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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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소개

  •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시기의 철학자 이색(1328~1396)

- 이기동, <<이색: 한국 성리학의 원천>>,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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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위키 백과: 이색

○ 이색(李穡)의 호는 목은(牧隱)임. 목은이라는 호는 '소나 양을 치는 목자(牧者)로 숨어 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함. 출세보다는 은거하는 삶을 지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함
○ 외가인 영덕 괴시리에서 태어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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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경북매일>> 2020.9.8일자 "목은 이색의 고향 괴시리와 가정 이곡"

○ 2세가 되던 해에 부모의 고향인 한산(韓山)으로 돌아갔음
숭정산에 있는 절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등을 읽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말인 당시 불교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임
○ 14살에 성균시에 합격했음
○ 목은 이색은 고려 말기 당시 원(元)나라였던 중국에서 공부하고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여(27세) 중국에서 관직생활을 했음
○ 하지만 29살이 되던 해인 1356년 봄에 고려로 귀국하게 됨
○ 그는 당시의 세계의 심장부였던 중국에서 다양한 세계의 인종과 문물을 접하면서 드넓은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있는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갖게 됨. 그는 문명의 아침이 동방의 하늘 아래에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음
○ 목은 이색이 65세가 되던 해 이성계의 주도 하에 역성(易姓)혁명[왕조교체: 고려->조선]이 일어나게 됨. 이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다 유배되었음. 65세 때 유배가 해제되었지만 그 해에 자신의 아들이 32세의 나이에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사주로 피살되게 됨
○ 유배가 해제된 후 사면되고서 한주로 돌아왔음. 68세 때에는 가을에 관동으로 유람을 하고 오대산에 머물기도 했음. 목은이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은 까닭에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높았는데도 죽임을 당했고, 귀양에서 돌아온 목은이 여주에 있는 농막에 은거하고 지냈는데 어느날 그의 문인이 찾아오자 그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일토록 울다가 내려온 일도 있었다고 함
○ 목은의 나이 69세 때 여주 여강으로 피서가기를 청하여 5월 3일 개경 벽란도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에 오른 뒤 갑자기 병이 나서 막내 아들 종선을 오게 했으나 병이 위중해졌음. 승려가 와서 불경을 외우려 했으나 이를 말리면서 "나는 죽고 사는 이치를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서는 이 말을 마치자마자 운명했음. 배 안에서 갑자기 운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은 아닌지 그의 죽음을 의심하기도 했음
○ 신흠(1566~1628)이 지은 <<연담>>에서는 "고려가 망할 때 사람들이 오직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만 굳게 절개를 지킬 줄 알고 목은의 사람됨은 알지 못했는데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음

☞ 참고: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해제

한국고전종합DB <목은집> 번역문


  • 이색의 "천인무간: 하늘과 사람이 하나다" 사상

○ 이색은 애당초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고 하는 천인무간(天人無間) 사상을 제시했음
○ 주자의 문집에서도 '천인무간'은 등장하지만 주자학에서는 어디까지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전개됨
○ 이색의 천인무간 사상은 하늘과 내가 하나로 붙어있는 만큼 남들도 하늘과 하나로 붙어있고 나와 남은 하나로 붙어있는 존재라는 논리로 전개됨. 이것이 목은의 만물일체사상임

 이치로 보면 남과 나의 구별 없는 것
 살아가며 남과 나를 구별을 하네,
 밝은 태양이 바야흐로 빛나거니
 누가 그 뜻을 이길 수 있으랴
 원래부터 도에 들게 되는 것은
 단적으로 성의(誠意: 뜻을 정성스럽고 진실되게 함)에 달린 것이니
 노력하여 이 관문을 통과한다면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네
-이색 <목은문고>에 실린 시

이기동,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구조>, <<한국사상과 문화>> 5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378~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