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제21장, 제38장

An_SW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노자>> 제21장[편집 | 원본 편집]

☞ 번역문 출처: 동양고전종합DB

 孔德之容(공덕지용)은 唯道是從(유도시종)이니 道之爲物(도지위물)이 唯恍唯惚(유황유홀)이라.
 惚兮恍兮(홀혜황혜)로다 其中有象(기중유상)이며 恍兮惚兮(황혜홀혜)로다 其中有物(기중유물)이며
 窈兮冥兮(요혜명혜)로다 其中有精(기중유정)이며 其精甚眞(기정심진)이로다 其中有信(기중유신)이니라
 自古及今(자고급금)히 其名不去(기명불거)하여 以閱衆甫(이열중보)니라
 吾何以知衆甫之狀哉(오하이지중보지상재)리오 以此(이차)로다
텅 빈 덕(德)[큰 덕]의 모습은 오로지 도(道)를 따를 뿐이다. 도라는 것은 오로지 황(恍)하고 오로지 홀(惚)하다.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으며,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으며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으며, 그 정기(精氣)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아 이로써 만물의 태초(太初)를 살필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처음 모습을 알겠는가. 이 (도)로써 알 뿐이다.


  • <<노자>> 제21장에 대한 왕필 주석 들여다보기
 孔德之容(공덕지용)은 唯道是從(유도시종)이니 道之爲物(도지위물)이 唯恍唯惚(유황유홀)이라.  
 텅 빈 덕(德)[큰 덕]의 모습은 오로지 도(道)를 따를 뿐이다. 도라는 것은 오로지 황(恍)하고 오로지 홀(惚)하다.

왕필 주:
○ 공(孔)은 텅 비다는 뜻이다. 오로지 텅 빔을 덕으로 삼은 후에야 비로소 행동이 도를 따를 수 있다.
○ ‘황홀(恍惚)’이란 (구체적인) 형체가 없고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음에 대해 감탄한 것이다.


 惚兮恍兮(홀혜황혜)로다 其中有象(기중유상)이며 恍兮惚兮(황혜홀혜)로다 其中有物(기중유물)이며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으며,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으며

왕필 주:
○ (도가) 무형[형체 없음]으로 만물을 시작하고 매이지 않음으로 만물을 이루어준다. 만물은 (이 도에 의해) 시작하고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물건이 있으며,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고 했다.


참고: 노자 제14장에서 말한 도의 모습으로서의 황홀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이夷(무색)라고 부른다.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들어보고자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를 희希(무성)라고 부른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를 미微(무형)라고 부른다. 이들 세 가지는 각각 인간의 감각으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본래 이것들은 뒤섞여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윗부분이라고 해서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랫부분이라고 해서 어둡지도 않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길이 없다. 그것은 형태, 모습이 없는 비존재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형태가 없는 형태, 모습이 없는 모습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황홀(恍惚,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窈兮冥兮(요혜명혜)로다 其中有精(기중유정)이며 其精甚眞(기정심진)이로다 其中有信(기중유신)이니라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으며, 그 정기(精氣)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왕필 주:
○ 요명(窈冥)이란 깊고 아득함을 탄식한 말이다. 깊고 아득하여 볼 수가 없지만 만물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가 도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도가 만물의) 참된 것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다.”라고 했다.
=> '정기'로 풀이한 '정(精)'은 정기, 정력, 생명력 등 다양한 풀이가 있는데 어떤 이는 가장 정수가 되는 기라고 말한다. 최진석은 이를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참되게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노자 지음, 김원중 옮김, <<노자 도덕경>>, 휴머니스트, 2021, 103쪽 참고)
○ 신(信)은 믿을 만한 증험이다. 만물이 그윽하고 아득함으로 돌아가면 참된 정기의 극치를 얻고 만물의 본성이 정해진다. 그래서 “그 정기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고 했다.


 自古及今(자고급금)히 其名不去(기명불거)하여 以閱衆甫(이열중보)니라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아 이로써 만물의 태초(太初)를 살필 수 있다.

왕필 주:
○ 지극한 참됨의 극치는 이름 지을 수 없으니, ‘무명[無名(이름 없음)]’은 바로 그 이름이 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것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 ‘중보(衆甫)’란 만물의 시작이니, '이로써 만물의 태초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은 이름 없음으로 만물의 시작을 살핀다는 뜻이다.

<<노자>> 제38장[편집 | 원본 편집]

 上德(상덕)은 不德(부덕)이라 是以(시이)로 有德(유덕)이요 
 下德(하덕)은 不失德(불실덕)하니 是以(시이)로 無德(무덕)하니라
 上德(상덕)은 無爲(무위)하나 而無(以)爲(이무이위)하고 
 下德(하덕)은 爲之(위지)하나 而(有)以爲(이유이위)하니라
 上仁(상인)은 爲之(위지)하나 而無以爲(이무이위)하며
 上義(상의)는 爲之(위지)하나 而有以爲(이유이위)하며
 上禮(상례)는 爲之(위지)호대 而莫之應(이막지응)이면 則攘臂而扔之(즉양비이잉지)하니라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이요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이요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요 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니라
 夫禮者(부례자)는 忠信之薄(충신지박)이니 而亂之首(이란지수)라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덕이 있고,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그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 때문에 덕이 없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하여 하는 것도 없다.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작위적으로 한다. 높은 인(仁)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행하는 데 작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높은 의(義)를 지닌 사람은 그것을 행하는 데 작위적으로 한다. 높은 예(禮)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을 잡아당겨 (억지로)한다. 그러므로 도(道)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게 된다. 무릇 예란 진실함[忠]과 믿음[信]이 옅어진 후에 생긴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 된다

왕필 주:
○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 (그 덕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 덕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버린다.


<<노자>> 속 덕에 관한 구절들[편집 | 원본 편집]

 제51장
道生之(도생지)하고 德畜之(덕축지)라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길러준다.
 제55장
含德之厚(함덕지후)는 比於赤子(비어적자)하니 蜂蠆虺蛇不螫(봉채훼사불석)하고 猛獸不據(맹수불거)하고 攫鳥不搏(확조불박)이니라 ... 物壯則老(물장즉로)하니 謂之不道(위지부도)라 不道(부도)면 早已(조이)니라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갓난아기에 견줄 수 있다. 벌과 전갈, 도마뱀과 뱀도 쏘지 않고, 맹수도 덤비지 않고, 날짐승도 낚아채지 않는다. 뼈가 여리고 근육이 부드러운데도 꽉 움켜쥐면 빼기 어렵다 ... 만물은 장성하면 곧 노쇠해지니 이를 일컬어 도(道)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도에 맞지 않으면 일찍 죽는다.


 제68장
善爲士者(선위사자)는 不武(불무)하고 善戰者(선전자)는 不怒(불노)하고 善勝敵者(선승적자)는 不與(불여)하고 善用人者(선용인자)는 爲之下(위지하)니 是謂不爭之德(시위불쟁지덕)이며 是謂用人之力(시위용인지력)이며 是謂配天(시위배천)이니 古之極(고지극)이라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용(武勇, 무예와 용맹)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을 잘 이기는 자는 함께 다투지 않고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아래로 낮추니 이것을 일컬어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 하며, 이것을 일컬어 사람을 부리는 능력이라고 하며,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한다고 하니 옛날의 [무인(武人)들의 가져야 하는 덕의] 정점이다.

오늘의 토론 주제 (2022.09.23)[편집 | 원본 편집]

1. 자신이 여태까지 생각해온 덕과 <<노자>>의 덕의 공통점과 차이점은?2. <<노자>>의 덕의 지혜를 어떻게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토론 내용 (2022.09.23)[편집 | 원본 편집]

  • 우리가 생각해온 덕과 <<노자>>의 덕과의 공통점

○ 실천, 선(善), 관용, 겸손(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음)

=> 우리가 지켜가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덕목으로 해석해도 될는지?


  • 우리가 생각해온 덕과 <<노자>>의 덕과의 차이점

○ 우리가 생각해온 덕은 쌓는 것, 발전적인 것, 성장하는 것, 후천적인 것이라면 <<노자>>의 덕은 선천적인 것, 품고 있는 것, 자연스러운 것
○ 우리가 생각해온 덕은 겉으로 보이는 선한 행동, 착한 행동이었다면 <<노자>>의 덕은 스스로 덕이 있음을 느끼고 있지만 스스로 덕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 <<노자>>의 덕은 형체없음, 정의할 수 없는 것. 지금은 그렇다고 생각해도 아닐 수 있는 것. 그래서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늘 뒤따르는 것
○ 우리는 예를 가장 훌륭한 것, 도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노자>>는 가장 밑에 있는 것임


참고: 유가의 덕과 <<노자>>의 덕 
○ 유가의 덕은 영어권에서는 'virtue'라고 번역하는 반면, <<노자>>의 맥락에서 'efficacy(효력)' 또는 'power(힘)'라고 번역하기도 함 ○ 유가에서 덕은 강력한 도덕적 함축을 가지면서 인의예지와 같은 개념드로가 연결되지만 <<노자>>에서 덕은 이러한 도덕적 함축 보다는 도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됨
=> 참고: 동양고전종합DB


  • <<노자>>의 덕의 지혜, 우리 삶에 적용하기

○ 자만하지 말라, 겸손하라
○ 집착하지 말고 비워라. 욕심을 버려라
○ 처세술을 배울 수 있음. 분쟁 피하기, 상대와의 충돌을 현명하게 벗어나기. 나아가 그런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기
ex) 인터넷에서 벗어나보기


  • 토론을 하면서 갖게 된 질문들

○ 진정한 겸손의 의미는?
○ 토론하려고 할수록, 설명하려고 할수록 <<노자>>의 도, 덕과 멀어지는데 <<노자>>의 도, 덕은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 <<노자>>에서는 도>덕>인>의>예 로 도, 덕, 인, 의, 예를 나누어보고 특히 예를 가장 낮다고 보았는데 왜 그랬을까?


참고: <<노자>>에 보이는 예 
夫禮者(부례자)는 忠信之薄(충신지박)이니 而亂之首(이란지수)라 무릇 예란 진실함[충(忠)]과 믿음[신(信)]이 얇은 것이니 어지러움의 머리이다.
왕필 주: ○ 예를 숭상하고 이를 중시하는 사람은 겉으로 잘 꾸미는 것을 중시하고 관계 맺음의 사소한 것까지 따짐. 그렇게 되면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분노의 감정이 생겨남. 그래서 억지로 사람들에게 시키려고 함 ○ 예는 진실함과 믿음이 돈독하지 못하고 소통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작하는 것임. 겉꾸밈만 따지고 이런 꾸밈만 갖추려고 하고 하찮은 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나뉘어짐. 인과 의는 그나마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예는 바깥을 꾸미는 일이니 오래갈 수 없으며, 그래서 어지러움의 머리가 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