적 상황에 맞게 경전이 재해석되었음(음양오행설, 상서재이설, 천인상관설 천문점 등이 포함)
○ 한나라 때에는 이 참위설이 참으로 일세를 풍미했다고 할 수 있음. 참위설은 예언을 주로 하고 있는데 견강부회하여 이미 일어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참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그 주종을 이루었음
○ 예: 원시(元始) 5년(서기 5년) 12월에 평제(平帝)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인 영(嬰)을 세웠음. 『한서』「왕망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음
"이 달에 ...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졌다. 그 위에 붉은 글씨가 드러났는데 '안한공 왕망이 황제가 될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 정치적 의도가 뚜렷하게 보이는 조작이라고 할 수 있음. 이 이후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결국 왕망은 스스로 제위에 올라 한나라를 종식히키고 신(新)나라(8~23)를 세웠음
=> 그만큼 당시 사람들이 참언을 믿었고 또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할 경우 그것이 가능했음
○ 왕충은 이 참위설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비판을 가했음
○ 특히 왕충과 가까운 시대였던(27~97)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184)이 일어나는데 이 당시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 예컨대 부적을 살라서 물에 타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는 등의 주술을 통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태평도를 백성들이 믿을 정도로 그 당시 일반 백성들도 미신적인 부분들을 믿었던 것으로 보임
- 왕충의 목숨을 건 저작 『논형(論衡)』
○ 지금 왕충의 저작인 『논형』을 보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를 힘들여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충 당시에는 이와 같은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고 그것이 정치적 도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반대가 심지어는 목숨을 건 일이 될 수도 있었음
○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고 여덟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유교경전 공부를 시작했음
○ 17, 18세 때 고향인 절강성 상우현(上虞縣)을 떠나 수도인 낙양으로 유학을 갔음
○ 20세 무렵 이후 스승을 떠나 스스로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했음. 한 가지를 파고드는 연구보다는 여러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음.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왕충은 책을 사기 보다는 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읽었고 읽는 대로 암기했음
○ 친구들과 토론할 때 왕충은 항상 새로운 관점을 내놓았고 친구들은 처음에는 황당해 하다가도 왕충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음. 글도 잘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 30세 무렵에 왕충은 낙양을 떠나 외지에서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임. 평생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음
○ 왕충은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 가난하고 어려워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 50세가 넘어서 영천군(潁川郡)에서 관직을 맡았는데 사치와 양조를 금하자는 건의를 그 고을을 다스리는 태수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여 <<논형>>을 편찬했음
○ 70세 전후에 왕충은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