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특수연구: 고힐강
경학(經學)의 흐름 속 『주역』해석사[편집 | 원본 편집]
한대(漢代) 금고문[편집 | 원본 편집]
☞ 요명춘 외 지음, 심경호 옮김, 『주역철학사』, 예문서원, 1994
- 한나라가 유교를 숭상한 이래, 경전해석학인 경학이 흥성하게 됨
- 진나라의 분서갱유 이후 유교경전의 복원 과정에서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었음. 하나는 금문경(今文經)으로 진나라 때 간신히 살아남은 유학자들이 암송한 것을 글로 정리한 것으로 당시 통행되던 예서체로 쓰여 있어서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불렀음
- 금문경학은 유교사상과 음양오행의 학설을 합쳐서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이론을 제시했고 미신적인 내용과 결부되는 경향이 강했음
- 또다른 하나는 고문경(古文經)으로 진나라 이전의 글자로 쓰여 있어서 ‘고문경(古文經)’이라고 불렀음. 고문경은 분서를 거치고도 보존된 옛 서적임
- 이러한 경전 해석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은 『주역』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기반이 되기도 함. 특히 한대(漢代) 상수역이 발전하는 배경이 됨
청대(淸代) 금고문논쟁[편집 | 원본 편집]
☞ 양계초 지음, 이기동·최일범 옮김, 『청대학술개론』, 여강출판사, 1987
- 청대에 들어와서 복고(復古)를 주장함
=> 양계초는 기본적으로 청학(淸學)의 출발점이 송명이학에 대한 일대반동에 있다고 보았음
양계초의 『청대학술개론』중
(송명이학)의 연구의 대상은 순전히 실날같이 영묘하여 파악할 수 없는 것에 있기에, 소수의 빼어나고 진지한 사람은 이 방법대로 하여 심신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를 받들어 세상에 적용한 자가 적었으므로 경박하고 위선적인 무리들이 헛된 말을 주워 섬김으로써 서로 과장하고 선동하기가 매우 용이하였다. ... 거기다가 과거제를 만들어 첩[帖: 당대(唐代)의 과거에서 경서 가운데 어떤 글자를 따서 쓴 종이 쪽지에 대하여 그 경서의 글을 총괄하여 답안을 만들게 하는 시험방법]함으로써 천하사람들을 사로잡으니 학자들은 단지 이러한 송명이학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익히기만 하면 곧 부귀를 누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바람에 쏠리듯 그와 같이 변하여 서로 다투어 공부하지 아니하는 데로 나아갔으며 생각하는 것조차도 없게 되었다.
- 청학의 분열
○ 고증학 연구방법이 정밀하다고 해도 그 연구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었음. 그 가운데 가장 연구성과가 좋았던 것은 훈고부문이었는데 그나마도 몇몇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볼 만한 것이 없었음
○ 청학가(淸學家)들은 사람들에게 옛 것을 숭상하라고 가르치고, 또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옛 것을 숭상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옛 것은 마땅히 숭상해야겠지만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면 옛 것인들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환경의 변화. 청 초기에 경세치용 학파가 단절된 것은 그 학풍이 오직 귀납법적인 연구방법만을 주장하고 공범(公泛)한 것을 싫어한 것에 이유가 있으며 또 당시의 비판을 피해서 스스로 몸을 사렸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음
○ 서학의 유입. 서양과의 교역이 전개되어 서학(西學)이 점차 수입되었으니 먼저 공예(工藝)가 들어오고 다음에 정치제도가 들어왔음. 서양의 문물이 수입되자 먼저 중국의 구정치에 대해 비판을 시도하게 됨. 서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학자들과 청초(淸初) 계몽기의 "경세지학(經世之學)"의 학자들과의 결합이 이루어져 새로운 학파가 탄생되게 됨
- 청학파(淸學派)의 개조, 고염무(顧炎武, 1613~1682)
○ 고염무가 제창한 연구방법
1. 독창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
2. 널리 증거를 찾는 것
3. 실용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
- 청말 금문학과 고문학의 논쟁
○ 청대에 들어와 복고(復古)를 주장하게 되었고 고염부 등의 학자들은 육조(六朝), 당대(唐代)의 주소(注疏)로 돌아갈 것을 제창했음. 염약거로부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577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위서(僞書)라고 공격했음
○ 금문학의 중심은 공양학인데 공양가의 말은 "그 속에 대부분이 굉장히 이상하고 괴이한 논(論)"(하휴(何休)의 공양전주 자서(自序)에 보임)이라는 것으로 위진(魏晉) 이래로 감히 언급하지 못한 것이었음. 청대 유학자들은 고경(古經)에 대해 넓게 공부했음
○ 금문학의 초기에는 오직 공양만을 말하고 다른 경에까지는 미쳐가지 못했음.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한대(漢代) 경학자들의 가법(家法)과 금고양파가 서로 다름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가규, 마융, 허신, 정현만으로 한학(漢學)을 말한다는 것이 미흡함을 알게 되었음. 이때는 일서(佚書)를 편집하는 학풍이 대단히 성행했으므로 고경(古經)에 대한 학설을 수집하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이에 금문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자가 점차 많아지게 되었음
-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금문학
○ 강유위의 최초 저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인데 여기에서 위경(僞經)이란 『주례(周禮)』, 『일례(逸禮)』, 『좌전(左傳)』과 『시(詩)』의 모전(毛傳)을 말하는 것으로 전한말기에 유흠(劉歆)이 박사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것임. 『신학위경고』의 요점을 양계초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음
1. 전한의 경학은 모두 고문이라고 할 것이 없다. 고문이란 모두 유흠의 위작(僞作)이다.
2. 진(秦)의 분서(焚書)는 육경(六經)에는 피해가 없었다. 한대 박사가 전하는 것은 모두 완전한 공문(孔門)의 경전이며 잔결(殘缺)된 것은 없다.
3. 공자 시대에 쓰였던 문자는 곧 진(秦), 한(漢)시대의 전서(篆書)이니 문자로 말하자면 금문이니 고문이니 할 것이 없다.
4. 유흠은 자신의 위작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비서(秘書)였던 당시에 모든 고서(古書)를 흐트려 놓았다.
5. 유흠이 위경을 지은 까닭은 그가 왕망을 도와 한(漢)을 찬탈하고자 하여 먼저 공자의 미언대의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 강유위의 두 번째 저술인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는 당시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 양계초는 그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음
1. 고서를 읽음에 장구, 훈고, 명물(名物), 제도 등의 말단적인 문제에 치우치지 말고 그 의리(義理)를 탐구하는 데 힘쓰도록 가르쳤음. 소위 의리라는 것은 심(心)이나 성(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인의 창법(創法), 입제(立制)의 올바른 의미이니 이에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이 모두 버려지고 새로운 학풍이 생겨났음
2. 공자가 위대한 점은 신학파를 창립하여 인간의 창작정신을 고무했다는 데 있음
3.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에서 경전의 대부분이 유흠의 위조라고 주장하였고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에서는 참된 경전은 모두 공자가 고대에 가탁하여 지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수천년간 신성불가침으로 공인되어 내려온 경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발생하게 하여 학자들이 의심하고 비평하는 태도를 갖게 했음
4. 비록 공자를 극렬치 추존(推尊)했지만 공자가 학파를 창립한 것과 제자(諸子)가 학파를 창립한 동기와 목적과 방법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공자를 제자들과 나란히 배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이는 모든 사람들이 공자와 제자(諸子)를 비교연구할 수 있게 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