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 논형
왕충(王充, 27~97)이 살던 시대[편집 | 원본 편집]
☞ 다음은 왕충이 살던 시대였던 한나라 때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담은 벽화처럼 보이나요? 이 벽화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나요?
- 고혜련, 최덕경, <한대(漢代) 화상석(畵像石)에 나타난 자연관(自然觀)>, <<중국사연구>> 76권, 중국사학회, 2012, 1~35쪽
○ 위의 그림은 천자가 천하를 화합하여 잘 다스리면 연리목이 자라나는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담은 그림임. 왕이 덕으로 잘 융합하여 사방팔방이 한 가족을 이루면 목연리가 자라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음. 뿌리는 다르지만 만가지가 합쳐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임
○ 왕이 어질고 명철하면 왕의 덕이 물고기, 자연물에게까지 이른다고 보았음. 길조를 나타내는 동물들
☞ 쌍두록(雙頭鹿): 머리가 둘 달린 사슴
☞ 쌍두조(雙頭鳥): 비익조(比翼鳥)라고도 함. 붉은 털이 나 있는 것과 푸른 털이 나 있는 것이 있는데 모두 아름다움.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밖에 없고 눈도 하나뿐이라서 혼자서는 날아오를 수 없고 2마리가 몸을 합쳐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음
- 천인감응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한나라
○ 한무제(B.C.141~B.C.87)를 비롯한 한나라 통치자들은 천명사상을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천인감응설을 통해 자연현상을 이해했음
○ 하늘이 통치자의 수명을 결정한다고 보았음. 하늘[천(天)]은 해, 달, 별, 바람, 비, 우레 등에 의한 자연현상이 발생되는 곳이며 이는 천인감응설을 근거로 하여 상서와 재앙으로 해석됨
○ 자연현상은 하늘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보았고 인간에게 하늘의 권위를 암시하고 있음
○ 유교경전인 <<서경>> <홍범>에 나타난 천인감응의 사례
"좋은 징조란 [왕이] 심사숙고할 때 때에 맞는 비가 내리고 편안하게 다스릴 때 햇빛이 따사롭고 명석할 때 여름 더위가 알맞고 지략이 있을 때 겨울 추위가 알맞고 지혜로울 때 때에 맞는 바람이 분다. 나쁜 징조란 [왕이] 번잡할 때 끊임없이 비가 오고 [왕의 자리가] 분에 넘칠 때 오랫동안 햇볕이 비추고 풍류만을 즐길 때 지칠 줄 모르는 더위가 오며 조급할 때 맹추위가 몰아치며 어리석을 때 바람이 끊임없이 분다."
- 미신을 믿었던, 왕충이 살던 한나라 들여다보기
☞ 이석명, <진한시대의 도가와 황로학>, <<인문학연구>> 제2호, 경희대인문학연구소, 1998, 359~376쪽
○ 진나라, 한나라 시대에는 춘추전국시기의 기나긴 전란의 시대(550년간 이어졌음)가 막을 내리고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음. 백성이나 지배계층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휴식을 원했음
○ 한나라 당시 노자사상과 황제사상이 결합된 황로사상이 유행하게 됨
☞ 혹시 <<황제내경>>이라는 책 이름 들어봤나요?
- 고대 신화에 따르면 황제(黃帝)는 의술과 침구술을 개발했다고 알려져왔음
- <<황제내경>>의 주인공은 황제(黃帝)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의학서로 알려져 있음. 여기에는 자연에 순응하는 양생의 지혜를 소개하고 있음
○ 황로사상은 기존의 법가가 통치를 위해 법치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에 비해 개인의 건강과 행복, 즉 양생을 함께 추구한 사상임
○ 황로사상은 한나라 때 정치철학으로 기능하게 됨. 도가철학의 무위(無爲)를 통치자의 통치술 차원에서 제시했음. 황로 저작인 <<여씨춘추>>에서는 "도가 있는 바른 군주는 (객관적 상황에) 따를 뿐 작위를 행하지 않고, 문책을 할 뿐 일일이 시키지 않으며, (주관적) 상념과 의도를 버리고 고요함과 텅 비움으로써 기다린다"라고 하여 군주의 무위적 통치 자세를 주장했음
○ 한편 군주가 무위해야 하는 근거를 원시 도가와 마찬가지로 천지자연에서 찾았음. 인간세의 이상적 통치자는 자연 질서를 본받아야 하며 자연 질서의 방식은 바로 무위라는 것임
☞ 도가의 무위와 황로사상의 무위는 뭐가 달랐을까?
○ 노자는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 사람들이 유위[有爲, 자연법칙과 어긋나는 인위적인 작위를 말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외형상 유위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임
○ 하지만 황로학의 무위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유위의 요소도 아우름
"내가 말하는 무위는 사사로운 뜻이 공적인 길에 끼어들지 않고 개인적 욕망으로 인해 올바른 통치 방법이 왜곡되지 않으며 이치에 따라 일을 실행하고 객관적 바탕에 따라서 공로와 업적을 세운다." <<회남자>>
=> 여기에서 보이는 무위는 일을 실행한다, 공로와 업적을 세운다와 같이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를 포괄하는 것임
☞ 그런데 한나라는 유교를 국교화하지 않았나?
=> 한나라 초기에 황로학이 정치철학으로서 역할을 했지만 한무제(B.C.134년 즉위) 이후 유교사상이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국교가 되었음
=> 하지만 황로학은 양생술[자연에서 부여받은 개인의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는 법]로 개인들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으며 통치자들 또한 표면적으로는 유교 정치를 표방했지만 내적으로 개인의 양생에 관심이 많았음
=> 특히 왕충과 가까운 시대였던(27~97)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184)이 일어나는데 이 당시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 예컨대 부적을 살라서 물에 타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는 등의 주술을 통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태평도를 백성들이 믿을 정도로 그 당시 일반 백성들도 미신적인 부분들을 믿었던 것으로 보임
- 유교를 국교화했던 한무제도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다
☞ 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 <<국가와 백성 사이의 한(漢): 한제국, 덕치와 형벌의 이중주>>, 글항아리, 2013, 59쪽
○ 방사(方士)의 도술은 "황금도 만들 수 있고 불로의 약도 얻을 수 있으며 신선도 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겨졌음
○ 여기에 크게 마음을 뺏긴 한무제가 봉래산을 뒤져서 찾게 하거나 불사의 환약을 만들게 해서 막대한 자금을 소비했다는 이야기가 <<사기>>, <<한서>> 등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
○ 또한 도참사상도 한나라 때 유행했는데 도참이 한 왕조의 운명의 마지막을 알려준다고 믿었고 그것을 대신할 만한 성인의 출현도 예견할 수 있다고 여겨졌음
- 시대의 주류에 저항한 철학자, 왕충
○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이룬 한나라의 이데올로그들은 황제의 권위를 한껏 올릴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서는 유학의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학에 참위설을 끌어들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음
○ 참위설의 '참(讖)'이란 해, 달, 별(일월성신)의 변화에 따라 길흉이나 재이(災異: 재앙, 이변) 등을 예언하는 것이고, '위(緯)'는 경(經)에 가탁해서 미래의 일을 설명한 것임
○ 한나라 때에는 이 참위설이 참으로 일세를 풍미했다고 할 수 있음. 참위설은 예언을 주로 하고 있는데 견강부회하여 이미 일어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참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그 주종을 이루었음
○ 예: 원시(元始) 5년(서기 5년) 12월에 평제(平帝)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인 영(嬰)을 세웠음. <<한서>> <왕망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음
"이 달에 ...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졌다. 그 위에 붉은 글씨가 드러났는데 '안한공 왕망이 황제가 될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 정치적 의도가 뚜렷하게 보이는 조작이라고 할 수 있음. 이 이후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결국 왕망은 스스로 제위에 올라 한나라를 종식히키고 신(新)나라(8~23)를 세웠음
○ 왕충은 이 참위설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비판을 가했음
☞ 출처: 임옥균, <<왕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15~17쪽
- 왕충의 목숨을 건 저작 <<논형>>
○ 지금 왕충의 저작인 <<논형>>을 보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를 힘들여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충 당시에는 이와 같은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고 그것이 정치적 도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반대가 심지어는 목숨을 건 일이 될 수도 있었음
왕충(王充, 27~97)이란 인물[편집 | 원본 편집]
☞ 임옥균, <<왕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고 여덟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유교경전 공부를 시작했음
○ 17, 18세 때 고향인 절강성 상우현(上虞縣)을 떠나 수도인 낙양으로 유학을 갔음
○ 20세 무렵 이후 스승을 떠나 스스로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했음. 한 가지를 파고드는 연구보다는 여러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음.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왕충은 책을 사기 보다는 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읽었고 읽는 대로 암기했음
○ 친구들과 토론할 때 왕충은 항상 새로운 관점을 내놓았고 친구들은 처음에는 황당해 하다가도 왕충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음. 글도 잘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 30세 무렵에 왕충은 낙양을 떠나 외지에서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임. 평생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음
○ 왕충은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 가난하고 어려워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 50세가 넘어서 영천군(潁川郡)에서 관직을 맡았는데 사치와 양조를 금하자는 건의를 그 고을을 다스리는 태수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여 <<논형>>을 편찬했음
○ 70세 전후에 왕충은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