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 미학
☞ 임태승, <<소나무와 나비: 동아시아 미학의 두 흐름>>, 심산, 2004
형신(形神): 마음을 담아내는 몸, 정신을 드러내는 눈빛[편집 | 원본 편집]
<어찌 된 일인가!> 만고절색이라는 서시(西施)의 얼굴을 그렸다 하나, 예쁘기는 해도 마음까지 홀리지는 않는다. 또 천하용장 맹분(孟賁)의 눈을 나타냄에, 크게는 그렸어도 두려움까지 자아내지는 못한다. 모두가 헛껍데기만 그렸을 뿐 그 내면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남자>> <설산훈(說山訓)>
피리 연주에 두 명의 악사가 달려들어 하나는 입으로 불기만 하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소리 구멍만을 다룬다면, 설령 음정과 박자가 적절한 듯해도 귀에 순하게 들리진 않는다. 이유인즉, 그 음질을 주재하는 내면세계가 하나가 아니니 그저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회남자>> <설림훈(說林訓)>
- 형(形)과 신(神)의 문제는 곧 몸과 마음의 문제로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임. 특히 한나라 때 <<회남자>>에서는 "내면의 정신이 외형보다 중요하다."는 관념이 등장했음. 형은 몸에 해당하고 신은 마음, 정신에 해당함
- 신은 동아시아 미학과 예술에서 줄곧 중요시되어 왔음. 중국 화가인 고개지(顧愷之, 344?~405?)는 인물화에 인물이나 사물의 내재적 정신의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음. 그리고 특히 눈에 대한 묘사를 중시했음
고개지가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 쉽게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기에 누군가 그 까닭을 물었는데, 답하기가 이렇다. 형체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만으로는 대상을 진정으로 밝혔다 할 수 없으니, 그 진실한 속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눈의 묘사에 달린 것이다. -<<진서(晉書)>>, <고개지>
=> 고개지는 회화에서 인물을 그리기 가장 어렵다고 했고 그 이유는 정신의 그윽한 경지를 드러내야 할 눈에 대한 묘사가 가장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임. 눈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대변한다고 보았음
- 하지만 이후 인물화에만 그치지 않았음. 인물에서 산수, 더 나아가 여타 사물로의 제재의 변화는 곧 신 개념의 외연의 확대와 연관되었음. 인간에게만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와 매란국죽 같은 인체가 아닌 것에도 신이 있으며, 이러한 물(物)의 신까지도 표현해 내야 하는 것으로 발전되었음. 무생명의 산수에도 역시 신이 있다고 보아 신의 개념을 인물에서 산수까지 확장시킨 이는 종병(宗炳, 375~443)임
산수의 경우, 그 존재는 형이하학적인 것[질(質)]이지만 형이상적인 도의 상징으로서의 신령함[영(靈)]도 지닌다. -<<화산수서(畵山水序)>>
신이란 원래 근거가 없는 무형의 것이나, 형태 있는 것에 깃들며 또 비슷한 형상의 사물에도 감응하게 마련이다. 생동하는 형상의 주인이 바로 이것이라 할 것이다. -<<화산수서(畵山水序)>>
- 종병은 신은 무형의 것이지만 형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산수를 그릴 때 화가는 반드시 "마음을 담아내는 몸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음
- 작가는 인물이라는 심미대상을 응시함으로써 그의 본질을 간파해 내는데 여기에서 물의 신(神)은 화가 자신의 신(神)과 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임. 그리고 작품에 화가 자신이 해석해 낸 신을 표현해 내는데 감상자는 인물화의 눈에 서려 있는 내재본질[물의 신]을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세계[인간의 신]와의 합일을 추구함
기(氣): 기운은 몸을 타고, 이어 손으로 다시 붓으로[편집 | 원본 편집]
-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중시: 기(氣)는 내면에 함축된 것, 운(韻)은 바깥으로 드러난 것임. 그리고 이 '기'를 '운'하는 과정은 생동감이 있어야 함
- 기운은 서화에서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연계된 일정한 리듬감이며 이러한 리듬감이 낳은 운율을 말함. 여기에서 기는 일종의 운동의 감각, 각가의 흐름임. 그리고 운은 이러한 운동의 규율과 리듬이 드러난 음악감임
- 작가는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단지 손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체와 영혼이 함께 이 일에 참여함. 도화지 위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붓놀림은 모두 작자의 생명의 붗꽃을 태운 흔적임
- 동양미학에서의 기
1. 예술의 근원. 우주의 원기(元氣)는 만물의 생명을 이루고 만물의 변화를 부추김. 그리하여 사람의 정신을 감동시켜 움직임으로 예술을 낳게 함. 따라서 예술작품은 사물에 깃들어 있는 우주만물의 본체와 생명력으로서의 기를 묘사해야 함
2. 기는 예술가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말해주는 범주임. 기는 사람의 생명력과 창조력의 근원임. 예술가의 예술창조 활동은 바로 기의 운행 변화를 나타내는 것임. 예술은 예술가의 모든 몸과 마음이 조화되고 일치된 활동임
3. 기는 예술작품의 생명을 보여주는 범주임. 기는 세계 만물의 본체 및 만사만물과 예술가의 모든 생명력과 창조력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의 생명까지도 형성하는 것임. 기운생동은 바로 이러한 기의 성격을 잘 나타내줌
=> 예술가의 기와 작품의 기는 일치함. 기는 곧 힘이며 생명이 있는 운동성을 지님. 예술가는 생동하는 기운을 추구함
- 청나라 정판교(鄭板橋, 1693~1766)가 말한 창작 과정
나그네 마음에 비친 가을빛은 맑기도 하다. 일찍이 일어나 강둑의 대숲을 바라본다. 새로 돋는 햇살을 덮을 듯 자욱하게 일어난 물안개며 촉촉이 듣는 이슬 기운이, 성긴 죽대와 빼곡한 댓잎 사이로 넘을락 무를락 하는 광경이라! 가슴속으로 물리칠 수 없는 감흥이 밀려오는데, 기실은 눈앞의 대[안중지죽(眼中之竹)]와는 다른 마음의 대[흉중지죽(胸中之竹)]렸다. 서둘러 먹을 갈고 종이를 펼쳐 마음에 잡한 대나무를 풀어놓는데 어쩌면 이 대나무[수중지죽(手中之竹)]는 또한 마음에 재웠던 그 대나무는 이미 아닌 것이다. -정섭(鄭燮, <<판교제화란죽(板橋題畵蘭竹)>>
=> 대나무 그리는 작업을 예로 삼은 이 창작 과정은 눈앞의 대상물[안중지죽]이 먼저 마음속에서 심미형상화[흉중지죽]된 후 다시 필묵을 통해 그 심미형상을 표현해냄[수중지죽]을 이르는 것임. 눈앞의 대상물이 내 마음에 들어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 사연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로 마음 속에 자리잡음. 그리고 이러한 마음 속 대나무를 붓을 들어 표현해 내는 순간, 자연물로서의 대나무가 아닌 내가 부여한 상징과 기운생동한 붓놀림이 융합된 초자연물로 승화됨
-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말한 형을 주재하는 신, 기운을 타고 이루어지는 글씨
무릇 서예라 함은 이렇다. 먼저 먹을 간다. 정신을 집중한다. 다음에 글자의 크기와 모양, 흐름과 떨림을 가늠한다. 이제 나의 정의(情意: 감정과 뜻)는 몸을 타고 이어 손으로 다시 붓으로 흘러나오려니 이 때 내 마음에 미리 정한 뜻이 없다면 글씨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왕석군제위부인필진도후(王右軍題衛夫人筆陳圖後)>
- 서예의 우열로 치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글씨가 상품(최고 등급)이고 눈에 차는 글씨는 하품(최하 등급)"이라고 했으며 "눈빛에나 맞추는 솜씨로는 풍미하는 기운의 생명에 미칠 수 없다"고 했음
품(品): 졸박(拙樸)이 으뜸이요, 득도(得道)는 버금이다[편집 | 원본 편집]
- 장자의 포정해우
소 잡는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어서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되었으며,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경락(經絡)과 긍경(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백정은 한 달에 한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켜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그 상태로)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스스륵 하고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듯하면,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칼을 닦아서 간직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道)를 터득했다.”
-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는 '기기득도(棄氣得道)'는 동양예술에서 신품(神品)의 경지로 여겨졌음. 기예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의 수준을 말함. 이는 기예의 측면에서의 단순한 최고봉을 의미하지 않으며 거기에 더하여 예술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성정(性情)을 그 기예에 담아냄에 나무랄 데 없는 경지를 말하는 것임. 예술의 원리[도(道)]를 터득한 단계이고 예술의 시작과 끝을 꿰뚫는 수준임
- 하지만 이를 넘어선 최상위의 품격은 졸박미였음
회화의 일격(逸格: 뛰어난 품격]이라, 무어라 해야 할까. 그림의 꾸밈없는 순박함이 이를테면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리는데 그림쇠[규(規): 원을 그리는 도구]와 곱자[구(矩): 네모를 그리는 도구]를 쓰지 않은 듯 졸박(拙樸)하다 할까. 필치는 간소해도 모양은 온전히 갖추어져 있으니 자연의 진실한 본성이 배어 있도다. -왕휴복, <<익주명화록>>
서예를 배우는 자는 먼저 자연스러운 소박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숙련의 단계를 추구해 나간다. 숙련의 단계에 이르면 다시 인공의 흔적이 없는 한층 세련된 질박함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손대지 않은 듯한 질박함이야말로 진정한 세련의 극치인 것이다. -유희재(劉熙載, <<예개(藝槪), 서개(書槪)>>
=> '자연 -> 숙련 -> 세련된 질박함'이라는 삼단식은 모두 소박한 자연스러움으로부터 출발하여 세련되고 공들인 단계를 거쳐 최후에는 한층 차원 높은 질박함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나타낸 공식들임
- <<장자>>에 나타난 진정한 화가의 모습
송(宋)의 원군(元君)이 그림을 그리게 하려 하니 많은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분부를 받자 읍을 하곤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 붓을 손질하고 먹을 갈며 대기하였다. ... 이런 참에 한 화가가 뒤늦게 나타났다. 헌데 분위기를 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에 느즈러진 몸짓으로 겨우 읍이나 하곤 그만 돌아가 버렸다. 이상하다고 여긴 원군이 가서 보라 하니, 벌거숭이인 채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원군이 탄복했다. "옳거니! 이 사람이 진짜 화가로구나."
☞ 졸박미 예시: 국립현대미술관 2021년 전시
허와 실[편집 | 원본 편집]
- 동아시아 미학에서는 비어있는 허(虛)를 중시했음. 그림 부분과 여백 부분이 호응 혹은 결합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공백 부분에서 상상을 발휘하도록 했음
- 노장철학은 "허무(虛無)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음. 진정한 본질은 도와 무라고 보았음. 감각기관으로 얻는 형태와 색, 명성의 틀을 탈피해야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음
- 서화에서의 흰 여백은 군더더기 공간이 아니라 허공일 수도 가득 찬 것일 수도 있음
☞ 여백의 미
오늘의 토론 주제(2022.11.25)[편집 | 원본 편집]
☞ 졸박미를 보여주는 작품을 하나 선정하고 그것의 의미를 이야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