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장자의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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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성(性)'에 대한 담론의 유행[편집 | 원본 편집]

우리가 보는 논어, 맹자 등의 책은 후대에 최종 편집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맹자가 살았던 당시의 그 원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곽점초간의 발견: 중국 호북성 곽점에서 초나라 때 무덤이 발굴됨. 이 무덤은 B.C.4세기 중순~B.C.3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되며 <<노자>>를 비롯하여 당시의 도가, 유가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들이 발굴되었음

곽점의 위치

곽점.jpg

☞ 이미지 출처: [중국학 위키백과: 곽점초간]


초나라의 위치

전국칠웅.gif

☞ 이미지 출처: [중국학 위키백과: 곽점초간]


<<곽점초간>> <성자명출>에 보이는 유가사상: 습(習)을 통한 심성 수양
- 정영수, <유학의 인간본성론: <성자명출(性自命出)>을 중심으로>, <<범한철학>> 제57집, 범한철학회, 2010, 76~78쪽

 * "소는 태어나 장대하게 자라나고, 기러기는 목이 길게 자라나는 것은 그들의 본성[성(性)]이 그렇게 한 것이나, 사람은 배워서 그렇게 한다."(<성자명출>)
  => 소와 기러기가 몸이 장대하고 목이 길게 자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나 인간은 배움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 성장함
* "본성을 기르는 것은 반복된 익힘[습(習)]이다." => '습'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습 혹은 반복된 익힘으로 번역되며 이것은 후천적인 학습과정임

○ <<곽점초간>> <성자명출> 등의 출토문헌과 맹자, 순자, 고자 등 전래문헌 속 성(性)에 관한 담론을 통해 전국시대에 성(性)에 관한 논의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음


전국시대 '성(性)'에 관한 다양한 개념 풀이들[편집 | 원본 편집]

☞ 빈동철, <전국시대의 '성(性)'에 대한 담론과 인간의 본성>, <<동양철학연구>> 제108집, 동양철학연구회, 2021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A.C.Graham): 고대 중국 사상가들이 말한 성(性)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것이 아님. "오히려 그들은 자연적이지만 손상되지 않고 충분히 길러지는 경우라면 그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해 주는 발전(developments)에 관심이 있음". 진행되고 있는 것, 성장의 완숙을 기다리는 것. 성(性)은 '생(生)'이라는 글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러한 한 '生(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임. 한 생물의 삶을 구성하는 출생, 성장,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과정일 뿐만 아닐 삶(生)의 과정에서 그 개체의 적절한 발전과 성장의 방향성을 의미함

먼로(Donald Munro) , 블룸(Irene Bloom) 등: '성(性)'은 여전히 인간본성(human nature)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함. 한 사람의 본성(nature)은 인간의 행동을 통해 변경될 수 없는 것,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주어진 것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쨌건, 성(性)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이론이 발전해 가면서 유가철학도 공자, 맹자, 순자 식의 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함. 그로인해 『주역』(철학책으로서의 『역전』부분), 『중용』 등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발전하게 됨. 그 전에 『장자』를 통해 그 당시 얼마나 철학적으로 치열했을지 들여다 봅시다!


장자의 성(性)[편집 | 원본 편집]

  •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 두 코드: 유가사상 & 노장사상

문화로 이해하는 공맹+노장.png

☞ 출처: 최재목 역주, 『노자』, 을유문화사, 2012, 29쪽


  • 장자 간략 소개

☞ 번역문 및 해제 참조: 동양고전종합DB 안병주 역주

○ 상식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가치를 큰 소리로 비웃는 사상가가 있었음. 이 사상가의 책 《장자(莊子)》의 첫머리는 이런 말로 시작함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鯤)’이라고 한다.”

○ 상식을 뛰어 넘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붕새를 통해, 통쾌한 해학의 철학자 장자는 그가 주장하는 절대자유의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함
○ 물론 여기 등장하는 곤(鯤)이나 붕(鵬)도 결국은 변화되는 만물의 하나이고 만물이 모두 평등하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물(物) 가운데의 하나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상식을 초월한 곤(鯤)과 붕(鵬)을 통해 일단은 절대자유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임
=> 만물제동의 의미: 만물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고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
○ 장자의 첫 편인 '소요유(逍遙遊)'에 장자철학이 잘 드러나 있음. '소요(逍遙)'의 의미는 무위(작위함이 없음)로서 한가로이 거닐며 자유로이 왕래하는 모습으로 유(遊)자를 형용하는 것(장석창(蔣錫昌) 『장자철학(莊子哲學)』)임
○ 소요유, 즉 소요하는 '유(遊)'란 목적의식에 인도되지 않는 것이며, 또 때로는 인간적이고 작위적인 행위를 버리는 것, 잊어버리는 것이지만 더 깊게는 세간적인 인간사회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존재자(物)의 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 실체(道)로 다가가는 것임[이케다 토모히사(池田知久)]


장자의 성(性)[편집 | 원본 편집]

번역문 출처: 동양고전종합DB 안병주 선생님 역주

 1. 彼正正者(피정정자)는 不失其性命之情(불실기성명지정)하나니 故(고)로 合者不爲騈(합자불위병)하며 而枝者不爲跂(이지자불위기)하며 長者不爲有餘(장자불위유여)하며 短者不爲不足(단자불위부족)이니라
 是故(시고)로 鳧脛雖短(부경수단)하나 續之則憂(속지즉우)하고 鶴脛雖長(학경수장)하나 斷之則悲(단지즉비)하나니 故(고)로 性長(성장)이라 非所斷(비소단)이며 性短(성단)이라 非所續(비소속)이며 無所去憂也(무소거우야)니라
 意仁義(의인의)는 其非人情乎(기비인정호)인저 彼仁人(피인인)은 何其多憂也(하기다우야)오 且夫騈於拇者(부병어무자)는 決之則泣(결지즉읍)하고 枝於手者(지어수자)는 齕之則啼(흘지즉제)하나니
 ...
 今世之仁人(금세지인인)은 蒿目(호목)하야 而憂世之患(이우세지환)하고 不仁之人(불인지정)은 決性命之情(결성명지정)하야 而饕貴富(이도부귀)하나니 故(고)로 意仁義(의인의)는 其非人情乎(비기인정호)인저 自三代以下者(자삼대이하자)는 天下(천하)에 何其囂囂也(하기효효야)오
지극한 정도(正道)를 실천하는 사람은 타고난 성명(性命)의 실정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어진 것을 군더더기라 여기지 아니하며 갈래 진 것을 여분의 손가락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긴 것을 남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짧은 것을 부족하다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 주면 슬퍼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자르면 슬퍼한다. 그 때문에 타고난 본성(本性)이 긴지라 잘라야 할 것이 아니며, 타고난 본성이 짧은지라 이어 줄 것이 아니며 근심거리로 여겨 없앨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인의(仁義)는 인간의 실정[인정(人情)]이 아닐 것이다. 인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어찌하여 그리 근심이 많은고. 발가락의 군살은 갈라서 찢어 버리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여분으로 붙어 있는 손가락은 물어뜯어 떼어 버리면 아파서 소리 내어 운다. ... 요즘 세상의 인한 사람(仁人)은 근심스런 눈으로 세상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여기고 불인(不仁)한 자들은 성명의 실정을 결딴내 부귀를 탐낸다. 따라서 아무래도 인의는 인간의 실정이 아닌 것 같다. 하, 은, 주 삼대 이후에는 천하가 어찌 그리 시끄러운고. (『장자』 「병무(騈拇)」)


 2. 自三代以下者(자삼대이하자)론 天下莫不以物(천하막불이물)로 易其性矣(역기성의)라
 小人則以身(소인즉이신)으로 殉利(순리)하고 士則以身(사즉이신)으로 殉名(순명)하고 大夫則以身(대부즉이신)으로 殉家(순가)하고 聖人則以身(성인즉이신)으로 殉天下(순천하)하나니 故(고)로 此數子者(차수자자)의 事業(사업)이 不同(부동)하며 名聲(명성)이 異號(이호)하나 其於傷性(기어상성)하야 以身(이신)으로 爲殉(위순)에는 一也(일야)니라
삼대 이후로 천하 사람들이 외물(外物)로 자기 본성을 바꾸지 않은 이가 없었다. 소인(小人)은 자기 몸을 이익에 바쳤고 사인(士人)은 자기 몸을 명예에 바쳤고 대부는 자기 몸을 가(家)에 바쳤고 성인(聖人)은 자기 몸을 천하에 바쳤다. 그 때문에 이 몇 사람들의 사업이 동등하지 않고 명성이 호칭을 달리하지만 자기 본성을 해쳐서 자기 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장자』 「병무(騈拇)」)


 3. 天下不淫其性(천하불음기성)하며 不遷其德(불천기덕)이면 有治天下者哉(유치천하자재)아
 昔堯之治天下也(석요지치천하야)에 使天下(사천하)로 欣欣焉人樂其性(흔흔언인락기성)케하니 是(시)는 不恬也(불념야)요 桀之治天下也(걸지치천하야)에 使天下(사천하)로 瘁瘁焉人苦其性(췌췌언인고기성)케하니 是(시)는 不愉也(불유야)라
 ...
 人大喜邪(인대희야)에는 毗於陽(비어양)하고 大怒邪(대노야)에는 毗於陰(비어음)하나니 陰陽(음양)이 竝毗(병비)하면 四時不至(사시부지)하며 寒暑之和不成(한서지화불성)하야 其反傷人之形乎(기반상인지형호)인저
 ...
 且說明邪(차열명야)인댄 是淫於色也(시음어색야)오 說聰邪(열총야)인댄 是淫於聲也(시음어성야)오 說仁邪(열이야)인댄 是亂於德也(시란어덕야)오 說義邪(열의야)인댄 是悖於理也(시패어리야)오 說禮邪(열례야)인댄 是相於技也(시상어기야)오 說樂邪(열악야)인댄 是相於淫也(시상어음야)오 說聖邪(열성야)인댄 是相於藝也(시상어예야)오 說知邪(열지야)인댄 是相於疵也(시상어자야)니라
 天下將安其性命之情(천하장안기성명지정)인댄 之八者存(지팔자존)이라도 可也(가야)며 亡(무)라도 可也(가야)오 天下將不安其性命之情(천하장불안기성명지정)인댄 之八者(지팔자) 乃始臠卷獊囊而亂天下也(내시련권창낭이란천하야)이어늘
천하 사람들이 자기 본성을 어지럽히지 않고 자신의 덕을 바꾸지 않는다면 〈따로 특별히〉 천하를 다스릴 일이 있겠는가. 옛날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작위적으로 즐기게 했으니 이는 편안하게 한 것이 아니고, 걸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고달프게 자신의 본성을 괴롭히게 했으니 이는 즐겁게 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기뻐하면 자연계의 양기가 손상되고 지나치게 화를 내면 자연계의 음기가 손상되는데 음양이 모두 손상되면 사계절이 제때에 이르지 않으며 자연계의 춥고 더운 계절의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사람의 몸을 손상하게 된다. ... 눈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색깔을 탐닉하는 것이고, 귀 밝은 것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소리를 탐닉하는 것이고, 인(仁)을 좋아한다면 이는 사람이 본래 타고난 덕(德)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의(義)를 좋아한다면 이는 자연의 조리를 어기는 것이고, 예(禮)를 좋아한다면 이는 기교를 조장(助長)하는 것이고, 악을 좋아한다면 이는 넘침을 조장하는 것이고, 성인을 좋아한다면 이는 재주를 조장하는 것이고, 지식을 좋아한다면 이는 헐뜯음을 조장하는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性命)의 실정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면 이 여덟 가지(눈밝음(明)‧귀밝음(聰)‧인(仁)‧의(義)‧예(禮)‧악(樂)‧성(聖)‧지(知))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의 정을 편안히 누리지 못한다면 이 여덟 가지는 비로소 서로 얽히고설켜서 번거롭게 흔들어 대며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다. (『장자』 「재유(在宥)」)


 4. 孔子觀於呂梁(공자관어여량)하더시니 縣水三十仞(현수삼십인)이오 流沫四十里(유말사십리)라 黿鼉魚鼈之所不能游也(원타어별지소불능유야)러라
 見一丈夫游之(견일장부유지)코 以爲有苦而欲死也(이위유고이욕사야)로다하야 使弟子(사제자)로 竝流而拯之(병류이증지)한대 數百步而出(수백보이출)하야 被髮行歌而游於塘下(피발행가이유어당하)어늘
 孔子從而問焉(공자종이문언)하야 曰(왈) 吾以子(오이자)로 爲鬼(위귀)러니 察子則人也(찰자즉인야)랏다 請問(청문)하노라 蹈水有道乎(도수유도호)아
 曰(왈) 亡(무)라 吾(오)는 無道(무도)호라 吾始乎故(오시호고)하야 長乎性(장호성)하고 成乎命(성호명)하야 與齊俱入(여제구입)하며 與汨偕出(여골해출)하야 從水之道而不爲私焉(종수지도이불위사언)하노니 此吾所以蹈之也(차오소이도지야)니라
 孔子曰(공자왈) 何謂始乎故, 長乎性, 成乎命(하위시호고, 장호성, 성호명)고
 曰(왈) 吾生於陵而安於陵(오생어릉이안어릉)이 故也(고야)요 長於水而安於水(장어수이안어수) 性也(성야)요 不知吾(부지오)의 所以然而然(소이연이연)이 命也(명야)니라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여량(呂梁)에 노닐며 유람하였는데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가 30길이 되고, 물보라 치는 급류는 40리를 흘러가는데 큰 거북이‧악어‧물고기‧자라들도 헤엄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량(呂梁)의 급류에서〉 한 사나이가 헤엄치고 있는 것을 보고, 〈공자는〉 무엇인가 괴로움이 있어 죽으려고 뛰어든 것이라 생각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물길과 나란히 따라가면서 그를 건지게 하였는데, 사나이는 몇 백 걸음의 거리를 헤엄쳐 내려간 뒤 물에서 나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걷다가 노래하다 하면서 뚝방 아래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공자가 뒤좇아 가 물었다. “나는 〈그대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그대를 귀신이라고 여겼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인간이로다. 묻노니 물속을 헤엄치는 데에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사나이가 말했다. “없습니다. 나에게는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나는 본디 타고난 그대로에서 시작하고 습성(習性) 속에서 자라나고 자연의 이치를 따라 이루어서 소용돌이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며 솟는 물과 함께 물 위로 떠올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물의 법칙을 따를 뿐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헤엄을 잘 치는 방법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엇을 일러 본디 타고난 그대로에서 시작하고 습성(習性) 속에서 자라나고 자연의 이치를 따라 이룬다고 하는가?”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언덕에서 태어났는데 언덕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본디 타고난 그대로의 것이고, 물속에서 자라면서 물속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습성이고, 내가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저절로 그러한 것이 명(命)입니다.” (『장자』 「달생(達生)」)


  • 참고: 유가의 명(命)과 장자의 명(命)의 차이

☞ 서복관(徐復觀) 지음, 유일환 옮김, 『중국인성론사: 도가·법가 인성론』, 을유문화사, 1995, 124~125쪽

○ 유가에서는 삶과 죽음, 부유함과 귀함 등을 명(命)에 전가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책임을 각 개인의 노력에 두었음. 그 근거로서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성(性)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지 운명이라는 명(命)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음. 따라서 유가에서 말하는 '성명(性命)'의 명은 도덕적 천명(天命)이지 맹목적 운명이 아닌 것임 => 중용, 주역, 성리학에서 성명을 다룰 것임

○ 반면 장자가 말하는 명(命)은 운명과 천명의 구별이 없음. 그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또 명에 귀속시키고, 유가에서 인력(人力)의 범위에 귀속시킨 것을 또 명의 범위 안에 구분해 넣었음. 장자의 명은 덕이 실현하는 과정 중에서 어떤 사람이나 물(物)에 대하여 나누어진 한도임. 이런 한도를 명이라 일컫었음. 이것은 명령하면 마땅히 복종해야 되는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임


 5. 泰初(태초)에 有無(유무)오 無有無名(무유무명)이라 一之所起(일지소기)니 有一而未形(유일이미형)하얏거늘 物得以生(물득이생)을 謂之德(위지덕)이오
 未形者 有分(미형자유분)이나 且然無閒(차연무간)을 謂之命(위지명)이오
 留動而生物(유동이생물)이어든 物成生理(물성생리)를 謂之形(위지형)이오
 形體保神(형체부신)하야 各有儀則(각유의칙)을 謂之性(위지성)이니
 性脩反德(성수반덕)하야 德至同於初(덕지동어초)하리니 
 태초에는 무(無)만 있었고 존재하는 것[유(有)]이란 아무 것도 없었고 이름조차 없었다. 일(一: 미분화의 일(一))이 여기서 생겨나 일(一)은 있었으나 아직 형체는 없었다.
 이윽고 만물이 이 일(一)을 얻어서 생겨났는데 이것을 덕(德)이라 한다.
 아직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보이는 큰〉 틈바구니는 없는 것, 이것을 명(命)[분화의 필연성]이라 한다.
 움직여서(유행하여) 만물을 낳는데 물(物)이 이루어져 결[이(理)]이 나타나는 것, 이것을 형(形, 형체)이라 한다.
 이 형체(形體, 육체)가 정신을 보유해서 각각 고유한 법칙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
 성(性)이 닦여져 덕(德)으로 돌아가면 덕이 처음과 같아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윽고 만물이 이 일(一)을 얻어서 생겨났는데 이것을 덕(德)이라 한다: 덕은 만물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진 것. 덕이란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는 것[미형(未形)]'이지만 형체 쪽에서는 '이미 형체가 이루어진 것[이형(已形)]'이어서 아직 형체가 없는 것과 이미 형체가 이루어진 것 사이에는 거리와 간격이 있게 되고 형체는 또한 덕을 떠나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은 이후 자식이 어머니 곁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처럼(서복관(徐復觀) 지음, 유일환 옮김, 『중국인성론사: 도가·법가 인성론』, 을유문화사, 1995, 120쪽)

아직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보이는 큰〉 틈바구니는 없는 것, 이것을 명(命)[분화의 필연성]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명을 운명으로 보는 견해, 천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운명으로 보는 관점에 따르면 “아직 형체는 없지만 〈내부에서〉 구분이 생겨 차례로 만물에 깃들면서 조금도 틈이 없다. 이것을 운명이라 한다.”고 풀이됨. 반면 임희일(林希逸)은 천명위성(天命謂性)의 명(命)으로 보는데 이에 따르면 아직 형태를 이루지 않은 일(一)이 각각 만물에 분산되어 있고[덕(德)] 매 하나의 물마다 이와 같이 나누어 받았으니 바로 이와 같이 추호도 차이가 없는 것이 명(命)임(동양고전종합DB, 서복관(徐復觀) 지음, 유일환 옮김, 『중국인성론사: 도가·법가 인성론』, 을유문화사, 1995, 124쪽)

이 형체(形體, 육체)가 정신을 보유해서 각각 고유한 법칙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 후쿠나가 미츠지는 "형(形)은 신(神)을 머무르게 하는 도구이고, 형(形)이 신(神)을 머무르게 함으로써 형신(形神) 각각의 일에 자연(自然)의 법칙이 갖춰지고 있는 상태를 ‘성(性)’이라고 한다."라고 풀이했음
=> 한편 서복관은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격식과 법칙이 있는데 이것이 곧 성이라고 보았음. 따라서 성은 덕이 만물을 완성한 이후에 여전히 만물의 형체 안에 보유하고 있는 씨앗임
=> 유가에서는 성과 명을 함께 연결해 쓰는 경우 명으로 성의 근원을 설명할 때이고, 장자의 경우 명으로 성의 결정성을 표명할 때 쓰임(서복관(徐復觀) 지음, 유일환 옮김, 『중국인성론사: 도가·법가 인성론』, 을유문화사, 1995, 126쪽)


오늘의 토론 주제(2023.4.4)[편집 | 원본 편집]

 장자가 말하는 성(性)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장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선택한 맹자 혹은 순자의 성(性)에 관한 논의는 어떤 비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3.4.4)[편집 | 원본 편집]

  • 맹자, 순자의 본성 논의가 자연성을 오히려 부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비판

- 자연스러워야할 본성에 인위적으로 본성을 부여해서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음
- 유가에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고 부유함과 귀함을 정의하는 것부터 장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기존에 존재하는 것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음
- 장자는 인위적인 상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중요시 함. 따라서 순자의 성악설에 관한 논의에서 악한 본성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님

=> 장자의 인위성의 거부에 대한 생각들: 인위적인 것에는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장점을 위해 단점을 감수하기보다는 장점을 포기하면서까지 단점을 배제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 같음
=>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성악 성선은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만든 인위적인 것이기에 장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러한 논의 자체가 필요한 것인가? 굳이 그러한 논의를 거치면서 분쟁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라는 주장을 할 것 같음

  • 본성이라는 논의를 통해 성인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모든 인간 삶의 목표를 정하는 데 대한 비판

- 장자는 맹자와 순자가 얘기하는 성인이 되기 위한 노력 등 그에 따른 후천적인 교육 또한 사람의 본성을 틀에 맞추어 억제하는 것이라고 여겼음
- 사람의 이름이나 지위 자체도 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맹자나 순자가 이상적으로 여기듯이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삶을 미리 정하는 것 역시 장자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음
=> 장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 삶의 모습: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이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다 보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음. 그리고 어떤 게 그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삶인지는 사람마다 다름. 왜냐하면 타고나는 게 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