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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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생태사상[편집 | 원본 편집]

☞ 황종원, <장일순 생태사상의 종교 회통적 성격과 생태기술론적 의의>, <<유학연구>> 58, 2022

  • 장일순은 한국 생태운동의 개창자로 여겨지는 인물임. 1970년대에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이끌었고 1980년대에는 종촌과 도시의 생산, 유통, 소비를 생태적으로 잇는 '한살림운동'의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 장일순의 생태사상은 동학사상, 특히 최시형의 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고,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
  • 아울러 장일순은 도가, 기독교, 불교를 회통한 인물임
 천지만물이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 한울님을, 생명의 본질을, 본체를 모시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그것은 불가에서 '풀 하나 돌 하나도 부처'라는 이야기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일체 존재에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같이하신다'는 이야기와 그 생명사상은 다 같은 거지요.
  • 인간과 천지만물이 모두 천주를 모신 존재라는 생각은 최시형에게서 가장 분명히 보임
 "우리 사람이 태어남은 하늘의 영기(靈氣)를 모시고 태어남이요, 우리 사람이 살아감 또한 하늘의 영기를 모시고 살아감이니, 어찌 반드시 이 사람만이 홀로 천주를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천주를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저 새 소리도 시천주의 소리이다."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 최시형은 인간과 천지만물이 모두 하늘님의 영기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유를 하늘님을 모신 존재라고 확신함. 하늘님의 기운이 인간과 자연 안에 생명으로 내재하기 때문임

  • 장일순은 <<화엄경>>의 "조그마한 티끌 속에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그것을 생태주의적으로 재해석함. "나락 한 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하는 머리털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표되어 있다 그말이에요." "생명의 진수가 물질 하나에 다 있다 이 말이야. ... 이 머리털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지?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안 되겠지? 부모는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없으면 안 되겠지? 그 부모나 나는 천지만물, 하늘과 땅이 없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따지고 보면 터록 속에 전 우주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머리털 하나도 시공간적으로 전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 나락 한 알에도 전 우주적 생명이 내재해 있다.
  • 최시형은 밥 한그릇에도 전 우주적 생명, 즉 하늘님이 담겨 있다는 뜻에서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고 했음. 장일순은 이 밥 한 그릇 먹는 일에 사람과 천지가 협력해 일하는 우주적인 만남의 의미가 있다고 말함. 밥 한 그릇을 "사실은 사람만이 땀 흘려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일체가 앙상블이 되어서, 하나로 같이 움직여서 그 밥 한 사발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으로 되는 거지요."
  • 장일순은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그 무엇보다 중시했음. 그는 '한살림'운동을 "급속도로 와해되어가고 있는 농촌에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하는 사람이 살 수 있고, 그래서 마침내 살아있는 땅과 마을을 새로운 형태로 돌이키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의 하나"라고 했음. 생태적 농사가 자연의 생명성을 회복시키고 농촌을 건강하게 협력하는 사회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임
 특히 자연농으로 돌아간다는 건 자연과 공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게 현재로서는 매우 미약하고 또 얼핏 보면 무슨 원시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거냐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지. 다만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모아서 파멸을 피하면서 함께 모두 살 수 있는 그런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현실을 얘기하고 있는 걸세.
 -장일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장일순 사상에 깃든 노장사상[편집 | 원본 편집]

  • 장일순은 자신을 일속자(一粟子)라 칭하며 자신을 벌레, 풀잎 등 다른 자연존재와 대등하게 취급하는 마음의 훈련을 했음. 그는 조 한 알이라는 호를 붙인 이유를 "나도 인간이라 누가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라고 했음
  • '인간-나'를 풀이나 좁쌀의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은 천지만물과 '나'를 '한 몸'으로 대하기 위한 수양임. '소아'를 비워내고 그 자리에 도, 하느님, 하늘님을 따르는 '대아'를 정립하기 위한 수양임. 이 수양의 방법을 논할 때, 장일순은 노자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동학을 회통시킴
  • 장일순이 말하는 대아(大我)란 이웃, 만물, 천지를 '나'와 동일시하는 '나'임
 화장장에 가보면 뼈까지 다 빻고 나면 재가 한 움큼밖에 안 남는단 말이에요. 그런 어디 갔느냐 이 말이에요. 진실한 '자기'라는, '나'라는 것이 뭐냐. 그걸 따져 들어갔을 때 진실한 '나'라는 것은 보이지 않아. '나'라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아의 나밖에 존재하지 않아. '너/나'가 없는 거라.
  • 장일순이 말하는 수양의 핵심은 '자기 비움', 즉 '소아'르 제거함임. 이 소아의 제거는 노자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를 따르는 자연물처럼 되어감임
  • 예컨대 장일순이 노자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구절을 해설할 때 물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함. "물은 주(主)와 객(客)이 따로 없거든. 너니 나니가 따로 없단 말이야. 아상(我相)이 없는 거라."
  • 물은 부드러운 힘으로 흐를 뿐, 어떤 것과도 격렬히 부딪치며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임. 그러면서도 땅 속 깊이 낮은 곳에 처하여 식물을 비롯한 뭇 생명체들이 생장하는 데 도움을 줌. 장일순은 물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처럼 주객을 분립하고 자타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함
  • 장일순은 소아의 제거에 관한 가르침을 도가, 불교, 기독교의 공통된 교설이라고 주장함
 불가의 선에 허회자조(虛懷自照)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를 비운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노자의 도덕경에도 있고, 또 성경에도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가 산으로 자꾸 올라가시지요. 세상에 내려가니까 자꾸 따지고 이것저것 얘기를 해.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욕심만 부려. 그렇게 되니까 답답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어찌아오리까 하거든. 가서 좌선을 해요. 하느님과의 대화란건 뭐냐.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그 비운 마음을 보는 거예요.
  • 도가, 불교, 기독교에서 공통되게 말하는 소아를 제거하는 일은 생태주의적으로 욕심을 없에도 작위를 최소화한 생태적 인간으로 거듭남을 의미함. 장일순은 주로 노장철학과 동학의 생각을 빌려 생태주의적으로 거듭나라고 권함
  • 예컨대 장자는 심재(心齋)를 설명할 때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으라"라고 했음. '귀로 들음'과 '마음으로 들음'은 각각 감각적 지각과 지성적 인식을 가리킴. 장자는 이 두 인식 기능으로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도를 알 수 없고, 오직 '기로 들을 때', 즉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기다릴' 때만 그것을 체득할 수 있다고 했음
  • 장일순은 장자의 심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음
 우리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전부 눈에 보이는 거, 듣는 거, 또 만질 수 있는 거, 감각으로써 느끼는 거 속에서만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그런 그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가 터득해야 할 것이 있느니라 그런 얘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욕심을 버리라는 얘기죠.

=>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에 대한 욕심, 즐 물욕을 버리고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지각되지 않는 그 무엇을 체득하는 훈련이 생태적 인간에게는 필요하다는 뜻임

  • 장일순이 말하는 무위는 작위적 기교, 기술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임. 장일순은 최시형이 "천주를 모시는[시천주(侍天主)] 방법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다"라고 말했음을 언급하면서 그 생태주의적 실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음
 해월 선생(최시형)은 "시(侍)는 무위이화(힘써 공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자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이 뭔 얘기가 있더냐. 그래도 사철은 돌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나지 않느냐." 그러면 무위이화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조홧속이란 것이 무이이화란 이야긴데, 그 속에서 사람은 그 이치를 알고 참여하는 것, 그러니까 일컫자면 창조적인 참여라고나 할까요. 사욕을 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이치를 깨달아 자기도 거기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 인간이 무위의 원칙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그 원칙에 따라 일하고 있기 때문임. 하늘님을 잘 모시려는 사람은 사욕 없이, 우주가 본래 무위이화의 원칙에 따라 일한다는 점을 철저히 깨달아 그 일에 창조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함. 여기서 장일순이 말하는 '창조적 동참'이란 구체적으로 자연을 따라 무위이화의 채집적 농사를 짓고, 아울러 그 농사 기술로 상업과 소비를 연결하여 인간과 자연이 협동하고, 생산, 유통, 소비 주체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관계로 변모하는 실천으로 나타남
  • 장일순은 오늘날 우리에세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이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 인류의 공통된 생태주의적 영성 혹은 정신이라고 봤음. 장일순에게 그 영성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기헌신적 사랑, 노자 식으로 말하면 자애와 포용의 정신이었음. 그런 정신이 결여된 녹색운동의 문제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음
 가끔 서양 사람들 보면 녹색 운동 좋긴 한데 문제가 있어. 뭐냐 하면 녹색 운도을 하는데 언제나 시와 비, 선과 악을 가려서 문제를 보고 접근하거든. ... 어떤 힘을 만들어 자세(藉勢: 자기 세력에 의지함)하는 그런 거여서는 안 된단 말이야. 물론 하나의 과정으로 분별지가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거지.


오늘의 토론 주제(2022.12.02)[편집 | 원본 편집]

나에게 밥 한 그릇은 무엇인가요? 먹고 산다는 건 무엇인가요? 내가 여태까지 생각해온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장일순의 무위적 삶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 참고: 다석 유영모의 1일 1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