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맹자와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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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얼룩말의 아픔까지 공감하려 하는 걸까?


맹자와 순자의 인간본성[성(性)][편집 | 원본 편집]

번역문 참조: <동양고전종합DB>


맹자의 성(性)[편집 | 원본 편집]

 1. 孟子道性善(맹자도성선)하시되 言必稱堯舜(언필칭요순)이러시다 ...  成覸(성간)이 謂齊景公曰(위제경공왈) 彼丈夫也(피장부야)며 我丈夫也(아장부야)니 吾何畏彼哉(오하외피재)리오하며 顔淵曰舜何人也(안연왈순하인야)며 予何人也(여하인야)오 有爲者亦若是(유위자역약시)라 하며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선(善)함을 말했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예로 들었다. 성간(成覸)이 제경공(齊景公)에게 말했다. "저 성현(聖賢) 들도 장부(丈夫)이며 나도 장부이니, 내 어찌 저 성현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안연(顔淵)이 말했다. "순(舜)임금은 어떠한 분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舜)임금과 같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 上)」)


 2. 孟子曰(맹자왈) 天下之言性也(천하지언성야)는 則故而己矣(즉고이이의)니 故者(고자)는 以利爲本(이리위본)이니라. 所惡於智者(소오어지자)는 爲其鑿也(위기착야)니 如智者若禹之行水也(여지자약우지행수야)면 則無惡於智矣(즉무오어지의)리라 禹之行水也(우지행수야)는 行其所無事也(행기소무사)시니 如智者亦行其所無事(여지자역행기소무사)면 則智亦大矣(즉지역대의)리라 
  맹자가 말했다. “천하에서 성(性)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드러난 자취를 따질 뿐이니, 이미 드러난 자취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형세를 근본으로 삼는다. 지혜로운 자를 미워하는 까닭은 천착(穿鑿)하기 때문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우왕(禹王)이 물을 소통시킨 것처럼 하면, 지혜로움을 미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왕이 물을 소통시키신 것은 자연의 형세를 따라 아무 탈이 없는 대로[무사(無事)] 행하신 것이니, 만일 지혜로운 자가 또한 자연의 형세를 따라 아무 탈이 없는 대로 행한다면 그 지혜가 또한 클 것이다."

=> 여기에서 "以利爲本(이리위본)"의 이로울 '리(利)'를 주희는 순하다, 따르다라는 뜻의 순(順)'과 같은 뜻으로 보았음


 3. 告子曰(고자왈) 性(성)은 猶湍水也(유단수야)라 決諸東方則東流(결저동방즉동류)하고 決諸西方則西流(결저서방즉서류)하나니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인성지무분어선불선야)는 猶水之無分於東西也(유수지무분어동서야)니라 
 고자가 말했다. “사람의 성(性)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사람의 성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이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孟子曰(맹자왈) 水信無分於東西(수신무분어동서)어니와 無分於上下乎(무분어상하호)아 人性之善也(인성지선야) 猶水之就下也(유수지취하야)니 人無有不善(인무유불선)하며 水無有不下(수무유불하)니라 今夫水(금부수)를 搏而躍之(박이약지)면 可使過(가사과)이며 激而行之(격이행지)면 可使在山(가사재산)이어니와 是豈水之性哉(시기수지성재)리오 其勢則然也(기세즉연야)니 人之可使爲不善(인지가사위불선)이 其性(기성)이 亦猶是也(역유시야)니라 맹자가 말했다. “물은 진실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上下)의 구분도 없습니까? 사람의 성이 선함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물은 낮은 데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보다 높이 올라가게 할 수 있고, 물을 막아서 거슬러 올라가게 하면 산에 있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외부에서 가하는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사람이 불선을 하게 되는 것도 이처럼 그 성이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맹자』 「고자 상(告子 上)」)


 4. 告子曰(고자왈) 生之謂性(생지위성)이니라  
 고자가 말했다.“생리적인 본능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孟子曰(맹자왈) 生之謂性也(생지위성야)는 猶白之謂白與(유백지위백여)아 曰然(왈연)하다 白羽之白也(백우지백야)가 猶白雪之白(유백설지백)이며 白雪之白(백설지백)이 猶白玉之白與(우백옥지백여)아 曰然(왈연)하다 맹자께서 말했다. “생리적인 본능을 성이라고 하는 것은, 흰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흰 깃털의 흰 것이 흰 눈의 흰 것과 같고, 흰 눈의 흰 것이 흰 옥(玉)의 흰 것과 같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然則犬之性(연즉견지성)이 猶牛之性(유우지성)이며 牛之性(우지성)이 猶人之性與(유인지성여)아 孟子又言(맹자우언) 若果如此(약과여차)면 則犬牛與人(즉견우여인)이 皆有知覺(개유지각)하고 皆能運動(개능운동)하니 其性(기성)이 皆無以異矣(개무이이의)라 하시니 於是(어시)에 告子自知其說之非(고자자지기설지비)하고 而不能對也(이불능대야)하니라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단 말입니까?”맹자가 또 말했다. “만일 과연 이와 같다면 개와 소와 사람이 모두 지각이 있으며, 모두 운동할 수 있으니, 그 성(性)이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에 고자(告子)가 스스로 그 말이 틀렸음을 알고서 대답하지 못했다. (『맹자』 「고자 상(告子 上)」)


 5. 公都子曰(공도자왈) 告子曰(고자왈) 性(성)은 無善無不善也(무선무불선야)라 하고  或曰(혹왈) 性(성)은 可以爲善(가이위선)이며 可以爲不善(가이위불선)이니 是故(시고)로 文武興(문무흥)하면 則民好善(즉민호선)하고 幽興(유흥)하면 則民好暴(즉민호포)라 하고 今曰(금왈) 性善(성선)이라 하시니 然則彼皆非與(연즉피개비여)잇가 
 공도자가 말했다. “고자는 ‘사람의 성(性)은 선함도 없고 불선함도 없다.’ 하였습니다. 혹자는 ‘성이 선한 이도 있고 성이 불선한 이도 있으니, 이 때문에 요(堯)를 임금으로 삼고서도 상(象) 같은 동생이 있었고, 고수(瞽瞍)를 아버지로 삼고서도 순(舜) 같은 자식이 있었으며, 주(紂)를 형의 아들이자 또 임금으로 삼고서도 미자(微子) 계(啓)와 왕자(王子) 비간(比干)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는 성이 선하다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저들은 모두 틀린 것입니까?”
孟子曰(맹자왈)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내약기정즉가이위선의)니 乃所謂善也(내소위선야)니라 若夫爲不善(약부위불선)은 非才之罪也(비재지죄야)니라 맹자가 말했다. “그 타고난 자질인 정(情)은 선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이른바 선하다는 것이네. 불선을 하는 것은 타고난 자질의 죄가 아닐세.
惻隱之心(측은지심)을 人皆有之(인개유지)하며 羞惡之心(수오지심)을 人皆有之(인개유지)하며 恭敬之心(공경지심)을 人皆有之(인개유지)하며 是非之心(시비지심)을 人皆有之(인개유지)하니 惻隱之心(측은지심)은 仁也(인야)요 羞惡之心(수오지심)은 義也(의야)요 恭敬之心(공경지심)은 禮也(예야)요 是非之心(시비지심)은 智也(지야)니 仁義禮智非由外我也(인의예지비유외아야)라 我固有之也(아고유지야)언마는 弗思耳矣(불사이의)라 故(고)로 曰求則得之(왈구즉득지)하고 舍則失之(사즉실지)라 하니 或相倍而無算者(혹상배이무산자)는 不能盡其才者也(불능진기재자야)니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하는 마음인 공경지심(恭敬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측은지심은 인(仁)이요, 수오지심은 의(義)요, 공경지심은 예(禮)요, 시비지심은 지(智)일세. 인(仁)‧의(義)‧예(禮)‧지(智)는 밖으로부터 나를 녹여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네. 그러므로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고 하는 것이니, 선악의 차이가 서로 배(倍)가 되고 다섯 배가 되기도 하여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은 타고난 자질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네. (『맹자』 「고자 상(告子 上)」)


 6. 孟子曰(맹자왈) 富歲(부세)엔 子弟多賴(자제다뢰)하고 凶歲(흉세)엔 子弟多暴(자제다포)하나니 非天之降才爾殊也(비천지강재이수야)라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기소이함닉기심자연야)니라 今夫麥(금부맥)을 播種而耰之(파종이우지)하되 其地同(기지동)하며 樹之時又同(수지시우동)하면 浡然而生(패연이생)하여 至於日至之時(지어일지지시)하여 皆熟矣(개숙의)나니 雖有不同(수유부동)이나 則地有肥(즉지유비)하며 雨露之養(우로지양)과 人事之不齊也(인사지부제야)니라 故(고)로 凡同類者(범동류자) 擧相似也(거상사야)니 何獨至於人而疑之(하독지어인이의지)리오 聖人(성인)도 與我同類者(여아동류자)시니라 
  맹자가 말했다. “풍년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선해지고, 흉년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포악해지니, 타고난 자질이 그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보리를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싹이 나와서 익을 때가 되면 모두 익으니, 비록 같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땅에 비옥하고 척박함이 있고, 비와 이슬이 길러줌과 사람이 가꾸는 일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종류가 같은 것은 모두 서로 비슷하니, 어찌 단지 사람의 경우에 이르러서만 그렇지 않다고 의심을 하겠는가? 성인(聖人)도 나와 같은 부류(部類)이다.
... 故(고)로 曰(왈) 口之於味也(구지어미야)에 有同耆焉(유동기언)하며 耳之於聲也(이지어성야)에 有同聽焉(유동청언)하며 目之於色也(목지어색야)에 有同美焉(유동미언)하니 至於心(지어심)하여는 獨無所同然乎(독무소동연호)아 心之所同然者(심지소동연자)는 何也(하야)오 謂理也義也(위리야의야)라 聖人(성인)은 先得我心之所同然耳(선득아심지소동연이)시니 故(고)로 理義之悅我心(이의지열아심)이 猶芻之悅我口(유추지열아구)니라 ...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들의 입은 똑같이 즐기는 맛이 있으며, 사람들의 귀는 똑같이 듣기 좋은 소리가 있으며, 사람들의 눈은 똑같이 아름답게 여기는 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유독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바가 없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다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理)와 의(義)를 말한다. 성인은 우리 마음에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바를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이와 의가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고기가 내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맹자』 「고자 상(告子 上)」)


 7. 孟子曰(맹자왈) 牛山之木(우산지목)이 嘗美矣(상미의)러니 以其郊於大國也(이기교어대국야)라 斧斤(부근)이 伐之(벌지)어니 可以爲美乎(가이위미호)아 是其日夜之所息(시기일야지소식)과 雨露之所潤(우로지소윤)에 非無萌蘗之生焉(비무맹얼지생언)이언마는 牛羊(우양)이 又從而牧之(우종이목지)라 是以(시이)로 若彼濯濯也(약피탁탁야)하니 人見其濯濯也(인견기탁탁야)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위미상유재언)이라 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차기산지성야재)리오
  맹자가 말했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그것이 큰 나라의 근교에 있어서 도끼와 자귀로 베어내니, 어떻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낮과 밤에 자라나는 것과 비와 이슬이 적셔주어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와 양을 또 방목하므로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벌거벗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 벌거벗은 것만을 보고는 일찍이 재목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어찌 산(山)의 본래 성질이겠는가? 
雖存乎人者(수존호인자)인들 豈無仁義之心哉(기무인의지심재)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기소이방기양심자) 亦猶斧斤之於木也(역유부근지어목야)에 旦旦而伐之(단단이벌지)어니 可以爲美乎(가이위미호)아 其日夜之所息(기일야지소식)과 平旦之氣(평단지기)에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기호오여인상근야자기희)어늘 則其旦晝之所爲(즉기단주지소위) 有梏亡之矣(유곡망지의)나니 梏之反覆(곡지반복)이면 則其夜氣不足以存(즉기야기부족이존)이요 夜氣不足以存(야기부족이존)이며 則其違禽獸不遠矣(즉기위금수불원의)니 人見其禽獸也(인견기금수)하고 而以爲未嘗有才焉者(이이위미상유재언자)라 하나니 是豈人之情也哉(시기인지정야재)리오 비록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한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리는 것이 또한 도끼와 자귀로 아침마다 나무를 베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그 낮과 밤에 자라난 양심과 새벽의 맑은 기운도, 그 좋아하고 미워함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비슷한 것이 거의 드문데, 낮에 하는 불선한 행동이 이것을 없애니, 없애기를 반복하면 밤에 자란 선한 기운인 야기(夜氣)도 보존될 수 없고, 야기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이 많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금수와 같은 모습만을 보고서 일찍이 훌륭한 재질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 모습이겠는가? (『맹자』 「고자 상(告子 上)」)


 8. 孟子曰(맹자왈) 盡其心者(진기심자)는 知其性也(지기성야)니 知其性(지기성)이면 則知天矣(즉지천의)니라 存其心(존기심)하여 養其性(양기성)은 所以事天也(소이사천야)요 殀壽(요수)에 不貳(불이)하여 修身以俟之(수신이사지)는 所以立命也(소이립명야)니라 
  맹자가 말했다. “그 마음을 다 실천하는 자는 마음의 근원인 성(性)을 알 수 있으니, 그 성을 알면 더 나아가서 성의 근원인 하늘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하거나 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 몸을 닦아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은 명(命)을 세우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 上)」) 


 9. 孟子曰(맹자왈) 廣土衆民(광토중민)을 君子欲之(궁자욕지)나 所樂(소락)은 不存焉(부존언)이니라 中天下而立(중천하이립)하여 定四海之民(정사해지민)을 君子樂之(군자락지)나 所性(소성)은 不存焉(부존언)이니라 君子所性(군자소성)은 雖大行(수대행)이나 不加焉(불가언)이며 雖窮居(수궁민)나 不損焉(불손언)이니 分定故也(분정고야)니라 君子所性(군자소성)은 仁義禮智根於心(인의예지근어심)하여 其生色也(기생색야) 睟然見於面(수연현어면)하며 盎於背(앙어배)하며 施於四體(시어사체)하여 四體不言而喩(사체불언이유)니라  
  맹자가 말했다. “토지를 넓히고 백성을 많게 하는 것을 군자가 바라지만 즐거워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천하의 한가운데에 서서 온 천하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군자가 즐거워하지만 본성(本性)으로 여기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군자가 본성으로 여기는 것은 비록 자신의 도가 세상에 크게 행해지더라도 더 늘어나지 않고, 비록 곤궁하게 지내더라도 더 줄어들지 않으니, 분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군자(君子)의 본성(本性)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마음속에 뿌리 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수연히 얼굴에 드러나며, 등에 가득하며, 사지에 베풀어져서 사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해진다.” 
  (『맹자』 「진심 상(盡心 上)」) 


 10. 孟子曰(맹자왈) 口之於味也(구지어미야)와 目之於色也(목지어색야)와 耳之於聲也(이지어성야)와 鼻之於臭也(비지어취야)와 四肢之於安佚也(사지지어안일야)에 性也(성야)나 有命焉(유명언)이라 君子不謂性也(군자불위성야)니라 仁之於父子也(인지어부자야)와 義之於君臣也(의지어군신야)와 禮之於賓主也(예지어빈주야)와 智之於賢者也(지지어현자야)와 聖人之於天道也(성인지어천도야)에 命也(명야)나 有性焉(유성언)이라 君子不謂命也(군자불위명야)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입이 좋은 맛을, 눈이 좋은 색을, 귀가 좋은 음악을 원하고, 코가 좋은 냄새를, 사지가 안일함을 원하는 것은 본성이지만 이것은 명(命)에 달려 있으므로, 군자는 이를 성(性)이라 하지 않는다. 부자간의 인(仁)과, 군신간의 의(義)와, 손님과 주인간의의 예(禮)와, 현자(賢者)의 지(智)와, 성인(聖人)의 천도(天道)는 모두 명이지만 이것은 성에 달려 있으므로, 군자는 이를 명이라 하지 않는다.”
  (『맹자』 「진심 하(盡心 下)」) 

 11. 孟子曰(맹자왈) 堯舜(요순)은 性者也(성자야)요 湯武(탕무)는 反之也(반지야)시니라 動容周旋(동용주선)이 中禮者(중례자)는 盛德之至也(성덕지지야)니 哭死而哀(곡사이애)가 非爲生者也(비위생자야)며 經德不回(경덕불회)가 非以干祿也(비이간록야)며 言語必信(언어필신)이 非以正行也(비이정행야)니라
  맹자께서 말했다. “요순(堯舜)께서는 타고난 성(性)대로 하셨고, 탕무(湯武)께서는 성(性)을 회복하셨다. 모든 행동이 저절로 예(禮)에 맞는 것은 성덕(盛德)이 지극한 것이니, 죽은 자를 위해 곡(哭)하고 슬퍼함은 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떳떳한 덕(德)을 지키고 간사하지 않음은 녹(祿)을 구해서가 아니며,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는 것은 나의 행실이 바르다는 것을 보이려고 해서가 아니다.
  (『맹자』 「진심 하(盡心 下)」) 


순자의 성(性)[편집 | 원본 편집]

 12. 材性知能(재성지능)은 君子小人一也(군자소인일야)라 好榮惡辱(호영오욕)하며 好利惡害(호리오해)는 是君子小人之所同也(기군자소인지소동야)라 若其所以求之之道則異矣(약기소이구지지도즉이의)라 小人也者(소인야자)는 疾爲誕而欲人之信己也(질위탄이욕인지신기야)하고 疾爲詐而欲人之親己也(질위사이욕인지친기야)하며 禽獸之行而欲人之善己也(금수지행이욕인지선기야)라 慮之難知也(여지난지야)요 行之難安也(행지난안야)며 持之難立也(지지난립야)라
  사람의 자질‧본성‧지혜‧재능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똑같다. 영예를 좋아하고 치욕을 싫어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곧 군자와 소인이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영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길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소인은 온 힘을 다해 거짓말을 자행하여 남이 자기를 믿어주기 바라고, 온 힘을 다해 속임수를 부려 남이 자기를 친근하게 대해주기 바라며, 짐승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남이 자기를 찬미해주길 바란다. 생각을 하더라도 스스로 알기 어렵고, 무엇을 행하더라도 안정되기 어려우며, 주장을 견지하더라도 확립되기 어렵다.
...君子者(군자자)는 信矣(신의)요 而亦欲人之信己也(이역욕인지신기야)하고 忠矣(충의)요 而亦欲人之親己也(이역욕인지친기야)하며 修正治辨矣(수정치변의)요 而亦欲人之善己也(이역욕인지선기야)라 慮之易知也(여지이지야)하고 行之易安也(행지이안야)하며 持之易立也(지지이립야)라 成則必得其所好(성즉필득기소호)하고 必不遇其所惡焉(필불우기소오언)이라 是故窮則不隱(시고궁즉불은)하고 通則大明(통즉대명)하며 身死而名彌白(신사이명이백)이라 ...그러므로 군자의 경우는 자기가 진실하면서 또 남이 자기를 믿어주길 바라고, 자기가 충성스러우면서 또 남이 자기를 친근하게 대해주길 바라며, 자기가 선량하고 정직하여 일을 잘 처리하면서 또 남이 자기를 찬미해주길 바란다. 생각을 하면 쉽게 알고, 무엇을 행하면 쉽게 안정되며, 견지하는 주장은 쉽게 확립된다. 결국에는 반드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얻고, 반드시 그가 싫어하는 것은 만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가 곤궁하더라도 남이 그 명성을 가리지 못하고 통달하면 크게 드러나며, 몸은 죽더라도 명성은 더욱 드러난다.
小人莫不延頸舉踵而願曰(소인막불연경거종이원왈) 知慮材性(지려재성)은 固有以賢人矣(고유이현인의)라 夫不知其與己無以異也(부부지기여기무이이야)하니 則君子注錯之當(즉군자주조지당)이요 而小人注錯之過也(이소인주조지과야)니라 소인은 목을 길게 빼고 발돋움하며 흠모하여 말하기를 “〈이런 사람의〉 지혜와 생각, 자질과 본성은 본디 일반인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가 보다.”라고 하지 않는 자가 없다. 대체로 그들은 군자가 자기와 하등의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모르니, 군자의 행동거지는 온당하고 소인의 행동거지는 잘못되었다. (『순자』 「영욕(榮辱)」)


 13. 縱情性而不足問學(정정성이부족문학)이면 則爲小人矣(즉위소인의)라 爲君子則常安榮矣(위군자즉상안영의)며 爲小人則常危辱矣(위소인즉상위욕의)라 凡人莫不欲安榮而惡危辱(범인막불욕안영이오위욕)이라 故唯君子爲能得其所好(고유군자위능득기소호)하고 小人則日徼其所惡(소인즉일요기소오)라
  타고난 성정(性情)대로 방임하고 학문이 부족하면 소인(小人)이 될 것이다. 군자가 되면 언제나 편안하고 영예로우며 소인이 되면 언제나 위태하고 치욕스러울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란 편안하고 영예롭기를 바라며 위태하고 치욕스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지만 오직 군자만이 그가 좋아하는 것을 능히 얻어낼 수 있고 소인은 날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불러들인다.
  (『순자』 「유효(儒效)」) 


 14. 人無師法(인무사법)이면 則隆性矣(즉륭성의)요 有師法(유사법)이면 則隆積矣(즉륭적의)리라 而師法者(이사법자)는 所得乎(情)[積](소득호적)이요 非所受乎性(비소수호성)이라 不足以獨立而治(부족이독립이치)라
  사람에게 스승과 법도가 없으면 본성의 욕구[성(性)]에 치중할 것이고 스승과 법도가 있으면 예의(禮義)를 학습하는 데에 치중할 것이다. 스승과 법도로 〈자기를 제어하는 것은〉 후천적인 학습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천성으로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천성은 스승과 법도를 제쳐두고〉 홀로 서서 〈그 자체의 불완전함을〉 다스릴 수 없다.
  (『순자』 「유효(儒效)」) 


 15. 積善而全盡(적선이전진)을 謂之聖人(위지성인)이라 彼求之而後得(피구지이후득)하고 爲之而後成(위지이후성)하고 積之而後高(적지이후고)하고 盡之而後聖(진지이후성)이라 故聖人也者(고성인야자)는 人之所積也(인지소적야)라 人積耨耕而爲農夫(인적누경이위농부)하고 積斲削而爲工匠(적착삭이위공장)하고 積反貨而爲商賈(적반화이위상고)하며 積禮義而爲君子(적예의이군자)라 ... 是非天性也(시비천성야)라 積靡使然也(적마사연야)라
  선행을 쌓아 완전한 것을 성인(聖人)이라 이른다. 그런 사람은 부단히 구한 뒤에 얻고 부단히 실행한 뒤에 이루고 부단히 쌓은 뒤에 높아지고 완전해진 뒤에 성스러워진다. 그러므로 성인이란 일반 사람이 부단히 선행을 쌓아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김매고 밭 가는 기량을 쌓아서 농부가 되고 나무를 베고 깎는 기술을 쌓아서 장인(匠人)이 되며 물건을 파는 경험을 쌓아서 상인이 되고 예의에 맞는 덕행을 쌓아서 군자가 된다. ... 이는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쌓인 습관과 연마한 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순자』 「유효(儒效)」) 


 16. 說豫娩澤(열예면택)과 憂戚萃惡(우척췌악)은 是吉凶憂愉之情(시길흉우유지정)이 發於顔色者也(발어안색자)라 歌謠謸笑(가요오소)와 哭泣諦號(곡읍제호)는 是吉凶憂愉之情(시길흉우유지정)이 發於聲音者也(발어성음자야)라 芻豢稻粱酒醴(추환도량주례)(餰鬻魚肉(전죽어육))菽藿(酒)[水]漿(숙곽(주)[수]장)은 是吉凶憂愉之情(시길흉우유지정)이 發於食飮者也(발어음식자야)라 卑絻黼黻文織(비문보불문직)과 資麤衰絰菲繐菅屨(자추최질비세관구)는 是吉凶憂愉之情(시길흉우유지정)이 發於衣服者也(발어의복자야)라 ... 
  대체로 즐겁고 기쁠 때 얼굴이 온화하여 윤택한 것과 근심하고 슬플 때 얼굴이 초췌하여 추한 것은 곧 길한 일과 흉한 일에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얼굴빛에 나타난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장난하고 웃는 것과 곡하며 울부짖는 것은 곧 길한 일과 흉한 일에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목소리에 나타난 것이다. 〈소‧양‧돼지‧개 등〉 육류, 쌀과 기장, 술과 단술, 생선의 고기, 그리고 된죽, 콩과 콩잎, 미음은 곧 길한 일과 흉한 일에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음식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복의 관(冠), 예복, 채색문양의 견직물과 굵은 베의 상복, 상복에 두르는 테, 얇은 삼베옷, 짚신은 곧 길한 일과 흉한 일에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복장에 나타난 것이다. ... 
兩情者(양정자)는 人生固有端焉(인생고유단언)이라 若夫斷之繼之(약부단지단지)하며 博之淺之(박지천지)하며 益之損之(익지손지)하며 類之盡之(유지진지)하며 盛之美之(성지미지)하여 使本末終始 莫不順比(사본말종시막불순비)하여 足以爲萬世則(족이위만세칙)이면 則是禮也(즉시례야)라 非順孰脩爲之君子(비순숙수위지군자)면 莫之能知也(만지능지야)라 性者(성자)는 本始材朴也(본시재박야)요 僞者(위자)는 文理隆盛也(분리륭성야)라 無性則僞之無所加(부성즉위지무소가)하고 無僞則性不能自美(무위즉성불능자미)라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이〉 두 감정은 사람의 본성 속에 본디 그 근원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것을 자르기도 하고 이어주기도 하며, 넓혀주기도 하고 좁혀주기도 하며, 더해주기도 하고 덜어주기도 하며, 법도에 맞게 하고 충분히 표현되도록 하며, 성대해지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근본 원칙과 세부 내용, 인생의 종결과 시작이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어 충분히 천추만대(千秋萬代)의 법칙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예(禮)이다. 〈예를〉 순종하고 잘 알며 익히고 실행하는 군자가 아니면 이와 같은 도리를 알 수 없다. 사람의 본성은 애당초 〈다듬지 않은〉 목재처럼 소박한 것이고, 인위(人爲, 사람의 작위)는 예절 형식이 성대하게 드러난 것이다. 본성이 없다면 인위가 가해질 곳이 없고, 인위가 없다면 본성은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가 없다. (『순자』 「예론(禮論)」)


 17. 人之所欲(인지소욕)은 生甚矣(생심의)요 人之所惡(인지소오)는 死甚矣(사심의)라 然而人有從生成死者(연이인유종생성사자)하니 非不欲生而欲死也(비불욕생이욕사야)라 不可以生而可以死也(불가이생이가이사야)라 故欲過之而動不及(고욕과지이동불급)은 心止之也(심지지야)라 心之所可中理(심지소가중리)면 則欲雖多(즉용수다)라도 奚傷於治(해상어치)리오 欲不及而動過之(욕불급이동과지)는 心使之也(심사지야)라 心之所可失理(심지소가실리)면 則欲雖寡(즉욕수과)라도 奚止於亂(해지어란)이리오 故治亂在於心之所可(고치란재어심지소가)하고 亡於情之所欲(망어정지소욕)이라
  사람이 원하는 것은 사는 것이 가장 크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죽는 것이 가장 크다. 그렇지만 사람들 가운데 삶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취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삶을 원하지 않고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살면 안 되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지나치더라도 행동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이를 제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에 부합된다면 욕망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욕망은 미치지 않는데 행동이 지나치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면 욕망이 비록 적다 하더라도 어찌 국가가 어지러워지는 정도에서 멈추겠는가. 그러므로 치란(治亂: 다스려짐과 혼란함)은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에 부합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고 인정(人情(의 욕망이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는 않다.
... 性者(성자)는 天之就也(천지취야)요 情者(정자)는 性之質也(성지질야)며 欲者(욕자)는 情之應也(정지응야)라 以所欲爲可得而求之(이소욕위가득이구지)는 情之所必不免也(정지소필불면야)요 ... 欲雖不可去(욕수불가거)라도 求可節也(구가절야)라 所欲雖不可盡(소욕수불가진)이라도 求者猶近盡(구자유근진)하고 欲雖不可去(욕수불가거)라도 所求不得(소구부득)하면 慮者欲節求也(여자욕절구야)라 道者(도자)는 進則近盡(진즉근진)하고 退則節求(퇴즉절구)하니 天下莫之若也(천하막지약야)라 ... 道者(도자)는 古今之正權也(고금지정권야)라 離道而內自擇(이도이내자택)하면 則不知禍福之所託(즉부지화복지소탁)이라 본성이란 하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감정이란 본성의 실제내용이며 욕망이란 감정의 반응이다.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감정이 반드시 면할 수 없는 현상이고 ... 욕망은 비록 버릴 수 없더라도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비록 전부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추구하는 자는 그래도 전부 만족시키는 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욕망은 비록 버릴 수 없더라도 추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사려가 있는 자는 자기의 추구를 절제하려고 한다. 정도(正道)를 얻은 사람은 세상에 나가 〈존귀할 때는〉 자기의 욕망을 전부 만족시키는 데에 가까이 다가가고, 초야로 물러나 〈미천할 때는〉 자기의 추구를 절제하는 것이니, 천하에 〈정도(正道)보다〉 좋은 것은 없다. ... 도(道)란 고금을 통하여 정확한 준칙이다. 도를 떠나서 자기 주관으로 선택한다면 화(禍)와 복(福)이 깃들어 있는 데를 모른다. (『순자』 「정명(正名)」)


 18. 人之性惡(인지성악)하니 其善者(기선자)는 僞也(위야)라 今人之性(금인지성)은 生而有好利焉(생이유호리언)하니 順是(순시)라 故爭奪生而辭讓亡焉(고쟁탈생이사양망언)이라 生而有疾惡焉(생이유질오언)하니 順是(순시)라 故殘賊生而忠信亡焉(구잔적생이충신망언)이라 生而有耳目之欲有好聲色焉(생이유이목지욕유호성색언)하니 順是(순시)라 故淫亂生而禮義文理亡焉(고음란생이예의문리망언)이라 然則從人之性(연즉종인지성)하고 順人之情(순인지정)엔 必出於爭奪(필출어쟁탈)하고 合於犯分亂理(합어범분란리)하여 而歸於曓(이귀어포)라 故必將有師法之化(고필장유사법지화)와 禮義之道(예의지도)니 然後出於辭讓(연후출어사양)하고 合於文理(합어분리)하여 而歸於治(이귀어치)라 用此觀之(용차관지)하면 然則人之性惡明矣(연즉인지성악명의)니 其善者(기선자)는 僞也(위야)라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 본성을 그대로 따르므로 쟁탈하는 행위가 생기고 사양하는 일이 없어진다.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심리가 있으니, 이 본성을 그대로 따르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 생기고 충성스럽고 성실한 마음이 없어진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음악과 빛깔을 좋아하는 귀와 눈의 욕구가 있으니, 이 본성을 그대로 따르므로 음란한 마음이 생기고 예의와 법도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을 방종하게 풀어놓고 사람의 성정(性情)대로 따를 경우에는 반드시 쟁탈하는 행위가 나타나게 되고 분수를 어기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행위와 합치되어 결국 난폭해지는 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제에 의한 교화와 예의를 따르는 일이 있어야 하니,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사양하는 일이 나타나고 예절과 법도에 합치되어 〈결국 세상이〉 다스려지는 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순자』 「성악(性惡)」) 


 19. 孟子曰(맹자왈) 今人之性(善)[惡](금인지성선)은 將皆失喪其性故也(장개실상기성고야)라하니라 曰若是(왈약시)면 則過矣(즉과의)라 今人之性(금인지성)은 生而離其朴(생이리기박)하고 離其資(이기자)하여 必失而喪之(필실이상지)라 用此觀之(용차관지)면 然則人之性惡明矣(연즉인지성악명의)라
  맹자는 “대체로 사람의 본성이 악해진 것은 분명히 모두가 그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말은 이렇다. 그와 같이 〈주장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대체로 사람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질박함을 떠나고 그 고유한 자질을 벗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그의 〈선량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다.
  (『순자』 「성악(性惡)」) 


 20. 問者曰(문자왈) 人之性惡(인지성악)하면 則禮義惡生(즉예의오생)고 하면 應之曰(응지왈) 凡禮義者(범예의자)는 是生於聖人之僞(시생어성인지위)요 非故生於人之性也(비고생어인지성야)라 故陶人埏埴而爲器(고도인연식이위기)하니 然則器生於(工)[陶]人之僞(연즉기생어도인지위)요 非故生於人之性也(비고생어인지성야)라 故工人斲木而成器(고공인착목이성기)하니 然則器生於工人之僞(연즉기생어공인지위)요 非故生於人之性也(비고생어인지성야)라 聖人積思慮(성인적사려)하고 習僞故(습위고)하여 以生禮義而起法度(이생예의이기법도)라 然則禮義法度者(연즉예의법도자)는 是生於聖人之僞(시생어성인지위)요 非故生於人之性也(비고생어인지성야)라
  묻는 사람이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면 예의는 어디서 생기는가?”라고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대체로 예의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후천적인〉 작위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도공이 진흙을 반죽하여 기물을 만드니, 그렇다면 기물은 도공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고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장인이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드니, 그릇은 장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고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생각을 축적하고 작위를 익혀 예의를 만들어내고 법도를 세운다. 그렇다면 예의와 법도는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若夫目好色(약부목호색)하고 耳好聽(이호청)하고 口好味(구호미)하고 心好利(심호리)하며 骨體膚理好愉佚(골체부리호유일)하니 是皆生於人之情性者也(시개생어인지성정자야)라 感而自然(감이자연)이요 不待事而後生之者也(부대사이후생지자야)라 夫感而不能然(부감이불능연)이요 必且待事而後然者(필차대사이후연자)를 謂之生於僞(위지생어위)라 ... 故聖人化性而起僞(고성인화성이기위)하니 僞起而生禮義(위기이생예의)하고 禮義生而制法度(예의생이제법도)라 然則禮義法度者(연즉예의법도자)는 是聖人之所生也(시성인지소생)라 故聖人之所以同於衆(고성인지소이동어중)하여 其不異於衆者(기불이어중자)는 性也(성야)요 所以異而過衆者(소이이이과중자)는 僞也(위야)라 눈이 고운 색깔을 좋아하고 귀가 음악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맛깔스러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재물과 이익을 좋아하며 신체와 살결이 쾌적하고 편안함을 좋아하니, 이는 모두 사람의 성정(性情)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는 외물에〉 감촉되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노력의 과정을 거친 뒤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물에〉 감촉되더라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 반드시 노력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렇게 되는 것을 작위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자기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작위의 노력을 행하는 것이니, 작위의 노력이 행해진 뒤에 예의가 생겨나고 예의가 생겨난 뒤에 법도를 제정한다. 그렇다면 예의와 법도란 성인(聖人)이 만들어낸 것이다. 성인이 일반 대중과 같아 저 일반 대중과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것은 〈선천(先天)의〉 본성이고, 〈일반 대중과〉 다르면서 일반 대중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은 〈후천의〉 작위 때문이다.


오늘의 토론 주제(2023.3.30)[편집 | 원본 편집]

 1-1. 맹자적 관점(맹문파(孟門派))와 순자적 관점(순문파(荀門派)) 중에 자신의 입장을 정해보세요.
 1-2. 맹문파는 순문파에게, 순문파는 맹문파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생각해 보세요. 반박이 아닌 질문인 만큼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질문들이면 좋겠습니다.
 2. 상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논의해 보세요. 그 답변들에는 맹자 혹은 순자가 성(性)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그 의도를 전달하는 내용이 담겨도 좋겠습니다. 혹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면 왜 그런가요? 맹자와 순자가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 혹은 문제점을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오늘의 토론 내용(2023.3.30)[편집 | 원본 편집]

  • 순문파 -> 맹문파
 1. 인간본성이 선하다면 어릴 때부터 이루어지는 후천적인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2. 현실 속 인간이 정말 아무런 배움 없이 물가에 빠지려고 하는 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 인간은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정말 가지고 있을까? 생명의 가치는 배움을 통해 얻어지는 것 아닐까?
 3. 왕따와 같은 전세계 보편적인 부도덕한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악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4. 결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후천적인 규범이 아닌가?
 5. 맹자의 선이 완전한 선이 아니라면 성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불선으로 빠질 수 있는 존재라면 맹자가 말한 선은 불완전한 것 아닌가?
 6. 인간과 동물이 정말 다를까? 어떤 측면에서 동물도 도덕적이지 않나? Ex) 까마귀가 부모를 봉양함. 일벌들이 조직을 위해 일함 등
 7.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후천적인 교육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닐까?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 맹문파 -> 순문파
 1.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능이 인간을 선하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경국 맹자의 인의예지의 싹이 되는 사단, 특히 지와 시비지심이 이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지능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능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서로 통하는 말이 아닐까?
 2.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후천적으로 익혀진 선, 또 선한 행위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건 인간이 선천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인데 그런 불완전한 존재에게서 만들어진 예, 규범 등 역시 불완전한 것 아닐까? 그런 예, 규범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가?
 3.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악한데 왜 규칙이나 법을 규정하여 사회를 보다 선한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었을까? 예를 만든 성인도 결국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왜 예를 제정했을까?
 4. 선과 악 중에서 악한 것을 학습하기가 더 쉬운데 인간 본성이 악하다면 인간이 어떻게 선한 쪽으로 교화될 수 있는가?
 5. 악하다는 것도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 것 아닐까? 순자의 성악설에서 말하는 악은 무엇인가?


순문파, 맹문파의 답변(2023.4.4)[편집 | 원본 편집]

  • 순문파의 답변
 3.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악한데 왜 규칙이나 법을 규정하여 사회를 보다 선한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었을까? 예를 만든 성인도 결국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왜 예를 제정했을까?

순자의 악: 배고프면 먹고싶고 힘들면 앉고 싶다 등 본능에 관련된 것, 하지만 절대적인 악이 아닌 극복가능한 악
- 인간의 본능대로 배고프다고 해서 뺏어 먹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대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사이가 나빠지고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음 => 싸움은 결국 모두에게 마이너스이고 이득이 안됨
- 인간은 무리지어 살기 때문에 선할 수 밖에 없음. 선하게 사는 것이 이득임. 사회에서 악한 행동을 해서 이득이 없음
=> 이 지점은 사회계약설과 연관되는 관점임: 사회에 존재하는 자원은 한정적이고 그 자원을 원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다툼을 최소화하면서 자원을 나누기 위해 법과 규칙이 제정되었음
- 성인들 역시 배고프면 먹고싶고 힘들면 눕고싶었을 것임. 그러나 이런 본성을 극한까지 제어했기 때문에 선해질 수 있었음. 그래서 아무리 배고파도 남의 것 뺏어먹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어른 먼저 앉게 하는 예의(규칙, 법)가 곧 선임
- 또한 인간은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지성이 본능을 앞서 판단했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는 도덕성이 만들어질 수 있었음
- 선은 노력이고 갈고닦는 것이고 강제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악하더라도 악한 본성을 절제함으로써 선한 쪽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음. 따라서 순자의 악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극복 가능한 악임


 4. 선과 악 중에서 악한 것을 학습하기가 더 쉬운데 인간 본성이 악하다면 인간이 어떻게 선한 쪽으로 교화될 수 있는가?

순자의 악: 인간은 선한 쪽으로 교화될 수 있으나 그러한 결과를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무결한 선이 아니기에 악하다고 한 것임
- 순자의 성악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악하다는 맥락을 말한 것이 아니라 추후에 선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 하지만 인간이 100퍼센트 완전히 선해질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성악설을 말한 것임


  • 맹문파의 답변
 5. 맹자의 선이 완전한 선이 아니라면 성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불선으로 빠질 수 있는 존재라면 맹자가 말한 선은 불완전한 것 아닌가?

맹자의 선: 선은 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은 아님. 가능성으로서의 선
- 식물의 씨앗이 모자람이나 흠없이 완전하다고 해서 꽃을 무조건 피우지 않듯이, 인간은 모두 선을 꽃피울 수 있는 완전한 가능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지만 주어진 환경과 수양 등 외재적 원인에 따라 실현 여부가 달라짐
- ‘결과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선’에 대한 논의는 현실 세계에서 실현 가능하지도, 혼란한 당시 시대에 설득력을 가지지도 않음
- 현실에서 선한 행동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맹자에게는 언제나 피어있는 꽃보다는 꽃으로의 가능성을 내포한 씨앗으로서의 선을 본성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이 더 적합했으리라고 봄
- 같은 맥락에서 후천적 교육은 ‘사단’이 인의예지로 발현되기 위한 과정일 것이라 봄. 제도와 예법은 문화마다 다르지만 그 아래 깔린 상호 배려와 존중, 불해의 가치가 공통적인 것처럼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이 각자의 현실에 발현되어야 할 가장 올바른 형태(예,지로 나타나는)를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