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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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일본, 미국 유학생, 유길준(1856~1914)[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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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여행로.jpg

☞ 그림출처: [baccro.com/news/articleView.html?idxno=26989 바끄로뉴스]

○ 조선시대, 이 긴 루트를 여행한 사람 유길준

☞ 참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

- 1856년 서울 계동에서 유진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호는 구당
- 1870년 박규수의 문하에서 공부함
- 1871년 과거시험에 응했으나 번번히 실패했음
-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음

○ 1881년 봄, 26세의 유길준은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감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
"일본 사람 가운데 견문이 넓고 학식이 높은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그들의 의견을 듣고 또 새로 나온 책을 보며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동안, 그 사정을 살펴보고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진상을 파헤쳐 보니, 그 제도나 법규가 서양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릇 일본이 유럽의 네덜란드와 거래를 튼 지는 이백여 년이 지났으나 그들을 오랑캐로 멸시하여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 후 일본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은 뒤부터 관계가 친밀해짐에 따라 시대적인 변화를 예측하고 그들의 장점을 취하며 여러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삼십 년 동안에 이와 같은 부강(富强)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80년대 일본(1)

1880년대 일본(2)

1880년대 조선

○ 유길준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3개월의 일정이 끝난 뒤에 그대로 남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음. 일본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발전해 있었기에 이 나라에 남아서 그들이 발전하게 된 이유를 좀더 살펴보기로 했음
○ 기존에 청나라에 파견됐던 유학생들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지만 유길준은 단순한 기술을 배우기보다 일본어를 배워 서양 학문의 번역서를 읽기 위해 유학생활을 했음. 실제로 유길준이 들어간 일본의 학교는 영어교육과 함께 영미의 근대 학문을 교육하는 곳이었음.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 유길준은 일본의 발전이 서양의 제도나 법규를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음
○ 이 곳에서부터 <<서유견문>>의 구상과 저술이 시작되었음
○ 1년만인 1882년에 귀국하게 됨.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영익(1860~1914)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함. 그후 외교업무를 돕는 일을 했는데 이 일보다 신문 발행 준비에 더 열심었음. 유길준은 자신이 보고 들은 서양의 상황을 국민들에게 신문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했음
○ 1882년 미국과 조선은 수교를 체결했고 1883년 유길준은 외무 낭관으로 발탁되어 미국 유람길에 올랐음
○ 이들을 보빙사라고 불렀는데 1883년 7월 26일 인천을 출발해서 9월 18일 미국대통령을 접견했음. 이들은 그뒤 40여일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외국박람회, 공업제조회관, 병원,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을 방문 시찰했음.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했음. 민영익이 미국 정부에 추천하여 국비장학생이 되었음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
"미국 수도에 이르러 보빙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한 뒤, 복명(復命: 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 차 귀국할 때 민공(조선 말 민씨 척족의 문신으로 한국 최초로 서양 문물을 시찰했음)께서는 나를 그대로 그곳에 머무르게 하며 공부하고 오라는 새로운 임무를 주셨다."

☞ 허경진, <유길준(兪吉濬)과 『서유견문(西遊見聞)』>, <<어문연구>> 32권 1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04, 427~453쪽

○ 유길준이 미국 보스턴에 처음 머무를 때 일본 동경대 초빙교수로 유길준이 일본 유학시절 알고지냈던 모스의 집에서 7개월 정도 머물려 미국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해지게 됨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
"그들의 말을 조금씩 알아듣고 그들의 풍속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술잔을 나누는 연회에 초대받기도 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임에 참석하여 즐기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들이 한가롭게 즐기거나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풍습을 알게 되었으며 결혼과 장례의 의식 절차를 살펴보며 길흉에 관계되는 법도와 예절도 알게 되었다."

○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음. 모스가 "일본에서 정확한 보고가 전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을 듣고 귀국하지 않고 신중하게 조선 정세를 살피기로 했음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
갑신년(1884)년 가을, 강의실에서 질의응답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학생 한 사람이 신문을 들고 와서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하기에 놀라다 못해 얼굴빛이 창백해진 채 숙소로 돌아왔다.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정원수 위에 쌓였고 음산한 바람은 유리창을 두드리니 밤새껏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 고국 생각이 수만 리를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변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야 하는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또한 소식이 박연해지니 가슴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비분강개한 마음이 밤낮으로 용솟음쳤으나 새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 다음해 여름까지 유학생활을 계속하다가 귀국길에 올랐음. 대서양과 유럽을 거쳐 귀국하면서 <<서유견문>>을 쓸 준비를 했음

 이 배는 ... 상해, 홍콩, 그리고 일본으로 갈 것입니다. 일본에 도착하는 데 약 7주간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긴 여행에 권태를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으로서 저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또 저에게 그 모든 것이 박진감을 줍니다. 저는 이미 따뜻한 지역에서 열대지역에,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계절로는 겨울에서 여름을 거치는 지역을 여행하였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저에게 친절한 충구를 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 충고를 우리 국민에게 주고자 합니다.
-1885년 10월 8일에 유길준이 모스에게 쓴 편지

○ 1885년 귀국하자마자 개화파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어 연금 생활을 함. 두 달 만에 우포도청에 감금되었다가 한규설 에 연금되었음. 말은 연금이지만 실제로는 수구파의 박해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
○ 한규설은 유길준을 자기 집에서 1년 반 동안 보호한 뒤에 그를 백록동(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일대)에 있던 민영익의 별장인 취운장으로 옮겨주었음. 이곳에서 그는 <<서유견문>>을 지었음
○ 한적한 시간과 공간을 얻어 집필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준비해 왔던 자료와 원고들은 대부분 없어진 상태였음

 유길준의 <서유견문> 서문
"그리하여 묵은 원고를 펼쳐 보니 그 대부분은 없어져서 수년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셈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원고를 주워 모으며 없어진 부분은 증보하여 이십편으로 된 책을 꾸몄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 문자으이 체제는 꾸미지 않고 속어를 되도록 많이 써서 말하고자 하는 의사가 잘 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 1892년 가택 연금상태에서 해제되었고 1895년 <<서유견문>>을 출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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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의 <<서유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