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과 강릉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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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집 속 대관령[편집 | 원본 편집]
☞ 대관령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무엇이 생각나나요?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4권,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
☞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계묘년(1603, 선조36)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 이방)에게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러운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와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雜戲]로 신(神)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蓋]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 날에 가서 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功)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盛業)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 동해의 동녘에서 그 공 미칠 이 없네 웅장한 풍도에 영특한 기개 이제 수천 년이 되었건만 대령산 꼭대기에서 아직도 제사 받아 해마다 드리는 분향 누구라서 감히 소홀히 하랴 ...
☞ 이러한 풍습은 아직도 전해져오고 있을까?
- 참고: 김유신 장군과 강릉과의 인연
○ 현재 강릉향교가 위치해 있는 곳은 화부산(花浮山)임
○ 화부산(花浮山)은 예로부터 역사적인 유적지였던 것으로 보임. 이 화부산은 봄에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벚꽃 명소이기도 함
○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수인 김유신(595~673) 장군을 모신 사당이었던 화부산사가 위치해 있었음
○ 지금은 강릉역 확장(1963)으로 교동 임영고개 마루에 위치해 있음
○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은 강릉이 신라의 변방이었던 시기에 말갈족들의 침입으로 장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여 말갈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므로 이를 감사히 여겨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고 함
-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에 나타난 대관령
임영(臨瀛: 강릉의 옛 이름)에 부임하는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을 전송한 시 네 수
대관령 넘어서면 모두가 신선 세계 그중에도 강릉 고을 명성을 독점했소 자주색과 녹색빛 엉겨 있는 오대산(五臺山) 자락 맑다 못해 투명한 경포대(鏡浦臺) 호수 천 년의 비사(秘史) 간직한 옛 나라의 유허요 백 대에 걸쳐 전해지는 선현의 고향이라
대관령 속에서 살아가던 유학자들의 편지[편집 | 원본 편집]
- 허목(許穆, 1596~1682)의 <<기언>> <기려(羈旅)>
<서문>
난리를 겪은 후 그로 인해 10년 동안 영해(嶺海)를 떠돌아다녔는데, 그 사이 기록으로 남길 만한 문자로서 산천ㆍ누대ㆍ풍속ㆍ토산물ㆍ생사ㆍ유랑ㆍ송별과 같은 작품들을 각각 분류하여 순서에 따라 편집하였으며 그 나머지 잡고(雜稿)가 또 10편이었다. 이것을 통칭하여 기려라고 이름하였다.
=> 미수 허목은 그의 나이 42세 때인 1636년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그의 고향 경기 연천(漣川)에서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ㆍ원주(原州)를 거쳐 상주(尙州)에 이르렀으며, 1638년 의령 모의촌(慕義村)에서 살았다. 1641년에 다시 사천(泗川)으로 옮겼으며 그 뒤 창원(昌原)ㆍ칠원(柒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음
<허목의 종형인 허후(許厚, 허목보다 7년 연상)에게 보낸 편지 중>
봄이 된 후 바닷가에는 큰 눈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고 있습니다. 흐린 가운데 눈 덮인 산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날씨는 싸늘하여 먼 북방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구나 형님께서 머무는 대관령 속은 매서운 추위가 어떻겠습니까. 서로 소식을 통하지 못하여 그리움만 쌓인 채 한 해를 보냈습니다. 한가로이 지내시는 중에 날마다 학생들을 맞이하여 옛글을 강론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 즐거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전해 듣기에 서실에 불이 났다 하였는데 전해 준 사람이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다행히 불 속에서 서적을 다 꺼내셨는지, 아니면 꺼냈지만 낙질(落帙)된 책이 많은지, 아니면 불행하게 꺼내지 못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평소 당하는 일마다 항상 곤란하고 재미없는 일이 많아 오직 책을 보아 옛사람의 도를 구하는 것만은 여유로울 것이라 여겼는데, 결국 이 일마저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곤궁하게 한 것이라 웃음만 나올 뿐 어찌하겠습니까. 남쪽 지방을 떠돌아다닌 지 벌써 8년이 되어 항상 나그네살이가 너무 오래된 것이 한스럽습니다. 이곳은 늙으신 어머니께서 별 탈이 없으시니 그나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지난해에 동해를 유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난리 중에 관동 지방을 몇 달 동안 여행하였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 5, 6백 리를 다녔는데, 유독 태백산 너머는 가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대관령의 동쪽은 모두 많은 산에 눈이 쌓여 있었으므로 해나 달이 떠오르는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동해는 모두 모래가 깔린 바다였고 바닷가도 모두 모래였습니다. 이따금 무성한 솔숲이나 큰 호수,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난 지역과 뛰어난 경치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해의 유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이 상쾌해지고, 남에게 유람의 즐거움을 논할 때도 이 지역을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 봄이 오면 대관령 안의 산수를 따라 한 달쯤의 기한을 두고 유람을 가려고 합니다. 저는 언젠가 사굴산(闍堀山) 아래에서 태백산 승(僧) 도응(道應)을 만났었는데 그에게 가는 길의 거리를 물었더니, “태백산은 소백산보다 거리가 더 멀고 동쪽으로 해변까지 뻗었는데, 석론(石碖)ㆍ성혈(聖穴)ㆍ각화(覺化)ㆍ부석(浮釋)ㆍ황지(皇池)ㆍ오적(五寂) 같은 절들이 두 산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270리를 올라가는 동안 산속에 기이한 초목이 많고 맹수의 위험도 없습니다.”
- 허목(許穆, 1596~1682) <<기언>>의 지승(地乘: 허목이 정리한 우리나라 역사)
대관령(大關嶺) 남쪽은 옛 진한(辰韓) 땅으로 예맥(獩貊)의 남쪽에 있다. 신라가 나라를 세워 1000년을 이어 오면서 정전(井田)을 시행하고 국학을 세우고 ...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우며 예를 지켜 사양할 줄을 알아 군자의 나라로 일컬어졌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와 닿아 있고, 서쪽과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되지 않는 것이 없다. 자원으로는 생선, 소금, 구리, 철, 은석(銀石), 닥나무, 옻, 댓살, 매실, 귤, 석류가 있다. 장산(萇山)에서는 일본(日本)과 통역하여 해외의 온갖 물자를 사들였다.
오늘 찾아볼 것들[편집 | 원본 편집]
☞ 다음시간에 구글 어스 프로젝트 만들기를 할 것입니다. 강릉에서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장소들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들로 프로젝트를 만들지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