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주역과 중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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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에서도 이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탐색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까지 확장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중용(中庸)』이라는 책[편집 | 원본 편집]

☞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간명한 중국철학사』, 마루비, 2020, 283쪽

○ 『예기』 49편 중 31번째 편명임
○ 『중용』은 한나라 때부터 중시되었음
○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것이라고 했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중용설(中庸說)’ 2권이 소개되고 있음
○ 『중용』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四書)라고 일컬어졌으며, 유가사상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우주관을 보충해주고 있는 문헌임
○ ‘중용(中庸)’의 의미
- 중(中): 단지 산술적인 중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됨. ‘중’의 참뜻은 너무 지나치지도(過), 모자라지도 않는(不及) 꼭 알맞은 것을 뜻함
- 용(庸): 평범한 일상[상(常)]. 인간이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하는 것처럼 인간관계와 도덕에도 그대로 적용됨

  • [참고] 동양저울: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를 이리저리 움직여 평행을 이루었을 때 무게를 알아내는 방식

동양저울.jpg

☞ 그림출처: https://jbfood.go.kr/movie/movie_text_07_16.html

 1. 子路問强(자로문강)한대 子曰(자왈) 南方之强與(남방지강여)아 北方之强與(북방지강여)아 抑而强與(억이강여)아? 寬柔以敎(관유이교)하고 不報無道(불보무도)는 南方之强也(남방지강야)니 君子居之(군자거지)니라. 衽金革(임금혁)하야 死而不厭(사이불염)은 北方之强也(북방지강야)니 而强者居之(이강자거지)니라. 故(고)로 君子(군자)는 和而不流(화이불류)하나니 强哉矯(강재교)여 中立而不倚(중립이불의)하나니 强哉矯(강재교)여 國有道(국유도)애 不變塞焉(불변색언)하나니 强哉矯(강재교)여 國無道(국무도)애 至死不變(지사불변)하나니 强哉矯(강재교)여!
자로(子路)가 강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남방(南方)의 강함인가? 북방(北方)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유순함으로 가르쳐 주고, 자신에게 무도(無道)한 짓을 해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가 이러한 강함에 머문다. 병기와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함이니, 강한 자가 이러한 강함에 머문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궁색했을 때 지키던 뜻을 변치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죽어도 지조를 변치 않으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중용』10장)


『중용』 속 인간 본성의 근거[편집 | 원본 편집]

 2.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 본성)이라고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道)를 닦아나가는 것을 교(敎: 가르침)라고 한다.
(『중용』1장)

서복관(徐復觀), 『中國人性論史: 先秦篇』, 上海三聯書店, 2001, 104쪽.

◈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사람마다 모두 최고 가치의 실체인 천(天)에서 온 공통 근거를 갖고 있으며 동질의 가치를 품부받았음. 따라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평등함
◈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인성(人性)을 따라 밖으로 나온 것이 도(道)이고 인간의 행위, 생활과 연관됨. 천(天)은 보편적 존재이나 각 사람들의 생명속으로 들어가면 각 개체의 특수성을 이루게 됨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는 무엇인가?


고대 중국사상에서의 도(道)[편집 | 원본 편집]

  • 도(道)의 글자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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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 한전(漢典)

=> 최초의 글자풀이책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한 도(道): 辵(간다)+首(머리가 향하는 곳, 목적지)
=> 본뜻: 사람이 가는 길, 일달(一達): 곧바로 쭉 통하는 한 갈래 길
=> 확장된 뜻: 도리(道理), 인도하다


  • 춘추시기 철학적 도(道)

☞ 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1], 책과 함께, 2015, 40~41쪽

○ 철학 개념으로는 춘추시기 역사책인 『좌전』, 『국어』에 최초로 등장. 천도(天道), 인도(人道)라는 형태로 나타남
- 정(鄭)나라의 점성술가 천문현상을 근거로 커다란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자 이에 대해 ‘자산(子産)’이라는 사람이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비판했음
=> 인간계의 일을 결정할 때 천문현상을 이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것이었는데 이러한 천도는 다분히 신비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지만 구체적인 인도에 대한 내용은 없었음


  • 도가철학의 도(道)

☞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간명한 중국철학사』, 마루비, 2020, 159~160쪽

 道生一(도생일)하고 一生二(도생이)하고 二生三(이생삼)하고 三生萬物(삼생만물)하니라.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는다.
(『도덕경(노자)』42장)
 道(도)는 可道(가도)면 非常道(비상도)요 名(명)은 可名(가명)이면 非常名(비상명)이라 無名(무명)은 天地之始(천지지시)요 有名(유명)은 萬物之母(만물지모)라
이것이 진정한 도(道)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도는 절대불변의 진정한 도가 아니며, 이것이 진정한 말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말은 절대적 진리의 말이 아니다. 무명의 상태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시작으로서의 진정한 도이며, 이윽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유명의 상태는 만물을 생산하는 어머니인 것이다.
(『도덕경(노자)』1장)

도가철학의 도: 유일한 도, 만물이 생겨나오는 원천,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無名)’의 도
- 도가들은 이 세상에 만물이 존재하므로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그 무엇’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음. 이 ‘무엇’을 도가들은 ‘도‘라고 칭했지만 사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님

그런데 왜 이런 도를 말했을까? 장자의 도에서 그 힌트를 찾아보면


장자의 도
☞ 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2], 책과 함께, 2015, 41~42쪽 / 이케다 토모히사(池田知久) 지음, 원용준 옮김, 『노장사상』

- 노자의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삶의 존재 방식 쪽으로 추진. 득도 & 도와의 합일 추구(노자에게도 있지만 노자보다 구체화)
- 장자는 감각기관을 배척하고 마음을 공허하게 하는 좌망, 심재라는 방식을 창안. 그것으로 도와 합일하고 정신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음
◈ 좌망(坐忘): 앉아서 모든 것을 잊어버림. 육체를 다 버리고 이목의 감각작용을 물리쳐서 모든 인위적이고 차별적인 지식을 잊어버리는 상태
◈ 심재(心齋): 마음을 비워 재계하는 것. 마음을 비워 재계하면 자신을 잊는 경지에 도달하게 됨

=> 장자의 도는 온갖 만물을 존재하게 하고 운동, 변화시키는 세계의 주재자인 데 반해 만물은 도에 의해 존재되어지고 운동, 변화되어지는 피재자임. 도는 시간, 공간의 존재형식을 초월하고 인간적인 가치에 얽매지 않는 것임. 반면 만물은 시간, 공간의 존재형식 아래에서 인간적인 가치에 매달리는 미약한 존재자임
=> 이케다 토모히사는 『장자』의 도-만물에 관한 논의에 대해, 여기에서의 중심문제가 인간소외의 극복이나 주체성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음. 즉 '만물제동'의 철학 하에 존재, 변화되는 만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세계의 궁극적 근원적 실재인 도에 도달하고 도를 파악함으로써 도가 지니고 있는 전능한 능력, 즉 온갖 만물을 존재, 변화시키는 주재자적 성격을 자기의 것으로 수중에 넣고 이를 통해 마침내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 시공간을 초월한 주재자, 자유로운 참된 실재로서의 인간이 되어 세계에 나서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보았음
만물제동의 의미: 만물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고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 장자는 옳고 그름[시비(是非)], 아름답고 추함[미추(美醜)]라는 편견을 떠나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세계를 주장했음


  • 유가철학의 도

공자의 도
☞ 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중국사상문화사전』, 책과 함께, 2015, 40~41쪽

- 공자는 인도의 내용에 구체성을 부여했음

 1. 보편적 진리로서의 도:“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조문도) 夕死可矣(석사가의)]”
2. 당위의 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吾道一以貫之(오도일이관지)]”

=> 여기에서 도는 대상이 인간에 한정됨. 당위로서의 도를 가리킴 =>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仁), 사회적 차원에서는 예(禮)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됨 => 여기서 도는 존재 개념에서 가치 개념으로 전환함

『중용』, 『역전』(철학책으로서의 『주역』부분)의 도
☞ 펑유란 지음, 정인재 옮김, 『간명한 중국철학사』, 마루비, 2020, 275~278, 287쪽

- 『중용』, 『주역』의 『역전』 부분에 나타나는 도는 복수적이며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원리들임
- 임금의 도, 신하의 도, 부모의 도, 자녀의 도는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함
- 『주역』의 『역전』 부분에는 만물 전체를 관통하는 도,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도가 나오기도 함(이후 이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볼 것임), 생성의 도, 변화의 도 등 원리의 측면에서 언급되기도 함
- 중용에서는 인간의 평범한 일상 안에 존재하는 도를 언급했음

 3. 道也者(도야자)는 不可須臾離也(불가수유리야)니 可離(가리)면 非道也(비도야)라 是故(시고)로 君子(군자)는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부도)하며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도(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보이지 않는 것에도 경계하고 삼가하며 들리지 않는 것에도 두려워한다. (『중용』1장)
 4. 子曰(자왈) 道不遠人(도불원인)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인지위도이원인)이면 不可以爲道(불가이위도)니라
공자가 말했다.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니, 사람이 도(道)를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멀리한다면 도(道)라고 할 수 없다. (『중용』13장)
 5. 君子之道(군자지도)는 辟如行遠必自邇(비여행원필자이)하며 辟如登高必自卑(비여등고필자비)니라
 군자의 도(道)는, 비유하면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중용』15장)
그런데 『중용』 속 인간 본성의 근거가 되는 천(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중용』속 인간 본성과 그 형이상학적 근거인 '천(天)' 관련 구절[편집 | 원본 편집]

 6. 惟天下至誠(유천하지성)이아 爲能盡其性(위능진기성)이니 能盡其性(능진기성)이면 則能盡人之性(즉능진인지성)이오 能盡人之性(능진인지성)이면 則能盡物之性(즉능진물지성)이오 能盡物之性(능진물지성)이면 則可以贊天地之化育(즉가이찬천지지화육)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가이찬천지지화육)이면 則可以與天地參矣(즉가이여천지삼의)니라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誠)한 사람이어야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 그 성(性)을 다하면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性)을 다하면 사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사물의 성(性)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 변화‧양육작용)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함께 나란히 설 수 있게 된다. (『중용』22장)


 7. 誠者(성자)는 天之道也(천지도야)요 誠之者(성지자)는 人之道也(인지도야)니 誠者(성자)는 不勉而中(불면이중)하며 不思而得(불사이득)하여 從容中道(종용중도)하나니 聖人也(성인야)요 誠之者(성지자)는 擇善而固執之者也(택선이고집지자야)니라
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 성(誠)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도(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저절로 도(道)에 맞으니 성인(聖人)이다. 성(誠)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지키는 자이다. (『중용』20장)


 8. 至誠(지성)은 無息(무식)이니 不息則久(불식즉구)하고 久則徵(구즉징)하고 徵則悠遠(징즉유원)하고 悠遠則博厚(유원즉박후)하고 博厚則高明(박후즉고명)이니라
지극한 성(誠)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징험이 나타나고, 징험이 나타나면 여유 있고 오래가고, 여유 있고 오래가면 넓고 두터워지고,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9. 博厚(박후)는 所以載物也(소이재물야)오 高明(고명)은 所以覆物也(소이부물야)오 悠久(유구)는 所以成物也(서이성물야)니라. 博厚(박후)는 配地(배지)하고 高明(고명)은 配天(배천)하고 悠久(유구)는 無疆(무강)이니라. 如此者(여차자)는 不見而章(불현이장)하며 不動而變(부동이변)하며 無爲而成(무위이성)이니라
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실어 주는 것이요, 높고 밝음은 만물을 덮어 주는 것이요, 여유있고 오래감은 물건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넓고 두터움은 땅을 짝하고, 높고 밝음은 하늘을 짝하고, 여유있고 오래감은 무궁함이다. 이와 같은 이는 나타내지 않아도 드러나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함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10. 天地之道(천지지도)는 可一言而盡也(가일언이진야)니 其爲物(기위물)이 不貳(불이)라 則其生物(즉기생물)이 不測(불측)이니라. 天地之道(천지지도)는 博也(박야) 厚也(후야) 高也(고야) 明也(명야) 悠也(유야) 久也(구야)니라
천지의 도(道)는 한마디 말로써 다할 수 있으니, 그 물건됨이 한결같아 변치 않는다. 그리하여 만물을 냄이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길고 오래감이다.


 11. 今夫天(금부천)이 斯昭昭之多(사소소지다)로대 及其無窮也(급기무궁야)하야는 日月星辰(일월성신)이 繫焉(계언)하며 萬物(만물)이 覆焉(부언)이니라 今夫地(금부지) 一撮土之多(일촬토지다)로대 及其廣厚(급기광후)하야는 載華嶽而不重(재화악이부중)하며 振河海而不洩(진하해이불설)하며 萬物(만물)이 載焉(재언)이니라 今夫山(금부산)이 一卷石之多(일권석지다)로대 及其廣大(급기광대)하야는 草木(초목)이 生之(생지)하며 禽獸居之(금수거지)하며 寶藏(보장)이 興焉(흥언)이니라 今夫水(금부수) 一勺之多(일작지다)로대 及其不測(급기불측)하야는 黿鼉蛟龍魚鼈(원타교룡어별)이 生焉(생언)하며 貨財殖焉(화재식언)이니라
지금 저 하늘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무궁함에 미쳐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 해, 달, 별)이 매달려 있고 만물이 덮여 있다.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넓고 두터움에 미쳐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으면서도 무거워하지 않고, 강과 바다를 거두어 넣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고 만물이 실려 있다. 산은 주먹만한 돌들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넓고 큼에 미쳐서는 초목이 생장하고 금수가 살며 보물이 나온다. 물은 한 잔의 물이 많이 모인 것인데, 그 측량할 수 없음에 미쳐서는 큰 자라와 교룡과 물고기와 자라가 살고 재화가 불어난다. (『중용』26장)


 12. 詩云(시운) 鳶飛戾天(연비여천)이어늘 魚躍于淵(어약우연)이라하니 言其上下察也(언기상하찰야)니라. 君子之道(군자지도)는 造端乎夫婦(조단호부부)하나니 及其至也(급기지야)하야는 察乎天地(찰호천지)니라
『시경(詩經)』 「한록편(旱麓篇)」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도가 위와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道)는 평범한 부부에게서 발단이 되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에 밝게 드러난다. (『중용』12장)


오늘의 토론 주제(2023.4.6)[편집 | 원본 편집]

 1.『중용』속 인간 본성의 근거인 천(天)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천과 인간본성의 관계, 천에 근거한 인간본성의 특징 등) 2. 이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3.4.6)[편집 | 원본 편집]

   1.『중용』속 인간 본성의 근거인 천(天)의 특징에 대해
  • 자연 천(天)

○ 자연 그 자체를 의미

  • 상호작용하는 천(天)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자연물
=> 경외의 대상에서 조화의 대상이 되었음

  • 항상성을 가지는 천
  • 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 근거로서의 천

○ 천명이 내적인 인간의 인성과 관계됨
=> 외부에 있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천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내재되어 있는) 천명
=> 그래서 인간과 천, 자연은 유사성을 지님
○ 중용에서는 천이 포용력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인간본성의 특징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함

이를 종합해 보면 중용에 나타난 고대인들은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물었던 것 같음. 인간 안에 천의 포용력, 진실함... 등이 본성적으로 깃들어 있고 인간이 선천적으로 그러한 존재라고 본다면 도덕적인 삶은 강제나 억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까?

  • 인간의 본성 = 하늘

○ 중용의 천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면도 있고, 지향해야할 목표인 것도 맞지만, 가만히 있다고 자연스럽게 된다고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음
=> 인간 수양의 필요성
○ 천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천의 이치를 따라야 함
=> 천의 이치에 따라 행동해야하고, 인간 사회의 많은 것들이 기반이 됨
비판점: 자연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운행한다고 하는데, 인간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러한 당위성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음


 2.『중용』속 인간 본성의 근거인 천(天)에 관한 논의가 오늘날 가지는 의미
  •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우르고 있는 중용의 하늘은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인 특징을 중시하는 현대 인간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음
  •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음. 일차적으로 사람도 자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보호에 힘써야 함
  • 하늘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발전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음
  • 천이 어떻게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었는지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잘 연구해서 현대 사회의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와 같은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음
  • 교육을 받고 배움을 얻는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지지 않고, 천의 운명적 측면을 따르는 것도 결국 사회적 기반이 잘 다져져있기 때문일 것임. 이러한 부분에서 의미가 있음
  • 현대의 필요한 부분만 따와서 생각을 하면 좋을 것 같음.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보는 것은 지금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성실해야하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하는 것과 같은 하늘의 특성은 지금도 지향해야할 부분이며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함
  • 기타 질문 및 의문들

○ 하늘이 모든 보편성을 내포한다면 인간 모두의 보편성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하늘을 무서워했어야 하지 않을까?
○ 천이 자연으로서의 속성이 있다고 하면, 자연에는 일정한 규칙도 있지만, 인간사회에 해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음,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인간 본성에도 이러한 속성이 있으면 인간이 무한하게 선하다고 보아도 되는것인가? 자연은 이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보는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짐
○ 중국에서도 자연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음, 자연을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서 더 좋은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따지면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선하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라는 의문이 듬
=> 이에 관해서는 중국철학자들 역시 의문을 가졌음. 한나라 때 사상을 살펴볼 때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음

○ 천이 인간의 성으로 올 때, 인간에 따라서 다르게 발현이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다름을 가져오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짐
=> 이러한 질문에 대한 탐구는 성리학자, 특히 주희에게서 보임. 이에 관해서는 주희의 인간본성론을 다룰 때 살펴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