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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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어디에서 본 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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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 지폐에 실린 문화유산 이야기: <기업은행 블로그>

 ☞질문: 퇴계 이황은 어떻게 우리나라 지폐에 실린 만큼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일까?


퇴계 이황(음력 1501.11.25~1570)의 일생[편집 | 원본 편집]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학사, 2004

  • 출생과 유년시절

○ 이름은 이황(李滉), 나중에 붙여진 호가 퇴계임
○ 음력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 이씨(眞寶 李氏) 가문에서 태어남
○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음
○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춘천 박씨]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
○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홀어머니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말을 들을까 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했음
○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음
○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 퇴계태실(退溪胎室)
- 사진출처: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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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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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박씨가 퇴계를 잉태할 때 꿈에 공자가 대문에 와 있었다고 해서 태실(胎室: 태어난 방)이 있는 곳의 대문을 성임문(聖臨門: 성인이 임한 문)이라고 했음
○ 퇴계는 여섯 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할 수 있었다고 함.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했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했음


  • 퇴계의 어린시절 공부

○ 여섯 살 때인 1506년 이웃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음. 퇴계가 훈장댁 문전에 이르면 먼저 배운 것을 다시 외워서 완전히 익힌 뒤에 들어가 다시 배웠음
○ 열두 살이 되던 해 숙부인 송재 이우(松齋 李堣, 1469∼1517)가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와서 몸조리를 했음. 이 때 사촌동생 "송수령"[송재의 아들, 퇴계보다 한 살 아래]과 퇴계 이황의 형 "이해"와 함께 논어를 배우게 되었음. 송재공에게서 배우고서 학문의 지혜가 열리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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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매일경제 2019.9.16일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매화에 물 주라"하고 앉은채로 운명한 퇴계]

○ 퇴계는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웠음에도 칭찬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때문"이라고 늘 제자들에게 얘기했음
○ 14세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여 시를 익히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18세에는 우주를 관조하게 되고 19세에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터득했음
○ 20세 때 자고 먹는 것을 잊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주역공부에 몰입했음
○ 20세가 넘어서는 혼인하여 아들을 얻었음

 <20대 당시 퇴계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시>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 퇴계의 관직 진출

○ 20세에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
○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이 때 고을의 이순(李純) 목사를 만나 하룻밤 지내면서 황극 내편과 참동계(중국의 갈홍의 신선전)의 수련법을 배웠음. 훗날 퇴계가 유학자로서 수련법을 활용하고 정좌를 한 것도 이 때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음
○ 41세 때에는 독서당으로 선발되어 독서를 하게 되었음. 퇴계는 서당 남쪽 누각의 한구석방을 문회당(文會堂: <<논어>>에 글로 벗을 모은다고 했던 '이문회우(以文會友)'에서 유래됨)이라고 이름짓고 거기서 기거하면서 '독서만록'이란 독서록을 쓰면서 정진했음. 독서당에 뽑히는 것은 문신으로서 덕과 재주를 인정받는 것이므로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풍조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이가 많아서 퇴계는 빈 독서당의 당직을 밤낮으로 혼자 맡아 할 때가 잦았다고 함


  • 흥미로운 조선시대 문화 들여다보기: 독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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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의 독서당로

- 정윤희, 김민주, <독서당(讀書堂)의 독서문화사적 의미와 활용 방안 연구>, <<문화콘텐츠연구>> 19,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2020, 31~57쪽

○ 독서당은 세종 8년 1426년에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제를 실시하는데서 유래했음
○ 영조 때 폐지될 때까지 340여 년간 유지됐음
○ 젊은 나이에 과거를 통해 관리에 임용된 우수한 인재들이 업무에 시달리느라 학문과 독서에서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우수한 젊은 인재를 선발하여 일정기간 직무에서 벗어나 독서에만 전념케 하는 독서제도를 창안했음
○ 성종 시기에 유학자들이 절에 가서 독서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절을 금하고 집에서 독서하도록 했으나 집에서 하는 독서에 방해 요인이 적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신하들 사이에서 이어지자 성종은 다시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는 것을 허락했고 독서를 위한 전용 공간인 '독서당'을 건축하여 그곳에서 독서를 하게 했음
☞ 퇴계는 동호독서당에 있었음. 독서당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보려면 클릭!
○ 동호독서당은 은 중종 12년 1517년에 건립되면서 선조 말까지 활발하게 운영됨.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75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임


  • 가난 극복에 일관한 생활

○ 퇴계는 처음 벼슬길에 나가서는 서울에 살았음. 어린 아들들은 고향에 두었기 때문에 아직 큰 고충을 모르고 지냈음. 30대 후반에 아들이 혼인해서 며느리가 들어오고 이어 손자가 태어나자 조카의 사위 이국량이 워낙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살던 집을 그에게 주고 아들은 처자를 데리고 5,6년간 처가에서 지내게 했음. 아들이 편지마다 처가살이에 대한 고통을 적어 보낼 정도로 이 때 퇴계 가정은 매우 곤궁했음
○ 퇴계는 이 때 '분수를 지키고 천명을 따르자. 내가 궁하므로 너를 처가살이 시키는데 그것은 너의 흉이 아니다. 가난하게 살고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데는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아들을 달래며 가난을 참아나갔음
○ 1548년 48세 때 단양군수로 재직하고 있는 퇴계는 다음과 같은 형편을 아들에게 알리기도 했음

 "권씨부인(자신의 부인) 대상(부인이 죽은 후 2년만에 지내는 제사) 날짜가 임박해 오는구나. 제상은 여기서 보낼 작정이다. 쌀과 면 만들 재료는 보낼 형편이 못된다. 집에서 준비하여라. 다만 저축해 둔 곡식이 없을까 걱정이다."
 "내 갓과 신이 다 낡아서 새로 장만해야 하겠다. 스무날께 베를 보내다오. 옷과 갓을 인편에 부쳐라."

☞ 사사로운 일에는 친척의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공물(公物: 공적인 국가 물건)은 축내지 않고 손을 대지 않을려고 했음

○ 퇴계의 50대, 1553년 봄에는 대사성(국가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기관장)을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그 뒤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려는데 옷과 말이 없어 출발하지를 못하기도 했음.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논의가 이어지기도 했음

 "경술(經術: 유교의 경전에 근거하여 얻은 정치적 기술, 능력)과 문장이 이황의 오른쪽에 설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불러서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난하고 궁하여 서울에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호조에 명하여 충분히 급료를 내리도록 하십시오."

○ 60대에 일생을 정리하고 70이 되어 세상을 떠난 퇴계는 높은 지위와 많은 봉록을 버리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여 극복해가는 데는 큰 목적과 계획이 있었음

퇴계 이황의 일상[편집 | 원본 편집]

  • 퇴계의 평등사상

퇴계는 당시 젊은 정치가들의 개혁 의지가 비참하게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 퇴계는 관직생활 가운데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등의 나름의 고군분투를 했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정치 현실 속에서 출사와 진퇴를 반복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매진했음
○ 퇴계는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양반이나 중인이나 상인이나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예로 대했음
○ 어떤 손님이든 모두 뜰아래에서 맞았으며 자신의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이 전혀 없었음
○ 사람들과 교제할 때 처음은 담담하지만 오래 지낼수록 점점 믿게 되어서 지성으로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함
○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술과 밥상을 차려서 정성껏 대접했음. 생계가 모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을 가르치지 위해서였음
○ 사람을 교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누구나 균등하게 예우한 것임
○ 학문을 좋아했던 퇴계는 학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했음. 비록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대를 높여 자(字)를 부르며 높였음. 제자를 벗으로 대했고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가리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도 읍하여 맞이하고 보냈음


  • 엄숙한 하루 일과

○ 퇴계는 엄숙한 아침 생활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음.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연구를 시작했음
○ 이러한 아침 생활은 서울에서나 고향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도 잘 지켰다고 함
○ 낮에는 독서를 위주로 하고 사색은 주로 밤에 했음

퇴계 이황의 <<자성록>>[편집 | 원본 편집]

- 이희재, <퇴계 <<자성록>>의 일본에서의 판간과 영향력>, <<민족문화논총>> 제57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4, 279~301쪽

○ 퇴계의 <<자성록>>은 다른 사람을 위해 출판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의 삶을 위해 그 자신이 보낸 편지글을 엮은 것임
○ 55세(1555년)에서부터 60세(1560)에 이르는 5년간 즉 사상적인 원숙기에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 22통으로 편집하여 자신의 성찰의 자료로 삼았음
○ 퇴계는 수신(修身)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정이라고 보았음. 평정된 마음을 가져야 사물을 제대로 보며 또한 바람직한 인격도야가 이루어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또한 성급하게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긴다고 보았음
○ <<자성록>>은 한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인 일본에까지 전해졌는데 에도시대의 야마자키 안사이(1618~1682)는 승려였다가 환속한 후, 이 <<자성록>>과 <<주자서절요>>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짐
○ 그의 제자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발탁되어 주자학을 국가경영에 실천한 하야시 라잔(1583~1657)도 퇴계서의 애독자임. 뿐만 아니라 오쓰카 다이야(1678~1750)는 젊어서 한때 양명학을 공부하다가 <<자성록>>을 읽고 나서 정주학을 공부하게 되었음
에도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경탄한 것 가운데 하나는 퇴계의 책이 오사카를 비롯한 각지의 서점에 쌓여 있는 광경이었음. 일본에서 퇴계의 책이 인기가 있었던 것임. 1791년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1681~?)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음

 "오사카에는 서적이 많은 것이 천하의 장관이다. 여러 선비들과 필담을 하는데 그 질문 중에 꼭 물어보는 것은 "도산서원이 있는 곳은 어느 군에 속하는가?" "선생의 후손은 얼마나 있으며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선생은 생전에 무엇을 좋아했는가?" 등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