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철학: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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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태어난 시대[편집 | 원본 편집]

  • 서주(西周) 말·동주(東周) 초의 사회 동요

춘추시대2.png

☞ 중국사학회 엮음, 강영매 옮김, 『중국통사1』, 범우, 2008, 113~115쪽.

○ 주나라는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에 수도를 두었던 서주와 낙읍(洛邑, 지금의 낙양)에 수도를 옮겼던 동주로 나뉨. 동주시대는 춘추(春秋) 시기와 전국(戰國) 시기로 나뉨. 기원전 770년, 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중앙정권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어 더 이상 제후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음. 제후국들이 서로 겸병하여 큰 나라들이 속출했음. 이처럼 정치·군사적 권위를 상실함에 따라 서주 시대의 예제(禮制), 법제, 문화제도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음. 제후들이 군사력으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쟁탈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목적과 수단이 되어버렸음. 서주의 전제(專制)와 정치 구조의 동요로 인해 각종 지방세력과 각 계층이 각자의 세력을 경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천자와 제후간, 제후와 대부간, 부자지간, 형제지간에 격렬한 투쟁을 불러일으켰음
○ 서주 말, 동주 초, 정권이 소인(小人)으로 충당되고, 어진 사람들이 재야에 묻히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현현의 질서가 파괴됨. 또한 내부적으로 대부들이 반발하고 제후들도 천자에 대한 알현의 예를 드리지 않게 되었으며, 밖으로는 사방의 이민족들이 침범하면서 사회 질서도 파괴됨
○ 서주 시기, 백성을 정치 행위의 주요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고, 백성이 곧 천(天: 하늘)이고, 천명이라는 정치의 근본을 세웠으나 서주 말에 이르러 주 왕실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백성은 다시 착취와 부역 혹은 노동의 대상으로 전락함.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전쟁과 부역에 동원되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빠짐
○ 서주 말,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게다가 전쟁과 흉년까지 겹쳐 최소한의 삶에 대한 소박한 기대마저 허물어지자 사람들은 이제까지 의지하고 신봉하던 ‘천’이나 ‘조상신’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덕’이나 ‘선’과 같은 덕목에 대한 믿음도 점점 약해졌음. 따라서 “하늘은 사방의 백성을 고루 사랑한다”는 사상과 “하늘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상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음. 흉년과 전쟁 등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고 목숨을 잃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지면서, 삶에서 오는 고통에 비례해서 천에 대한 원망도 커지게 됨

『시경(詩經)』에 보이는 하늘을 원망하는 시들

 “하늘은 그 베풀어 줌이 고르지 못하네.”
 “하늘은 저렇게 재앙을 내리시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우리를 괴롭히시네./ 두루 모든 신께 제사 올렸고 온갖 희생들도 정성껏 바치치 않았던가. 이젠 금은보화까지 다 써버렸거늘 하늘이여 어찌 아무런 응답이 없으신가.”


공자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 공자의 탄생

○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 73세에 생을 마감함
○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약소국인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음. 지금의 산둥성 취푸[곡부(曲阜)]에 해당함
취푸 위치

○ 공자의 '자(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이고, 공자의 실제 이름 '구(丘)'였음.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로 공자의 성명은 '공구'였음. 그의 이름은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흘은 하급 무사였음


  • 공자의 성장기

○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음
○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잔치가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는데 그래서 공자가 어려서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으로 보기도 함
○ 젊었을 때에는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했음


  • 공자의 장년기

○ 공자는 제나라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30년 동안 72명의 임금을 만남) 그 왕들이 자기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을 바로 잡아주기를 바랐음. 그 사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공자여행.png

B.C.497~B.C.484에 공자가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던 여정(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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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51세 무렵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공자는 급히 노나라로 돌아옴. 고향에 돌아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부 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음
○ 공자가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가 노나라는 서서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음. 공자가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려는 순간이었음
○ 하지만 정치를 돌보지 않는 노나라 임금을 보고 다시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68세 무렵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편찬하면서 만년을 보냈음


공자의 사상[편집 | 원본 편집]

  • 덕(德)을 품부한 인간 주체의 발견

○ 『논어』에서 공자는 신과 하늘에 대해 기존의 주재적인 천(天)·신(神) 관념과는 다른 태도를 보임
○ 『논어』에서 조상과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과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고 하는 한편, 귀신은 공경해야 하지만 멀리해야 한다고 말함. 또한 사람으로서의 도리도, 삶의 이치도 제대로 모르는데 귀신의 일이나 죽음 후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여 매우 현실 중심적인 태도를 보임
○ 한편 『논어』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자라나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라고 했음. 여기에서 하늘은 사계절이 오가고 만물이 성장하는 자연의 운행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는 하늘의 주재성보다는 법칙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임
○ 공자는 하늘을 인간 주체성 확립의 근거로 제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로 『논어』에서 말한 “하늘이 나에게 덕(德)을 주셨다.”라고 한 것을 들 수 있음.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인 덕은 하늘이 품부한 것으로 하늘이 인간의 내면적 도덕률로 내재화한 것임을 알 수 있음
○ 하늘이 소중한 것 같이 그 하늘이 내린 덕을 부여받은 개개의 인간들은 모두 존귀하며,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덕을 밝힘으로써 天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임. 따라서 덕은 인간의 내면성에서 하늘과 인간이 만나는 매개가 되며, 덕을 밝혀나감으로써 인간의 참모습과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임
○ 중국의 학자 서복관은 공자의 중요한 문화사적 지위를 보편적 인간에 대한 발견으로 보고 그 예로 사회·정치적인 계급적 한계, 전통적인 계급 상의 군자(君子)/소인(小人)식의 구분법을 타파했음을 들었음. 즉 군자와 소인의 경우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 결정되며, 정치적 지위의 경우 그 사람의 재능과 덕성을 임용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 것임 (徐復觀, 『中國人性論史: 先秦篇』, 上海三聯書店, 2001, 57쪽.)
○ 공자는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은 서로 다르다(性相近, 習相遠).”라고 했음. 이는 자연성과 후천적 환경이나 습속에 따른 인위성이 분별될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이는 후에 맹자, 순자의 철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