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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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상은 우리가 배운 것과 다르게 흘러갈까?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 보고, 세상을 살아보려고 해도 가끔 믿었던 사람에게, 믿었던 세상에게 데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원래 그런거냐?!
이런 처절한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유학의 인간본성론을 배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편집 | 원본 편집]

☞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학사, 2004

  • 음력 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 이씨(眞寶 李氏) 가문에서 태어남
  •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춘천 박씨]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
  • 퇴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홀어머니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말을 들을까 하여 매우 엄한 교육을 했음. 퇴계가 그 자신의 성장에 관하여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시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평생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애쓴 자취와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음
  • 14세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여 시를 익히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18세에는 우주를 관조하게 되고 19세에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터득했음. 20세 때 자고 먹는 것을 잊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주역공부에 몰입했음
  • 20세에 진사를 수석으로, 생원은 2위로 합격했음
  • 1535년 6월 35세 때 퇴계는 관리가 되었음. 퇴계는 처음 벼슬길에 나가서는 서울에 살았음. 어린 아들들은 고향에 두었기 때문에 아직 큰 고충을 모르고 지냈음. 30대 후반에 아들이 혼인해서 며느리가 들어오고 이어 손자가 태어나자 조카의 사위 이국량이 워낙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살던 집을 그에게 주고 아들은 처자를 데리고 5,6년간 처가에서 지내게 했음. 아들이 편지마다 처가살이에 대한 고통을 적어 보낼 정도로 이 때 퇴계 가정은 매우 곤궁했음
  • 퇴계는 이 때 '분수를 지키고 천명을 따르자. 내가 궁하므로 너를 처가살이 시키는데 그것은 너의 흉이 아니다. 가난하게 살고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데는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아들을 달래며 가난을 참아나갔음
  • 1548년 48세 때 단양군수로 재직하고 있는 퇴계는 다음과 같은 형편을 아들에게 알리기도 했음
 "권씨부인(자신의 부인) 대상(부인이 죽은 후 2년만에 지내는 제사) 날짜가 임박해 오는구나. 제상은 여기서 보낼 작정이다. 쌀과 면 만들 재료는 보낼 형편이 못된다. 집에서 준비하여라. 다만 저축해 둔 곡식이 없을까 걱정이다."

☞ 사사로운 일에는 친척의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공물(公物: 공적인 국가 물건)은 축내지 않고 손을 대지 않을려고 했음

  • 퇴계의 50대, 1553년 봄에는 대사성(국가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기관장)을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그 뒤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려는데 옷과 말이 없어 출발하지를 못하기도 했음.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논의가 이어지기도 했음
 "경술(經術: 유교의 경전에 근거하여 얻은 정치적 기술, 능력)과 문장이 이황의 오른쪽에 설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불러서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난하고 궁하여 서울에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호조에 명하여 충분히 급료를 내리도록 하십시오."
  • 60대에 일생을 정리하고 70이 되어 세상을 떠난 퇴계는 높은 지위와 많은 봉록을 버리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여 극복해가는 데는 큰 목적과 계획이 있었음
  • 퇴계는 당시 젊은 정치가들의 개혁 의지가 비참하게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 퇴계는 관직생활 가운데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등의 나름의 고군분투를 했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정치 현실 속에서 출사와 진퇴를 반복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매진했음
  • 퇴계는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양반이나 중인이나 상인이나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예로 대했음. 학문을 좋아했던 퇴계는 학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했음. 비록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대를 높여 자(字)를 부르며 높였음. 제자를 벗으로 대했고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이름으로 가리키거나 '너'라고 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도 읍하여 맞이하고 보냈음
  • 퇴계는 엄숙한 아침 생활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음.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연구를 시작했음. 이러한 아침 생활은 서울에서나 고향에서도 변함이 없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도 잘 지켰다고 함. 낮에는 독서를 위주로 하고 사색은 주로 밤에 했음
그러고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이 어떻든, 사람들이 어떻든, 결국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혹여 그런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이미 조금씩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런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의 사단칠정 논쟁, 인간 탐구의 새로운 전환점[편집 | 원본 편집]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 『퇴계집』에 따르면,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 1509~1561)이 그와 이웃에 살았는데 퇴계의 조카가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그 도설과 해설에 고칠 곳을 발견하게 됨. 처음에는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다가 수소문 해서 그것이 정지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됨
  • 특히 이 <천명도>에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며,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작성했던 부분을 이황이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게 함
  • 이에 정지운도 이황의 견해를 따라 새로 <천명신도>를 작성하게 됨. 정지운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보여주었고 고봉은 이에 대해 비판함. 이 비판이 여러 경로를 통해 퇴계의 귀에 들어가고, 퇴계(1501~1570)는 비판의 일부를 인정하면서 자신이 수정한 내용을 고봉에게 편지로 전달했음. 이후 10여 년간 약 1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임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편집 | 원본 편집]

☞ 번역문 출처/참고: 한국고전종합DB (안타깝게 원문은 DB화되지 않았네요ㅠㅠ)
☞ 이상호,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글항아리, 2011, 155~158쪽

 1. 삼가 문안드립니다. 영감(令監)의 체후(體候)가 어떠하신지요? 앙모(仰慕)하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대승은 외람되이 후하게 염려해 주신 덕분에 근근이 지탱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18일에 선생께서 보내 주신 1월 5일의 서신 한 폭(幅)과 아울러 역책 한 부를 받고 반복해서 완미(玩味)해 보니 느껍고 흐뭇한 마음 많았습니다. 우둔하고 무식한 저는 바닷가에 살면서 선생의 여훈(餘薰)을 앙모하여 늘 따라가고자 노력하였는데, 연전(年前)에 다행히 문하(門下)를 방문하여 서론(緖論)을 듣고는 개발(開發)된 것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황홀할 정도로 심취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모시고자 하였으나, 병든 몸이 심한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고, 게다가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드디어 떠날 계획을 하였습니다.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자 고향[전라남도 나주]에 대한 염려는 조금 풀렸지만, 선생의 덕을 사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쌓여 항상 생각이 그쪽으로만 쏠려 슬퍼지고 정신이 멍해지니 어쩌겠습니까.(<1559.3.5일자 편지>) (『고봉전서』「양 선생 왕복서)」)
 2.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만약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여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가 갈라져서 두 가지가 되는 것이며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이 기(氣)를 타지 않는 것이 되니, 말의 뜻에 병폐가 없을 수 없을뿐더러 후학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또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치신다면 비록 앞의 말씀보다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역시 타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
 이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의 재료이니 이 두 가지에는 원래 구분이 있으나 그것이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 혼합되어 있어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며 리는 조짐이 없고 기는 자취가 있기 때문에 유행하고 발현하는 사이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과불급]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칠정의 발함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여 성의 본체가 혹 온전하지 못함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은 바로 천명의 본연이고, 악한 것은 곧 기품의 과불급[지나치거나 모자람]이니 이른바 사단, 칠정이란 것이 원래부터 별개의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고봉전서』)

=> 퇴계는 일전에 고봉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를 "사단의 발함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함은 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情之發兼氣, 故有善惡]"로 바꾸었음

  • 고봉의 기본 관점

○ 고봉은 이미 드러난 양상에 주목했음. 이와 기가 합쳐져서 감정이나 운동, 사물과 같은 '존재의 형태'로 드러난 것은 이와 기의 구분이 어려움
○ 본성은 하늘의 이치[천리(天理)]이므로 모든 사람에게서 이것은 동일함. 그러나 사람의 감정에 따라 본성이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 본성이 문제가 아니라 감정에 따라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것임. 고봉은 선과 악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 그 자체를 모두 일반 감정, 칠정이라고 보았음.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것임. 칠정 가운데 선한 것만을 뽑아내면 사단임
○ 세상 모든 것은 이와 기가 함께 있는 것. 사단, 칠정도 이와 기가 함께 하는 것인데 사단은 이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고 나누어 볼 수 없음. 이황의 말처럼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면 사단에는 기가 없고 칠정에는 이가 없게 됨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편집 | 원본 편집]

 3.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인, 의, 예, 지의 본성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희[喜: 기쁨], 노[怒: 성냄]. 애[哀: 슬픔], 구[懼: 두려움], 애[愛: 사랑], 오[惡: 미움], 욕[欲: 욕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바로 마음 밖에 있는 사물 및 다양한 사건이 사람의 오관[五官: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접하게 되고 그것이 마음을 움직여 각 환경에 따라 감정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선한 감정이 활동하게 되는 곳을 맹자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마음이란 이와 기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理) 위주로 맹자가 말했던 것은 왜일까요? 인, 의, 예, 지와 같은 본성이 순수하게 감정 속에 자리잡고 있고 이 네 가지 선한 감정인 사단이 그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
 사단은 참으로 선하기만 하므로 '사단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정은 '선한' 감정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칠정은 아직 선과 악이 결정되지 않은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도 똑바로 살피지 않게 되면 마음이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사단과 칠정 모두 이와 기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근거에 따라 각각 주된 것, 또는 중심을 두는 것이 다릅니다. 바로 이 점을 가리켜서 어느 것은 이에서 나왔고 어느 것은 기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선생사칠리기왕복서』 「퇴계답고봉사단칠정분리기변」)


 4. 사단도 감정이고 칠정 역시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 둘 모두가 정말 같은 감정이라면 굳이 사단이니 칠정이니 하면서 달리 부르겠습니까? ... 옛날 성현들께서 언제 이와 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둘을 뭉뚱그려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구별하지 않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양선생사칠리기왕복서』 「퇴계답고봉사단칠정분리기변」)


 5. 만약 칠정을 사단과 대비시켜 각각 구분해서 말한다면 칠정이 기와 관계를 맺는 것처럼 사단은 이와 관계를 맺는 것이니, 이처럼 두 감정은 각각 다른 혈맥이 있고 그 이름을 통해 각각 가리켜 말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각각의 감정이 드러나는 데 있어서 주된 역할을 한 것에 따라 나누어 소속시킬 수 있습니다. ...
 사단이 마음 밖의 사물이나 상황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감정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도 칠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일 뿐입니다.[사즉이발이기수지(四則理發而氣隨之), 칠즉기발이이승지(七則氣發而理乘之耳)]

=>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일 뿐입니다.[사즉이발이기수지(四則理發而氣隨之), 칠즉기발이이승지(七則氣發而理乘之耳)]'를 이상호는 "사단은 이치가 주도적으로 드러나려고 하자 기가 그러한 이치를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나려고 하자 이치가 그 기를 타게 된 것"이라고 번역했음

  • 퇴계의 기본 관점

☞ 김교빈, 『한국철학에세이』, 동녘, 2009

○ 리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서 사단을 기에 섞어 말한다면 사단에 선만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 될 수 있음. 인간의 본성이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구분될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도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할 수 있음
○ 사단과 리의 우위성을 확보하고 기의 불완전성과 인욕으로의 타락 가능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임
○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 한 것은 군자와 소인을 결코 뒤섞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음. 고봉처럼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악이 될 수도 있는 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될 수 있는 우려가 있음


오늘의 토론 주제(2023.05.18)[편집 | 원본 편집]

 퇴계의 이론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일상 속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3.05.18)[편집 | 원본 편집]

  • 쉽게 적용하기 어려움

○ 퇴계의 이론 중 내 삶의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이를 지키는 것대로 살아가면, 더 삶을 가치있게 살아갈 순 있을 것 같지만 이를 지키면서 사는 것이 쉽진 않을 것 같음
○ 퇴계의 이론은 당위적이기보다 이론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에, 그닥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음
○ 너무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음. 사람이 항상 앉아서 공부만 하고 살 순 없음. 물론 얻게 되는 것이 많긴 하겠지만 삶의 재미는 사라질 것 같음
○ 선한본성이랑 감정을 구분하는게 의미가 없어보임
○ 내면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리'에 대한 이론을 좀 더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음

  •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이 가능함

○ 외물에 영향을 덜 받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히려 더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음. 꼭 뭔가를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간의 관게에서도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도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 등을 고치기 위해 기준을 가지고 살기) 더 나은 것 같음
○ 퇴계의 이론을 퇴계의 청렴하고 타협하지 않는 인생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일상이 보다 정돈된 느낌이 될 것 같음

  • 이상적인 사회의 현실화 가능

○ 퇴계가 말한 것처럼 기와 외물에 휩쓸리지 않고 모두가 살아간다면 유학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에 가까워질 것 같음
○ 자기수양을 통해 폭력이 없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음. 그리고 외부의 자극에 상관없이 늘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갈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함