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에세이 장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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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편집 | 원본 편집]

자유롭고 싶나요? 그런데 자유는 뭔가요?

☞ 구글에서 'freedom'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 이미지를 살펴볼 수 있을 듯

Freedom.png


자유란 벗어나는 걸까요? 나를 속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걸까요? 그런데 뭐에 대한 속박일까요?


어디에서, 누군가로부터 벗어나지 않고도 지금, 여기서, 똑같은 이 일상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혹여 내가 내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나는 꼭 이래야 한다고 말이죠. 남이 나에게 원하지 않았는데 남에게 이래야 인정받고 이래야 이쁨받는 생각으로 말이죠.


 <<장자>> <소요유>의 한 장면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고 말한다.그런데 그 큰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직선을 그릴 수가 없고 그 잔가지는 비비 꼬이고 구부러져 동그라미나 네모꼴을 그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나무가 길 옆에 서 있기는 하지만 목수가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 그대의 말이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는지라 뭇사람들이 모두 버리고 떠나 버리는 것이다.” 장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그대도 살쾡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나와 노는 작은 짐승들을 노리고 또 먹이를 찾아 동으로 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덫에 걸리기도 하고 그물에 걸려 죽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저 검은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으니 이 소는 크기는 하지만 쥐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으면서도 그 나무의 쓸모없음이 걱정이 된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의 고을,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옆에서 자유롭게 거닐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고 그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 큰 나무는〉 도끼에 잘릴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칠 자가 없을 것이니 세속적인 쓸모가 없긴 하지만 괴롭게 여길 것 하나도 없다.”
-번역문 출처: 동양고전종합DB


○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됨.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함.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고 경쟁하고 싸우게 됨
○ 장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분별 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모습을 못 보게 된다고 했음
○ 이런 것들을 깨주기 위해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딘,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함


최근에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요?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나요? 어떠한 판단도 없이 말이죠. 응,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고 말이죠.


내게 참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것의 엄청난 쓸모는 무엇인가요?


참고: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이다[사생일여(死生一如)][편집 | 원본 편집]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본다,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을 따른다고 했을 때 아마도 부딪칠 수 있는 문제는 죽음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워 함께 늙어 온 마당에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하다 하겠는데 또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다니 이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대답하였다. “아니, 그렇지 않다.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다. 그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변해서 죽었다네. 이는 춘하추동이 서로 사철을 되풀이하며 운행하는 것과 같다.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나는 명(命)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네.
-<<장자>> <지락(至樂)>

(리우샤오간, <<장자철학>>, 소나무, 106쪽)

1.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체념적인 운명론이 아닌 안명론(安命論)

○ 이 세계에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객관적 필연성이 존재함
○ 특히 죽음은 이러한 객관적 필연성으로서의 명(命)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임
○ 특히 장자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질 않던 시기로 많은 죽음을 목도했을 것임

하지만 이 명(命)을 살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변화로 인식한다면?
 애공이 말했다. “무엇을 일러 재능이 완전하다고 합니까?” 
 중니가 말했다. “죽음과 삶, 보존과 패망, 곤궁함과 영달, 가난함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치욕과 명예, 배고픔과 목마름, 춥고 더움 따위는 사물의 변화이며 명의 운행입니다.”
- <<장자>> <덕충부>

☞ 이 세상은 변화하며 따라서 명도 가만히 정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운행함


2.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이고 흩어진 결과이다

○ 장자는 기가 천지만물 사이에 충만해 있고, 천지의 모든 사물은 하나의 기(氣)라고 인식했음
○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게 하며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됨. 이처럼 삶과 죽음이 순환하니 어느 것이 진짜 시작인지 알 수 있겠냐고 보았음. 사람이 사는 것은 기가 모이기 때문이니,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됨. 이처럼 죽음과 삶이 뒤쫓아 붙어 다니는 것이라면 어쩌면 번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름. 그래서 만물은 하나이고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임


3. 삶과 죽음의 가치는 같다: 낙천적 달관론

○ 도가사상이 부정적 요소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비극 속에서도 낙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함
○ 도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 귀천의 구별은 없음. 세속적인 입장에서 대중의 평가를 따라 귀천의 구별을 수용할지 여부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실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임(주체는 결국 나 자신)
=>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매긴 가치는 궁극적인 것이 아님. 본질적인 것이 아님



4. 삶과 죽음은 변화의 과정이다

○ 이 세상은 멈춰있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함
○ 이 세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여 변화해 가는 것임
=> 삶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인생의 위기, 죽음도 하나의 변화의 과정으로 수용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