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소요유 3
장자 소요유 3
소요유에 등장하는 인물1: 팽조[장수의 상징]
① 朝菌(조균)은 不知晦朔(부지회삭)하며 蟪蛄(혜고)는 不知春秋(부지춘추)하나니 此小年也(차소년야)라 楚之南(초지남)에 有冥靈者(유명령자)하니 以五百歲(이오백세)로 爲春(위춘)하고 五百歲(오백세)로 爲秋(위추)하며 上古(상고)에 有大椿者(유대춘자)하니 以八千歲(이팔천세)로 爲春(위춘)하고 八千歲(팔천세)로 爲秋(위추)하더니 而彭祖(이팽조)는 乃今(내금)에 以久(이구)로 特聞(특문)이어늘 衆人匹之(중인필지)하나니 不亦悲乎(부역비호)아
① 조균(朝菌)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② 쓰르라미는 봄,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③ 짧은 수명의 예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5백 년을 봄으로 하고 5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 먼 옛날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으니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그런데 ④ 팽조(彭祖)는 지금 장수로 유독 유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기를 바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 ① 朝菌(조균)
○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죽는 버섯
- ② 쓰르라미[蟪蛄(혜고)]
- ③ 짧은 수명
○ 조균과 쓰르라미는 아침에 태어나면 밤이 되기 전에 죽음. 그들에게는 긴 수명을 가진 명령, 대춘에 대비시키면 아침이 봄에 해당되고 밤은 가을에 해당됨. 반대로 밤[가을]에 태어나면 아침[봄]이 되기 전에 죽는 한 나절의 덧없는 생명임
○ 자연계에 명령이나 대춘 같은 긴 생명을 지닌 것이 있는 것처럼 인간세계에는 팽조가 장수를 누린 사람으로 유독 유명하지만 겨우 800세에 불과했음
○ 장자는 장수를 바라는 인간들에게 그것이 긴 수명을 지닌 것들에 비해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돌아보게 하면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바래온 것들,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우리를 속박했던 것들에 대해 <소요유>에서 깨나가게 함
- ④ 팽조(彭祖)
○ 인명. 요 임금 이래로 은나라 때까지 7백〈또는 8백〉 세를 살았다는 전설적인 장수한 인물
- 참고: 장자 사상 속 양주의 사상
-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간명한 중국철학사>>, 마루비, 2020,109~111쪽
"나의 생명은 오직 나를 위해 있다. 그러므로 나를 이롷게 함도 역시 중요한 일이다. 그 귀천을 논하자면 천자의 벼슬로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고, 그 가볍고 무거움[경중(輕重)]을 논하자면 천하의 부를 다 차지해도 그것과는 바꿀 수 없고, 그 편안함과 위태로움[안위(安危)]을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끝내 다시는 얻을 수 없다."
○ 이러한 양주의 사상은 <<장자>> 속에서 포함되게 됨
<<장자>> <양생주(養生主)> "착한 일을 할 때는 명예를 경계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형벌을 경계하라. 중도(中道)를 따라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라. 그러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생명을 건질 수 있고, 부모님을 공양할 수 있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다."
☞ 펑유란은 이를 양주의 사상노선을 따른 것으로 보고, 초기 도가에 의하면 인간세상의 각종 해독에 대비하여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최선책으로 보았다고 언급함
○ 만일 어떤 사람의 행실이 흉악하여 형벌을 받는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 못됨. 또 어떤 사람이 너무나 착한 일을 하여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면 이것 역시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방법이 못됨
<<장자>> <인간세(人間世)> "산림은 베어지기 쉽고, 기름은 타버리기 쉽고,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벌목당하고, 옻나무는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 유용하고 능력이 있다는 명성을 듣는 사람은 계피나무와 옻나무와 같은 운명처럼 해를 당할 것임을 경계함
☞질문: 그래서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 쓸모없음[무용(無用)]의 쓸모
<<장자>> <인간세> "나는 무용[無用: 쓸모없음]하기를 오랫동안 원했다.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소원을 이루어 크게 쓰이게 되었다. 만일 내가 유용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크게 될 수 있었을까. ... 세상 사람들은 유용[有用: 쓸모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으나 무용[쓸모없음]의 쓸모는 알지 못하고 있다."
☞ 무용하게 되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길임. 생명을 보존할 줄 아는 사람은 너무 악한 일도 너무 선한 일도 하지 않고 중도를 지키며 살아가고, 무용해지려고 노력함. 이것이 결국 크게 쓰이게 되는 길임
☞질문: 요즘 무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참고: 무쓸모의 쓸모
- 연단술로 발전해 가는 도교의 일부
- 풍우란 지음,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하)>>, 까치, 1999, 438~440쪽
○ 도교의 일파는 수명을 연장하는 방술(方術)을 연구하게 됨
○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지만 도교도 가운데 일부는 인위적으로 노력하여 자연을 극복하려고 했음
갈홍, <<포박자>> "사물을 다루고 조화를 부리는 일에 사람보다 더 신령한 것은 없다. 따라서 옅은 지식에 통달한 사람은 만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심오한 지식에 터득한 사람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유염(兪琰: 송나라가 멸망한 후 은거한 사람) "천지간에서 인간의 위치란 천지간의 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물보다 신령스럽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지칭한 것이니, 어찌 천지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천지의 기밀(천지 조화의 기밀)을 훔쳐 금으로 된 액체 대단(大丹)을 합성해 낸다면 천지와 더불어 서로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을 도모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진인(眞人)이다."
○ 도교의 '단(丹)'
- 중국학 위키백과
- 단(丹)은 붉은 돌을 캐는 우물의 모양을 본뜬 글자임. 가운데 점은 붉은 돌의 모양을 본뜬 것임. 우물 정(井)에 점이 더해진 것으로 광물을 캐내는 광정(鑛井)에 무엇인가 있다는[점] 의미를 나타내는 지시부호임
- 한나라 때 유행했던 방사(方士)들은 불로장생을 위해 단사(丹砂, 붉은 색을 내는 광석)를 많이 먹었는데 단사를 약으로 보았기 때문에 단약(丹藥)이라고 했음
- 도교에서 말하는 단(丹)에는 내단(內丹)와 외단(外丹)의 구별이 있음
- 외단은 몸 바깥에서 약을 구해서 정련하여 단을 만들어 복용하면 장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진시황과 한 무제가 구했던 선약(仙藥)이 바로 그런 종류임
☞ 제주도에 남아있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파견한 서복 흔적[출처: <<중앙일보>> 2019.1.20일자 "진시황, 장생불사의 약 제주 여기서 찾았다"
- 내단은 우리 몸 속의 정(精), 기(氣), 신(神)을 단련함으로써 생기는 것으로 우리 몸은 곧 하나의 작은 우주[소우주]로서 그 안에도 음양과 8괘가 있으니 장생의 도는 돌이켜 자기 안에서 구하면 충분하므로 정말로 바깥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
소요유에 등장하는 인물2: 송영자[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함의 상징]
而宋榮子(이송영자) 猶然笑之(유연소지)하야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차거세이예지이부가권)하며 擧世而非之而不加沮(거세이비지이부가저)하나니 定乎內外之分(정호내외지분)하며 辯乎榮辱之境(변호영욕지경)이라 斯已矣(사이의)니 彼其於世(피기어세)에 未數數然也(미수수연야)로다마는 雖然(수연)이나 猶有未樹也(유유미수야)로다
송영자(宋榮子)는 이런 자기 만족의 인물들을 빙그레 비웃는다. 그리하여 그는 온 세상이 모두 그를 칭찬하더라도 더 힘쓰지 아니하며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비난하더라도 더 기(氣)가 꺾이지 아니한다. 그러니 그는 ① 자기의 내면과 밖의 외물(外物)의 구분을 확립하고 ② 영예나 치욕 따위가 바깥 경계[境域]의 일임을 변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할 뿐이다.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하기는 하나 비록 그러나 아직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주체성이 수립되지 않고 있다.
- ① 자기의 내면과 밖의 외물(外物)의 구분을 확립
○ 자기의 내면과 밖의 외물의 구분을 확립함. 송영자는 본심이 안[內]이고 모든 물(物)은 밖[外]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와 외의 구분을 확실하게 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임희일)
- ② 영예나 치욕 따위가 바깥 경계[境域]의 일임을 변별
○ 영예와 치욕의 경역을 변별한다는 의미이지만, 임희일은 외물의 세계를 좇으면 영예와 치욕이 있게 되고 내면의 본심에 충실하면 영예와 치욕에 초연할 수 있다고 이해하여 “명예와 치욕이 모두 바깥 경역의 일임을 변별한다[能辨榮辱皆外境矣].”는 뜻으로 풀이
- 장자의 분별지(分別智)
☞ 이현철, <장자의 물(物)과 지(知)에 관한 고찰>, <<서강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139~168쪽
○ 공자의 정명론: 분별지(分別智)의 중시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올바르지 못하고 말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을 이룰 수가 없다." -<<논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논어>>
○ 장자의 지(知)에 대한 인식은 노자에서 출발함
- 노자: "지혜가 나타나니 큰 거짓도 있게 되었다." => 유가 분별지에 대한 한계 지적
- 장자: 원래 하나의 상태인 세상만물이 분별지에 의해 끝없이 분화되기에 세상만물의 왜곡을 없애기 위해서는 분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함
- <<장자>> <추수(秋水)에서 장자와 혜시의 대화>
① 장자: 피라미가 물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② 혜시: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 ③ 장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못하는지 안단 말인가? ④ 혜시: 내가 자네가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자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까, 자네 역시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네. ⑤ 장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말하길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어온 것일세. 나는 그것을 호숫가에서 알았지.
☞ ① 장자: 피라미가 물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 ② 혜시: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하는가?: 혜시가 ‘장자’와 ‘물고기’를분별하는것으로 물(物)과 물(物)의 동일 보다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물고기를 분별했음, 아는지 모르는지의 옳고 그름을 언급하고 있음
☞ ③ 장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못하는지 안단 말인가?:‘장자와 물고기’가 서로 소통될 수 없다면, ‘인간과 인간’은 어떻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반문함. 인간이 비록 언어를 매개로 한다고 해도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사람과 물고기’는 물론이고 사람끼리도소통은 불가능함. 분별에 집착한다면 그 어떤 것도 소통이 불가능함
☞ ④ 혜시: 내가 자네가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자네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까, 자네 역시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네.: 혜시의 반박은 ‘사람과 물고기’, ‘장자와 혜시’의 차이 즉, ‘물(物)과 물(物)’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대립시키며 분별하고 있음
☞ ⑤ 장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말하길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어온 것일세. 나는 그것을 호숫가에서 알았지.: 다시 만물의 근원인 도(道) 즉, “분별 이전으로다시돌아가 보세”라는 말처럼 들림. 타자의 마음은 원래 알 수가 없는 것이라면 혜시는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를 것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장자가 역으로 비판한 것임. ‘모를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의 마음은 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므로(모른다는 것을‘안다’) 이는 혜시의 ④번 주장과 모순됨.
=> 장자는 “나는 그것을 호숫가에서 알았지”라고 말함으로써자신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이유를 어떤 경험이나 매개가아닌‘직관’이었다는 것을 고백함. 이 직관은 분별을 뛰어넘은 도(道)의 관점에서‘물고기의 즐거움’을 파악했다고 추정할 뿐, 애석하게도 장자가그‘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았는지?’, ‘장자가 말하는 물고기의 즐거움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음. ‘도(道)는 존재하지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
소요유에 등장하는 인물3: 열자[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함의 상징]
夫列子(부열자)는 御風而行(어풍이행)하야 泠然善也(영연선야)하야 旬有五日而後(순유오일이후)에 反(반)하나니 彼於致福者(피어치복자)에 未數數然也(미수수연야)니라 此雖免乎行(차수면호행)이나 猶有所待者也(유유소대자야)니라 若夫乘天地之正而御六氣之辯(약부승천지지정이어륙기지변)하야 以遊無窮者(이유무궁자)는 彼且惡乎待哉(피차오호대재)리오
저 ① 열자(列子)는 바람을 조종하여 하늘을 날아다녀 가뿐가뿐 즐겁게 잘 날아서 ②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 그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의 행복을 구하는 일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비록 걸어다니는 번거로움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아직 무엇엔가 의존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저 〈바람 정도가 아닌〉 하늘과 땅의 바른 기(氣)를 타고 ③ 육기(六氣)의 변화를 조종하여 ④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것이겠는가.
- ① 열자(列子)
바람을 타고 나는 열자 - 열자;제2편 황제[3]-
열자가 노상씨를 스승으로 섬기고, 백고자를 벗으로 삼아 두 사람의 도를 다 배운 뒤에 바람을 타고 날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윤생이라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열자를 따라 다닌 지 수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자기 집안의 일은 전혀 돌보지를 못하였다. 틈이 있을 때마다 열자에게 바람을 타고 다니는 술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을 하였으나 열자는 한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윤생은 원한을 품고 열자에게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열자는 그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윤생은 허락 없이 물러간지 두어 달만에 다시 열자에게 갔다. 열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왔다 갔다 하십니까?” 윤생이 대답하였다. “얼마 전에 제가 선생님께 바람 타는 방법을 여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도무지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감정이 풀어져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열자가 말하였다. “얼마 전까지 나는 당신이 도에 통달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어찌 그리 비루 하십니까? 거기에 앉으십시오. 내가 나의 스승님에게 배운 것을 당신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내가 노상씨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고자를 벗으로 삼은 지 삼 년이 된 후에 마음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감히 생각하지 못하였고, 입으로는 감히 이해타산에 관한 말을 하지 못할 때, 비로소 선생님께서 한번 곁눈질로 나를 보셨습니다. 그 후 오 년이 된 후에는 마음으로 다시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입으로 이해타산에 관한 말을 할 때에 비로소 엄하신 얼굴이 풀리어 나를 한 번 보고 웃으셨습니다. 그 후 칠 년이 지난 후에는 마음대로 생각하여도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몰랐고, 입으로 말을 해도 이해타산을 따질 줄 몰랐습니다. 그 때서야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같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 후 구 년이 된 뒤에는 마음대로 생각을 하고, 입으로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하여도 나의 옳고 그른 것과 이롭고 해로운 것을 모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옳고 그른 것과 이롭고 해로운 것까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상씨가 나의 스승인지 백고자가 나의 친구인지도 느낄 수가 없어 누가 나하고 더 가깝고 누가 나하고 더 먼지도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 후에는 나의 눈이 귀인 것 같기도 하고, 나의 귀가 코인 것 같기도 하고, 나의 코가 입인 것 같기도 하여 모든 감각 기능이 다 한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또 나의 마음은 모여 하나가 되고, 형체는 얼음 같이 풀어지고, 뼈와 살은 다 녹아버려 몸둘 곳과 발붙일 데를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몸은 바람부는 대로 동쪽으로 날려가기도 하고 서쪽으로 불려가기도 하여 마치 나뭇잎이나 마른 나무 껍질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는 바람이 나를 태우고 있는지 내가 바람을 타고 있는지 도무지 느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문하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몇 번씩이나 나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가지고는 당신 몸에서 손가락 하나도 기운을 받을 수가 없고, 다리 하나도 이 땅 위에 설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발이 허공을 밟고 바람을 타고 다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윤생은 부끄러워 한참동안 감히 말을 더 하지 못하였다.
○ 열자에 관한 그림
☞ Liezi in the Wind, c. 1810-1813, Katsushika Hokusai, 출처: [Minneapolis Institute of Art 홈페이지 https://collections.artsmia.org/art/2003/liezi-in-the-wind-katsushika-hokusai]
- ②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온다.
○ 복영광사(福永光司)는 15일을 1년의 정수(整數) 360일을 24기(氣)로 나눈 1기(氣)의 기간으로 보아, 바람이 바뀌는 15일마다 지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열자의 비상이 자연의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지만, 지전지구(池田知久)의 경우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의 용례를 들어 24절기와는 무관한 표현으로 보고 복영광사(福永光司, 후쿠나가 미츠지)의 이 같은 주장에 반대하고 있음
○ 한편 한원진(韓元震)은 이 구절을 두고 “순유오일이후반(旬有五日而後反)은 15일 뒤에는 도와 서로 어긋난다는 뜻이니 마치 안연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지만 석 달 뒤에는 인을 어김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旬有五日而後反 言旬日之後 與道相違也 如顔子三月不違仁 而三月之後 不能無違仁者也].”고 풀이하여 안연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열자도 아직 지인(至人)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했음
- ③ 육기(六氣)의 변화
○ 육기(六氣)는 음(陰), 양(陽), 바람[風], 비[雨], 그믐[晦], 초하루[朔] 등의 자연현상[성현영(成玄英), 임희일(林希逸) 등].
- ③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대체 무엇을 의존할 것이겠는가
○ 끝없는 경지에 노닌다는 뜻의 유무궁(遊無窮)은 〈제물론(齊物論)〉편 제3장의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몰아서 사해(四海)의 밖에서 노닌다[乘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外]’와 이 편의 제3장 ‘구름 기운을 타고 비룡을 몰아 사해 밖에 노닌다[乘雲氣 御飛龍 而遊乎四海之外]’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함
○ 상상을 초월한 터무니없이 거대한 붕새, 이 붕새도 결국은 물(物)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앞의 ‘바람을 타고 날아다님[어풍이행(御風而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음
○ 그러나 장자가 큰 붕새, 대붕(大鵬)의 소요를 묘사한 것이 모든 땅 위의 작은 움직임과 인간의 왜소함을 초월한 어떤 초월자, 절대자를 상징하기 위한 것임은 틀림없음. 그리하여 그 장자의 절대자는 ‘하늘과 땅의 바른 기(氣)를 타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조종하여 끝없는 경지에 노닐 줄 아는[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 초월자임
○ 천지대자연의 생성변화와 그대로 한몸이 되어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유의 세계에 노니는 자, 이 절대자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음
최고의 경지: 지인, 신인, 성인
故曰至人(고왈지인)은 無己(무기)하고 神人(신인)은 無功(무공)하고 聖人(성인)은 無名(무명)이라하니라. 그래서 ‘①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② 신인(神人)은 공적이 없고 ③ 성인(聖人)은 명예가 없다’고 한다.
- ①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至人(고왈지인)은 無己(무기)]
○ 여기 〈소요유〉편 제1장의 말미에 보이는 지인(至人)‧신인(神人)‧성인(聖人)은 장자에 있어서의 소요유의 실천자로 볼 수 있음
○ 이 장자적 소요유의 실천에 있어서의 무기(無己, 자기가 없음=자기의 무화(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지인(至人)이라 하고, 무공(無功, 공적이 없음=공적의 무화(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신인(神人)이라 하고, 무명(無名, 명예가 없음=명성의 무화(無化))의 면의 실천자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지인‧신인‧성인 사이에 특별히 차등이 설정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름
○ 실제로 지인(至人)과 성인(聖人)을 동격으로 본 예는 외편(外篇) 〈달생(達生)〉편(제2장)의 ‘지인은 물속을 잠행하더라도 질식하지 않는다[至人潛行不窒]’와 ‘성인은 자연에 몸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성인을 해칠 수 없다[聖人藏於天]’, 〈지북유(知北遊)〉편(제2장)의 ‘이 때문에 지인은 무위하며 위대한 성인은 작위하지 않는다[是故至人無爲 大聖不作]’, 잡편(雜篇) 〈어부(漁夫)〉편의 ‘그가 지인이 아니라면 남을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므로 도의 존재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존중하는 것이다[彼非至人 不能下人……故道之所在 聖人尊之].’ 등에서도 찾을 수 있음
○ 그러나 잡편 〈경상초 (庚桑楚)〉편(제1장)의 ‘내가 듣기로 지인은 작은 방 안에서 조용히 숨어 살고 백성들은 멋대로 날뛰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나를 어진 사람으로 떠받들려 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현인(선인)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자의 말에 어긋나게 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吾聞至人尸居環堵之室 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 今以畏壘之細民 而竊竊焉欲俎豆予于賢人(=聖人)之間 我其杓之人邪]’라고 한 부분을 읽어보면 분명 지인(至人)을 성인(聖人)보다도 위 격(格)인 최고의 경지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음
○ 지인(至人)에 대하여는, 초월자이면서 세속 안으로 들어와 명합(冥合, 만물과 융화되어 혼연히 하나로 합쳐짐)‧현동(玄同, 현묘한 하나됨)하는 지고(至高)의 도(道)에 도달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음
○ 무기(無己)는 사욕이 없다던가 아집이 없다던가 하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고, 주체(主體)로서의 자아가 천지‧만물 속에 융즉(融卽)하여 무화(無化)되어 있는 것, 다음의 〈제물론〉편에서 주로 추구되는 테마의 하나임[지전지구(池田知久)]
- ② 신인(神人)은 공적이 없고[神人(신인)은 無功(무공)]
○ 신인(神人)은 영묘(靈妙)한 능력의 소유자로 행‧불행에 초연한 사람. 무공(無功)은 공적의 무화(無化)
- ③ 성인(聖人)은 명예가 없다[聖人(성인)은 無名(무명)]
○ 세속의 가치 평가에 무관심한 성인은 명예가 없음. 즉 성인 앞에서는 세속적 명성 따위는 무화(無化)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